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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장개석 (蔣介石)ㆍ장제스ㆍ1887~1975ㆍ88세ㆍ대만 총통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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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蔣介石ㆍ1887~1975ㆍ88세)"는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으며,  1948.05~1949.01일까지는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국가원수)"를 지냈고 1950.03~1975.04월까지 1~5대(리쭝런의 직무대행기간 및 사망으로 인한 옌자간의 직무승계기간 제외)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했다.  

 

1. 장제스 (蔣介石ㆍ본명 : 장중정(蔣中正)ㆍ1887~1975(타이베이(臺北))ㆍ88세)

중화민국 군인정치가군사 지도자국민정부 총통(24)총통(1~51925~1975)1928~1949년 :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석1949년 이후 : "타이완(臺灣)" "국민 정부" 주석ㆍ황푸군관학교 교장국민혁명군사령관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중화민국 행정원장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중국 국민당 총재삼민주의 청년단 단장종교(감리교)

1906, "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 갔다. "일본" 유학시기에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쑨원"의 신임을 받아 1923"1차 국공합작" 때는 "소련"으로 군사시찰을 갔으며, 귀국 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6,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을 시작하였으며, 1927.04월에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중국공산당"을 축출하고, 1928년에 "베이징"을 점령하여 "북벌 완수"를 선언했다.

"난징" 수도로 정하고, "국민정부"를 선포, 국민정부 주석//공군 총사령이 되어 정당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930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이를 "항일전쟁"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1936"공산당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갔다가 부하인 "장쉐량"과 그의 군대에 의해 감금당한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여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중일전쟁)"에 나섰다.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일전쟁"에서 중국(당시 중화민국)을 승전국으로 만들지만, 1946년부터 다시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으며, 1949"중국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중화민국의 총통국민당 총재로 장기 집권하다가 사망했다.

2.  생 애

해안에 인접한 저장 성의 비교적 유복한 상인ㆍ농민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관(軍官)이 되기 위하여, 1906년 중국 북부에 있던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 입학했고, 이어 1907~1911년 일본에 유학했다. 1909~1911년 "일본 군대"에 근무하면서, 일본군의 스파르타식 규율을 숭상하고 따르게 되었다. 또한, "도쿄(東京) 유학" 시절에 만난 젊은 동료들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조국 땅에서 이민족인 만주족을 몰아내자는 결의를 했고, 이 과정에서 그는 "공화주의 신봉자ㆍ혁명가"로 변모했다. 1911년, 중국에 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돌아와, "청조(淸朝) 정부"를 전복시킨 산발적인 전투에 참가했다. 1913~16년에는 중국의 공화주의자들 및 기타 혁명가들과 합세하여, 중국의 새 총통이며, 후에 황제로 등극한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 같은 공적인 활동에 뒤이어, 장제스는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1916~17년의 2년 동안 상하이(上海)에 살면서 부정한 금전거래와 관련 있는 "비밀결사 청방(靑幇)"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18년 국민당의 지도자 "쑨원(孫文)"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공적 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쑨원"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세력기반을 넓혔다. 

"쑨원"의 주요목표는 "위안스카이" 체제의 붕괴와 함께 군벌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중국대륙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혁명가들은 "청조"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뒤, 그것을 "한족" 출신의 군벌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는데, "군벌들"을 물리치는 일에 혁명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쑨원"이 "소비에트 식"으로 "국민당"을 개편하기 시작한 직후인 1923년 "장제스"는 "소련"을 방문하여 "소비에트 제도"와, 특히 "적군(赤軍)"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다.

4개월 뒤, 중국으로 돌아와, "광둥(廣東)" 근처의 "황푸(黃埔)"에 "소비에트 식"으로 세워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이에 따라, "소련"의 군사고문관들이 "광둥"에 많이 몰려들었다. 이 당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어, 1925년 "쑨원"이 죽자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그 결과 공산주의자들과 "국민당"의 보수적 인사들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장제스"는 "황푸 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지원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쑨원"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였고, 공산주의자들의 이 같은 위협에 아주 적절하게 대처했다.

그는 "강ㆍ온 양면작전"을 번갈아 써가면서, "소련"의 지원을 잃지 않는 가운데, "중국공산당원들"의 세력을 견제했다. "소련"은 그를 지원했으나, 1927년 그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서 몰아내고, "공산당"이 조직한 노동조합 등을 탄압하여 마침내 "공산당"과 갈라서게 되자, 그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한편 "장제스"는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1925년 이래,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1926년 "중국 북부의 군벌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대규모 북벌을 개시했다. 1928년, 그의 군대가 수도인 "베이징(北京)"에 입성하면서 "북벌"은 끝났고, 그해 "난징(南京)"에 그를 정부 수반으로 하는 "국민당" 주도의 새 중앙정부가 세워졌다.

1930.10월, 그는 유수한 권문세도가이며, 친(親)서방 세력인 "쑹가(宋家ㆍ쑹자수(宋嘉樹)ㆍ중국 4대재벌 가운데 하나인 철강재벌ㆍ개신교 목사ㆍ쑨원 친구ㆍ쑨원 후처 장인(쑹가 2째 딸)"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리스도 교도"가 되었다. "쑹가"의 3째 딸인 메이링(美齡ㆍ송미령(1897~2003))은 그의 2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국민정부의 주석"으로서, 사회개혁 정책을 굳건하게 지지했으나, 그 정책의 대부분은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가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각 지방의 군벌들을 진압했다기보다는 중립화시킨 것뿐이었고, 군벌들은 여전히 그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농촌의 요새로 퇴각하여, 그들 나름의 정부와 군대를 조직한 공산당원들도 또 다른 위협이었다. 게다가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중국 본토를 침략할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일본과 전쟁을 치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공산당을 섬멸하기 전까지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많은 항의를 받았는데, 특히 공산당에 대한 완전 섬멸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아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국민들에게 더욱 굳건한 도덕적 일체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그는 "유교의 국가숭배의식"을 부활시켰고, 1934년에는 유교적 도덕을 주입시키기 위하여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시안(西安) 사건"으로 인하여 "공산당 섬멸작전"을 중단하고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 침략군"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그 후 4년 동안, 연합군이 가세하기 전까지 중국은 단독으로 "일본"과 교전했고, "소련"을 뺀 연합국들은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중국은 4강대국의 하나로, 승전국이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내부적으로 부패의 징조를 보였다.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고, 이어 1946년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되자,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1949년, "장제스"는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게 되었고,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는 "국민당" 잔여부대를 이끌고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국민당" 지도자들과 함께 비교적 온건한 "독재정부"를 수립했고, "타이완 해협"을 건너 "공산당"을 산발적으로 공격했다.

시련을 겪은 그는 한때 부패했던 "국민당" 조직을 개편했다. 지방군벌들을 서로 경쟁시키고, "국민당" 내의 정적들끼리 서로 싸우게 했다. "미국"과의 외교에서 수완을 발휘해, "미국"으로부터 군사적ㆍ외교적ㆍ재정적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중국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유지했다.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그 후 20년 동안 "타이완"의 경제발전을 실현하는데 성공했다.

1955년 "미국"은 "국민 정부"와 "타이완 방위"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1972년 초, "미국ㆍ중국" 사이에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면서, 이 협정의 효력과 그의 정부의 미래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1979년, "미국"은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과 전면적인 국교를 수립하기 위하여,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그는 그때까지 생존하지 못했다. 1975년, 그가 죽자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국민당 주석ㆍ타이완 정부 수반"으로 그 뒤를 이었다.

3.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배한 이유

①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은

자신의 정부 내에 부패가 만연되도록 방관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외부사정의 변화에 신축성 있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의 지도력은 점점 더 경직되었고, 민심의 움직임과 새로운 사고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재능보다 충성심을 더 높이 사게 되었고, 조직보다는 개인적인 유대관계에 의존했다. 심복들만을 중용하는 경향은 "군(軍) 인사"에도 나타나 많은 재능 있는 장교들을 제치고 편협한 "보수주의적 장교들"이 중용되었다.

② 또 다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그가 세운 전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에 저항하는 데 있어서, "미국제 장비"를 갖춘 자신의 군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서, 대신 결국에는 "미국이 일본을 패배시키리라"고 기대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끝난 뒤, "공산당"과의 내전에 대비하여, 자신의 군대를 아껴두었다가 "공산당을 일거에 격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실제 "내전 단계"에 들어가자, 이 같은 전략은 역효과를 냈다. 그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수동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지도자의 위신과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린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일본"에 대항하여 맹렬히 싸움으로써, 국민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군대는 "중국 남서부" 지역에서 빈둥거리면서 놀았기 때문에, 사기ㆍ전투력이 떨어진 반면, "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민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나가는 동안, 대규모의 정예군대가 되었다.

또한, 그는 중국사회를 20C로 진입시키기 위해, 필요한 폭넓은 사회ㆍ경제 개혁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보다 높은 안목과 일관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 대륙"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7년, "국민당"에서 공산당원들을 몰아내고, 그 후 지주ㆍ상인 계급과 밀착관계를 유지해왔으므로, 학대받고 궁핍한 일반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는 보수적 노선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농민들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나라였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입증된 바와 같이, "중국 농민들"이 "공산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현대 중국의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4. 1936.12.12.~ 25 : 시안 사건 (西安事件ㆍHsian)

"장제스(중국 국민정부 대원수)가 자신의 부하 "장쉐량(張學良)"에 의해, "시안"에서 연금된 사건. "장쉐량"은 "시안(중국 북서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東北軍ㆍ만주군)"의 지휘관이었다. "장쉐량"은 "장제스"가 중국 북부를 침략한 "일본군"에 대항해 "항일전"을 전력으로 수행하지 않고 "반공(反共) 내전"을 지속할 방침을 세우자, 이에 반대하여 "장제스"를 연금했다.

"장제스"가 석방되고,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지면서 이 사건은 끝났다. 1936.12.12일, "장제스"는 새로운 "반공 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장쉐량"의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장쉐량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는 자신들의 고향 "만주 땅"을 수복하려는 일념에서, "장쉐량 부대"는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정지ㆍ항일을 위한 거국적인 통일전선 수립ㆍ국민정부의 개각"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장쉐량 부대"의 요구조건에 전적으로 동조했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대표로 협상과정에 참여했다. 1936.12.25일, "장제스"는 이 제안에 대해, 구두로 승낙 후, 석방되었다. "장제스"는 "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하기는 했지만, "장쉐량"을 체포하여, 항일전 기간 내내 연금 상태에 두었다. "장쉐량"은 1949년 "타이완"으로 끌려간 뒤에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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