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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손문 (孫文)ㆍ쑨원ㆍ중산ㆍSun Wenㆍ1866~1925ㆍ59세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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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 원 (손문(孫文)ㆍ중산ㆍSun Wenㆍ1866~1925ㆍ59세)"은 삼민주의ㆍ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ㆍ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립자ㆍ외과 의사ㆍ정치가로, 삼민주의 (민족주의 (民族主義)ㆍ민권주의 (民權主義)ㆍ민생주의 (民生主義))를 제창하였다.

 

1. 쑨 원 (손문(孫文)ㆍ중산ㆍSun Wenㆍ1866~1925ㆍ향년 59세)

중화민국 : 국부로 추앙 (1911~12: 중화민국 초대 임시총통, 1923~25년 : 중국 실질적인 통치자)  / 중화인민공화국 : "마오쩌둥" 보다 유명한 혁명 선구자로서 존경

출 생 : 청나라 광둥성 샹산 (香山)          사 망 : 중화민국 베이징(北京) (- 징 시외 중산릉에 안장장제스가 1928년 북벌성공 후, 1929.06.01일 중산릉에 안장)           사 인 : 병사 (간암)

 시 신 : 모두 4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06.0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될 수 있었다.           성 명 : 쑨원 (손문(孫文)Sūn Wén)이라는 이름은 10세 무렵부터 사용           본 명 : 쑨더밍 (손덕명(孫德明)- 호적상 이름           아 명 : 쑨디샹 (손제상(孫帝象)

 호 : 일선 (逸仙ㆍYìxiān 이시옌)ㆍ일신(日新)일신(日新)이었는데,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逸仙)이라는 또 다른 ()를 병용한다. 일신과 일선은 광둥어로 발음하면 "Yat-sen(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별 칭 : 중산 (中山ㆍ Zhōngshān)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저우에서 1895년 30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중산 초(中山 樵ㆍ나카야마 키코리)"에서 유래한다.  청조와 일제, 그리고 군벌 등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        수 상 : 건국훈장 중장 2(19621968)

처 : 본처- 루무전(1885~1915)ㆍ후처- 송경령(쑹칭링ㆍ1915~1925)  /  첩1- 천추이펀(1892~1925)ㆍ첩2- 아사다 하루(1897~1902)ㆍ첩3- 오쓰키 가오루(1903~1906)        자 녀 : 1남 2녀(쑨커(孫科)ㆍ쑨진위안(孫金媛)ㆍ쑨진완(孫金婉))

 친 구 : 청년 시절부터 "쑹자수(宋嘉樹)ㆍ루하오둥(陸皓東)"과 절친한 친구 관계였다.  "흥중회" 동지인 "루하오둥(陸皓東)"은 1895년 청나라 관군에 체포되어, 사형 집행되었다.  친구이자 장인인 "쑹자수"는 훗날 "개신교 목사"가 되었고, "쑨원"이 "쑹자수"의 차녀인 "쑹칭링"과 재혼하였기에 "쑹자수"가 "쑨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학 력 : 홍콩 Alice 의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정 당 : 흥중회(興中會)중국 동맹회(同盟會, 중국혁명동맹회)중국 국민당           저 서 : 삼민주의ㆍ건국방략ㆍ건국대강ㆍ제1차 전국대표대회선언           종 교 : 조합교회

2. 사상 : 삼민주의 (三民主義)

• 정치 이념 : 중국혁명의 이념적 토대가 된 "삼민주의"로 대표

"민족주의 (民族主義)ㆍ민권주의 (民權主義)ㆍ민생주의 (民生主義)"의 3원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3원칙은 하나로 연결되어 통일된 사상체계를 형성한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인민주권 설)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單稅論 )"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만년에는 "연소(聯蘇)ㆍ용공(容共)ㆍ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쑨원"은 "삼민주의는 구국주의(救國主義)이다."고 말했으며, 나아가 "중국의 국제적 지위의 평등ㆍ정치적 지위의 평등ㆍ경제적 지위의 평등"을 촉지하여, 중국을 영원한 세계의 독립국가로서 생존하게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 "민족ㆍ민권ㆍ민생" 주의의 일반적 특색이 나타나 있다.

① 1번째 원칙 "민족주의"는 "국족주의(國族主義)"라고도 한다.

: "중국"에는 가족과 종족의 단체가 있을 뿐, "국가적 민족"으로는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외국의 식민지가 되어, 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을 망국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제창하고, 민족정신을 중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② 2번째 원칙 "민권주의"

즉 "국민의 권리"는 "민주주의"라고도 하는데, "선거ㆍ발의권ㆍ국민투표ㆍ소환권"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자신의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민권주의"가 달성될 수 있다고 했다.

③ 3번째 원칙 "민생주의"

즉 종종 "사회주의"로 통하는 "인민의 생활권"은 이 3원칙 가운데 가장 의미가 모호하다. 올바른 "과세 제도"를 통한 "토지 소유의 균등사상"을 염두에 두고, "민생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쑨원과 군벌의 관계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조직"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직위를 살펴보면, 1912.01월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臨時 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1917년 "광주"에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었다.

1921년, "비상 (임시)대총통"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가 된다.

왕징웨이 (왕정위ㆍ汪精衛ㆍ1883~ 1944ㆍ61세ㆍ일본 나고야에서 병사) 

중국의 대표적인 "매국노(漢奸ㆍ한간)"로 불린다ㆍ난징 왕징웨이 정권 제1대 주석(1940~ 1944) 중국 국민당의 일원으로 쑨원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장제스"와 대립하는 라이벌로 유명하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난징"에 "친일 괴뢰 정권"을 세웠다. "중국 국민당"의 요직을 역임했던 그는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1938년 "베트남 하노이"로 도망가 그곳에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이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1940.03.30일, "일본"의 협조를 얻어, 별도의 정권을 선포하였으나 민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쑨원 (孫文)에 의해 제창된 지도이론

"삼민주의"는 중국 민주혁명 초기의 지도자 쑨원(孫文)에 의해 제창된 지도이론으로, 중국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1911년의 신해혁명은 이 이론에 따라 수행되었다.  "민족주의ㆍ민권주의ㆍ민생주의"의 사상이다. 1896~1897년 쑨원이 영국 런던에서 망명하던 중에 구상된 것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에 입각한 "민족주의", 수천 년간 내려온 군주전제 정체의 변혁을 목표로 한 "민권주의", 사회ㆍ경제의 조직 개혁을 지향하는 "민생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혁명 이론이다.

현대의 중국에서는, "1924년 국공합작" 이후, 그가 주창한 "삼민주의" 강령에서,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로민권주의는 기본적 인권옹호와 인민 민주독재로민생주의는 토지와 경작자에게"라는 내용으로 현대의 변화에 의미의 중심을 두고 바뀌었다고, "삼민주의"를 교육한다.

 ㆍ후기의 삼민주의 (민족ㆍ민권ㆍ민생주의)사상

1855년 "광저우(廣州)"에서의 봉기실패기 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1905년 "국민당"의 전신인 "중국혁명동맹회"의 강령에 이 "삼민주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사상도 중국혁명의 발전에 따라 보다 깊어져 갔다. 후기의 "삼민주의" 사상체계가 완성된 것은 그가 사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24년이라고 보고 있다. 이 해에 쑨원은 "국민당"을 개편함과 동시에 "삼민주의"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였다. 

즉, "민족주의"는 국내 제(諸)민족의 평등과 외국의 침략, 불평등조약 등에 대항하는 것, "민권주의"는 주권이 인민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의 균형으로서 나타나는 것, "민생주의"는 인민의 생활안정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주장으로서 최종목적은 대동세계(大同世界)의 실현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1927년 "국공분열"  "장제스(蔣介石)"는 "삼민주의"에서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부분을 배격하고, 나아가 "반공주의적" 내용을 부여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삼민주의"가 곧 지도이론으로 발전

1905년, 쑨원이 일본 도쿄에 망명하던 중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했는데, "동맹회" 결성 후에는 "삼민주의"가 곧 지도이론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신해혁명" 후, 혁명운동의 진전에 따라 그 내용도 점점 변화되어가고 발전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삼민주의"의 원형과 현대 중국 본토의 "역사관"은 사뭇 다름을 인지하여야 한다. 즉, 1905년 "혁명동맹회"에서 제시된 초기 "삼민주의"와 대비하여, 현재의 "삼민주의"와 정치사상은 다름을 이해하고 인지하여야 한다.

초기 삼민주의와 현재의 삼민주의는 같지 아니하고, 이의 변화는 중국 현대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예로, 초기 "삼민주의"와 연관된 1905년 당시의 동맹회 구호는 "구제달로(驅除撻虜: 달로(오랑캐)를 박멸한다)ㆍ회복중화(恢復中華)ㆍ창립민국(創立民國)ㆍ평균지권(平均地權)의 4대 강령이었다.   "구제달로(驅除撻虜)"의 "민족주의 강령"은 중국 통일 후, 소수민족 수용을 위한 민족주의로서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정치적 필요를 고려하여 현대화 수용되었으며, 현재의 민족주의는 중국내부의 "한족ㆍ만주족ㆍ몽고족ㆍ회족ㆍ장족"등 여러 소수민족과 한족이 상호 평등 및 대외적으로 "하나의 중국 민족"으로 본다고 중국 내부에서는 교육되고 있다. 즉, 초기 삼민주의에서 제시된 "구제달로" 등 과격한 구호는 현재 마땅히 표현되지는 않고 있다.

3.  대 아시아주의자

쑨원은 "대 아시아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1897년경부터 일본에 망명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정계인사들하고 상당히 친분이 두터웠으며, 일본에 망명해 머문 기간은 총 10년에 이른다. 1924.11월이 마지막 일본 방문이 되었다. 1924.11.24일에 일본 고베에 도착, 11.30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고베에서 11.28일 고베여자고등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은 쑨원의 일생에서 최후의 공식적인 강연이자, 가장 유명한 발언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쑨원은 "중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연합 주장"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고 새로운 열강이 된 이후, 일본은 아시아 약소민족들의 희망이 되었다.(중략) 현재의 세계적 정세는 동양과 서양의 대립 상황인데 서양문화의 기반은 이욕과 강권(무력)에 기반하는 "패도문화"인 반면, 일본과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문화의 기반은 도덕과 인의에 기반하는 "왕도문화"이다.(중략) 이러한 왕도문화를 발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민족들의 대 연합, 즉 대아시아주의가 실현되어야 하며, 현재 강권적 패도문화로부터 이탈해 나와, 동양의 인의 도덕에 접근하고 있는 소련과의 연합도 모색해야 한다."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기본적인 목표가 있어서, 일본의 그것과는 구별될 수 있다.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일본의 팽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한 것이었던 반면,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그 출발점을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한 대항에 두고 있었다. 다만, 쑨원의 초기 대아시아주의는 유럽 백인종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황인종들의 단결을 주장했던 것으로, 열강의 침략을 "백인종의 침략"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반제국주의 인식을 가지지 못한 채, 황인종인 아시아인들의 단결만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설명한 고베 강연에서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패권주의로 경도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면서,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고 지적하고, "시대 조류에 순하면 흥하고, 역하면 망한다(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卽昌 逆之卽亡)"고 경고하였다.

박선영(포스텍 인문사회학부 동양사 교수) 쑨원의 고베 강연에 대해, "쑨원이 주창한 아시아 연대는 서양의 반식민지를 경험하고 있던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대한제국이 이미 "제국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일본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연대를 강화한다는 것은 모순된 것이었다. 한· 중· 일이 각기 주창했던 "아시아 주의"는 지향하는 목적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아시아 제국과의 연대를 통해 구체적이고,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정립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존재했다."고 평가했다.

4. 생애 : 국부 (國父)혁명선행자 (革命先行者)로 존경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견해를 표명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크게 발전시켰다.  "삼민주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가 제창한 "삼민주의 정신"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중국 대륙 및 타이완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는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고,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부"보다는 "마오쩌둥" 보다 유명한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중화민국"의 기록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과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ㆍ공 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은 쑨원 말년의 "소련ㆍ코민테른ㆍ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쑨원은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 현재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의 형 쑨메이(孫眉)에게로 가서, 호눌룰루의 신교계(新敎系)고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와 홍콩(香港)의 서의서원(西醫書院: 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 광저우등에서 개업하였다. 외과에 능하였는데, 병원은 날로 번성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스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反淸運動)"에 참가하였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領地)"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화교(華僑)들을 모아, 1895.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고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쑨메이(孫眉, 손미)"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 의학교"때의 스승 "J. 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宮崎滔天)"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康有爲)"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惠州)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1905년 "러ㆍ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東京)"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反淸)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1912년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1911.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01.0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어, 1912.01.0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후 "북양군벌(북부의 군벌들)"의 거두 "위안스카이 (袁世凱, 원세개)"와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었다. 1912.03.01일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 03.10일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같은 해 "쑹자오런(宋敎仁)"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遠, 반 원세개)운동"을 계속했다.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護法運動)"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 "반 군벌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러시아 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ㆍ공합작), 노동자ㆍ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였다.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ㆍ용공ㆍ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북벌을 꾀하기 위해 "국민혁명"을 주장하였다.

1925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베이징(北京)"에서 객사하였고,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南京)"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에 묻혔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62년과 1968년 2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5. 연 보

1894 : 하와이 호놀룰루 흥중회(興中會)조직(강령- 만주족 축출, 중국 회복, 연합 정부 건설) 1895 : 홍콩 흥중회 창설(10월에 흥중회는 광저우에서 봉기를 모의하나 사전 누설되어 실패. 해외로 망명) 1896 : 영국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남

1904 : 일본ㆍ하와이ㆍ베트남ㆍ사이암(태국)ㆍ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전파 1905 : 필리핀독일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 단체 조직ㆍ8월에 흥중회화흥회(華興會)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일본 동경에서 동맹회(同盟會)를 창건, 총리에 추대. "만주족 축출중화 회복민국 창립토지 소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동맹회의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서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를 발표

1906~ 1911 : 해외의 모금 활동 등으로 중국 내의 여러 봉기를 지지  1911.10.10 : 신해혁명 발발(무창(武昌)에서 일어난 반란) 12월 하순 미국에서 귀환, 17개 성 대표자들에 의해 임시 대총통에 추대  1912.01.01 : 남경(南京)에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大總統) 취임선포, 임시정부 구성  02.12 :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부의) 강제 퇴위  02.14 : 위안스카이(袁世凱)와의 협약에 따라 임시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양위하고 사임  03.11 : 중화민국 임시약법(臨時約法) 반포  07~08 : 동맹회(同盟會)가 국민당으로 개편하여, 쑨원을 이사장(理事長)으로 추대

1913.03 :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대리이사장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 위안스카이를 무력 타도할 것을 주장  07 : 2차 혁명 주도실패일본으로 도피  1914.07 : 도쿄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  1915 :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가 10.25일 동경에서 쑹칭링(宋慶齡)과 결혼

1916 : 위안스카이 사망, 단기서가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음  1917 : 서남군벌(西南軍閥)과 연합하여 광주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대원수(海陸軍大元帥)에 추대임시약법 수호 투쟁  1917.10 : 러시아 10월 혁명  1918 : 군벌과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아, 5월에 대원수직을 사임, 일본을 거쳐 상해로 이주  1919 : 54 운동  1919.10.10 : 중화혁명당을 국민당으로 개칭 (동맹회의 국민당 국회는 1913년에 위안스카이에 의해 해산된 바 있음) 

1920 : 복건성과 광동성 주둔군에 회군을 명령하여, 광동에서 계계군벌(桂系軍閥) 축출  1920.11 : 광주에서 다시 임시약법 수호 운동  1921 : 광동 신정부 수립, 임시 대총통 취임  1922.06 : 진형명(陳炯明)의 반란. 광주를 떠나 상하이로 이주  07 : 중국 공산당이 54운동 정신 계승과 반제국주의를 강령으로 상해에서 비밀리에 결성.  반란 후,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과 합작하기 위하여 이대교(李大钊) 등 유명 공산당 인사들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게 함

1923.01.01 : 국민당의 개진(改進)을 발표, 제1차 국공합작 시작  02 : 광주로 돌아가 다시 육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 대원수(海陸軍大元帥)의 이름으로 군권과 정무 총괄  08 : 장제스(蔣介石)를 포함한 대표단을 소련으로 파견  10 : 소련에서 파견된 보로딘(Borodin)을 고문으로 초빙  1924.01 :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주에서 소집.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 황푸군관학교 설립  1925.03.12 : 향년 58세로 베이징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2년간 베이징 벽운사(碧雲寺)에 임시 안치. 시신은 모두 4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06.0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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