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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칭기즈칸 (테무진) ② 정복 : 서하 (1227)ㆍ호라즘 (1231)ㆍ금( 1234)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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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ㆍ대상(隊商)ㆍ무력 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1. 몽골군의 특징

① 믿을 수 있는 군인들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② 유연한 무기사용

칭기즈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ㆍ쇠뇌ㆍ사다리ㆍ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칸은 서서히 공격ㆍ파괴ㆍ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③ 유능한 참모들

칭기즈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 말 아무다리야 강(고대명 옥수스)과 시르다리야 강(고대명 작사르테스) 지역에서 호라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2. 몽골 민족의 흥망성쇠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 확장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 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그는 자신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3. 몽골 족의 통일

① 칭기즈칸의 지도력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영토병합)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② 1227년 : "서하" 정복 • 1234년 : "금" 정복

칭기즈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③ 1231년 : "호라즘(투르크계 국가, 현재, 우즈베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으로 분할)" 정복

칭기즈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칸의 보호 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이날축"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샤(황제)"는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호라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 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1223년 마침내 그는 철수했고 1226~1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08.18일에 죽었다.

4. 칭기즈칸의 정복활동 : 서하 (1227)호라즘 (1231)(1234)

정복 : 서하 (1227년) • 금 (1234년)  • 호라즘 (1231년, 투르크계 국가, 현재, 우즈베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으로 분할)

"서하"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라를 합병하였다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중국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몰도바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그루지야이라크이란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쿠웨이트터키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데,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하"와 "금"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이루고,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ㆍ중국ㆍ러시아ㆍ벨라루스ㆍ우크라이나ㆍ몰도바ㆍ아제르바이잔ㆍ아르메니아ㆍ그루지야ㆍ이라크ㆍ이란ㆍ카자흐스탄ㆍ키르기스스탄ㆍ우즈베키스탄ㆍ타지키스탄ㆍ아프가니스탄ㆍ 투르크메니스탄ㆍ쿠웨이트ㆍ터키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몽골군은 1260년 봄, "훌라구 칸"의 부관인 "키트부카"의 지휘 하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까지 진출했다. 당시 "고려"와는 오랜 전쟁 끝에 강화를 하고 고려의 자주권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저항이 40여 년 동안 지속되고, 산악 지대가 많은 고려 정벌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끝까지 저항하는 고려인들을 힘만으로는 더 이상 굴복시키기 어려운 이유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몽골군은 "베트남 정벌"에 실패했는데, 이는 밀림지대인 베트남에서 몽골군의 주력인 기병이 전혀 힘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 1227년 : "서하" 정복

① 서하에서의 전술

몽골을 통일한 그는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 최초의 공격을 시작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알라샨","오르도스"에 세운 나라로, "탕구트 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종교는 "라마교(티베트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평원에서 전쟁하는 것에 능했던 몽골인들은 "서하"군과의 유격전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두어 여러 차례(1205~1207년,1209년) "서하"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몽골의 총공격이 감행된 3차 침략 때, "서하"군은 전차부대와 장창부대를 앞세워 한순간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기동력의 부족으로 몽골군의 "산개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고, 결국 총사령관 "외명령공"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② 서하의 항복

몽골군은 수도인 "영하"를 포위했으나, "공성전"의 경험이 없던 몽골군은 이를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댐 건설의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는 댐 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오히려 사고로 수십 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몽골군은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특히 피해가 심했다). 

한편 "양종 이안전"은 농성기간 동안 "금"에 구원요청을 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고, 물자 부족에도 시달렸다. 결국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③ 서하의 멸망

1211년 "이준욱"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양종" 역시 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군주로, 이러한 일이 몇 년 안에 잇따라 발생하자 이전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금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게다가 1219년, 1226년에는 연달아 칭기즈칸의 "서정(西征)"참가를 거부하여 칭기즈 칸의 분노를 샀다. 칭기스칸이 "호라즘" 원정에 앞서 "서하"에 사신을 보내 출정을 명령하자, "아샤 감부라"는 "탕구트" 고관은 이렇게 답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칸은 다 무엇이냐?" 이는 만약 칭기스칸에게 충분한 병력이 없다면 그는 최고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서하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호라즘"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다. 또한 그들은 이 판단에 의거해 몽골군의 부재를 틈타 몽골의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라즘"이 몽골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이러한 "서하"의 결정은 치명적인 실수임이 드러났다.

1224년 칭기스칸은 "서하"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페샤와르"를 떠나 몽골고원으로 귀환했다. 1225년 봄, 그는 몽골 고원에 도착했고, 여름에는 내정을 다지고, 가을에는 "카라 툰"의 행궁에서 묵었다. 1226년 가을, 칭기스칸은 "서하"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칭기스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 칭기스칸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때 칭기스칸은 남하하여 "육반산"남쪽에서 야영했다.

"라시드 앗 딘"은 이 남하의 목적은 칭기스칸이 "남송"이었다고 적었다. 그때 "서하"는 칭기스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스칸은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칭기스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탕구트의 군주와 백성들이 기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오면 그들을 모두 없애 버려라!" 1227.08.15일(또는 08.18일) 칭기스칸은 죽었다. 그 뒤 "서하"의 수도 "영하"는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④ 잔혹한 보복

한편 "서하"를 점령한 칭기즈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실시했는데, 이는 "서하"의 "호라즘"전 참가거부가 칭기즈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2차 침략에 대한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칸의 "섬태멸진"방식의 정복 전쟁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몽골군은 "서하"사람들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해서 멸족시켰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며,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6. 1231년 : "호라즘(투르크계 국가, 현재, 우즈베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으로 분할)" 정복 >

① 1차 충돌

"금나라" 정복 기간 중,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호라즘"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1218년에 있었는데, 1218년 당시 "호라즘"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황제)"의 통치 하에 쇠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를 몰아내고, "서요"를 속국으로 삼으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에서는 명맥만 유지하던 "메르키트 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몽골군은 남은 "메르키트" 병사들을 "서요"국경지대까지 쫓아가 전멸시켰다.

이 때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요"를 방문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이를 우습게 본 "샤"가 몽골군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 군대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밀한 전략과 기마술로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습격해 왕실 물품을 소수 탈취했다. 

② 외교 결렬

이후 칭기즈 칸은 "나이만 전" 당시 도망쳤던 "나이만"족장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국왕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수 "제베"를 시켜 "서요"를 공격해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함으로써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호라즘"과 같은 강국과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칭기즈칸은 이후 "호라즘"과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샤"는 편지에 쓰여 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아들처럼 대할 것"이라는, 자신을 비하하는 글귀에 분노했다.

그는 통상에 응하였으나, 통상을 위해 방문한 450명의 상단을 "오트라르 성"의 성주 "이날축"을 시켜 붙잡아 처형했고, 항의하러 온 사신단 마저 처형했다. (일각에는 칭기즈칸의 전쟁을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이는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었으니, 칭기즈칸은 이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19년 20만의 병력으로 "호라즘" 침공을 개시했다.

③ 내분 전략

침공 전, 칭기즈칸은 "호라즘"제국 내의 불화와 반목을 이용하는 계략을 펼쳤다. "호라즘"은 "알라 웃딘"의 통치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내정을 안정시킬 기간이 없어 나라 안 민중과 귀족, 왕족들 간의 파벌 갈등이 심했다. 칭기즈칸은 "호라즘" 내의 여러 장수나 귀족들이 몽골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한 편지를 "샤"에게 들어가도록 했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에게 복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해진 "샤"는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기고, 몽골군의 몇 배가 넘던 대군을 이리저리 갈라 배치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몽골군의 "호라즘" 정복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④ "아바스"왕조의 정보제공

"아바스"왕조에서는 "호라즘"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에게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⑤ 호라즘 함락

"호라즘"을 침공한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함락하고, "샤"의 명에 따라 몽골 "대상단"을 처형한 성주 "이날축"의 눈과 귀에 끓는 은물을 부어 처형했다. 이후 몽골군은 "호라즘"의 전 수도 "부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샤 알라 웃딘"이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포위하여 5일 만에 함락했다. "샤 알라 웃딘"은 함락 전 성에서 빠져나와 달아났고, 칭기즈칸은 도망친 "샤"를 잡기 위해 "제베"와 "수부데이" 두 장수에게 "샤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할 것을 명했다. 이에 쫓긴 "알라 웃딘"은 나라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고, 그가 도중 머문 성이나 마을은 몽골군에게 철저히 짓밟혔으며, "알라 웃딘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살던 "마잔다란"마저 함락당하고 황태후는 몽골군에게 농락당해야 했다.

⑥ 샤 (황제)의 죽음

결국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샤"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피신했다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샤"의 아들 "잘랄 웃딘"이 몽골군에 항전했으나, 그가 지키던 "우르겐치"성은 끝내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일가족을 잃었다. 군대를 모아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패배 소식을 접한 칭기즈칸이 직접 토벌에 나서자,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한 뒤, "인더스"강을 건너 도망쳤다가, 1년 뒤 "쿠르드"산지에서 그곳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⑦ 호라즘 정복의 의미

한편 "호라즘" 정벌을 떠나기 전, 칭기즈칸은 "서하"에 참전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이후 몽골이 "서하"를 재침략하여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호라즘" 정벌은 몽골군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ㆍ카프카스ㆍ러시아까지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라즘" 정벌 전 때, "호라즘"을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을 이용하려던 "아바스 왕조"는 이후 그 몽골군에 의해 멸망했고, "바그다드"의 "칼리프" 역시 살해당했으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권이 몽골군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⑧ 호라즘의 어리석음

"무함마드 샤"가 "몽골의 대상단"을 살해한 것에 대해 많은 이슬람 역사가들은 이슬람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요인으로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무함마드 샤"는 뛰어난 통치술로 단기간에 넓은 땅을 차지했으나, 어리석게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 자신에게 "칼리프" 자리를 넘길 것을 요구하여 이슬람 형제의 반감을 샀다. 또한 안정되지 않은 국내 사정을 무시하고, 몽골에게 도발하여 화를 자초하는 무모한 모습을 보여 후세에 어리석은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7. 1234년 : "금" 정복

① 금과의 관계

칭기즈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와 함께 "금"의 "마달갈(장종,1189~1208)"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장종의 신하였으며,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의 종증조부 "안바가이 칸"이 "금"나라로 끌려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고 처참하게 죽은 것을 그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마달갈"이 죽자, 그의 후계자 "영제(위소왕)"는 칭기즈칸이 군신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늘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던 칭기즈칸은 무능한 통치자인 영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② "웅구트" 사람들의 협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특히 거란인 출신 장수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도와, "금"황제의 목마장을 습격해 수십만 마리의 군마를 탈취하여 몽골군의 기병력을 대폭 증강하는데 기여했다.

1212년에는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 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다.

③ 금나라 정복시작

칭기즈칸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3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몽골 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의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 이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조정에서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영제"가 "홀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홀사호"는 "영제"의 조카인 "오도보(선종)"를 제위에 앉혔다.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에다가 물자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칸은 "오도보(선종)"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④ 북경 함락

이후 "오도보(선종)"는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였고, 칭기즈칸은 그것을 반격의 준비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마침내 성공적으로 함락해,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몽골군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 들어가서 한 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사람들이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후진적이었다.

⑤ 금나라 정복의 마무리

"금"은 "개봉"천도 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다시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칸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 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와 "톨루이"에 의하여 1233.05월에야 정복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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