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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원세개 (袁世凱)ㆍ위안스카이ㆍ1859~1916 (57세)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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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ㆍ위안스카이 (袁世凱ㆍ1859~1916ㆍ57세)"는 배신의 귀재로, "청 말기"에서 "신해혁명(1911년)" 직후까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청나라 말기"에서 "신해혁명" 직후까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쑨원"과의 대타협으로 "선통제(宣統帝)"를 제위에서 끌어내려, "중국 2,000천 년 제국"에 종지부를 찍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중국인의 이름은 중국 역사에서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는 "신해혁명(1911년)"을 기준으로 그 전의 인물은 "원세개(우리식 한자음)"로, 그 이후는 "위안스카이(중국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1. 원세개 (袁世凱)위안스카이1859~1916향년 57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ㆍ중화제국 제1대 황제ㆍ북양군(청나라 정규군)창설ㆍ군인ㆍ정치가ㆍ중화민국 제2대 대총통(1대- 쑨원ㆍ3대- 리위안훙(려원홍ㆍ1~2대 부총통)

• 출 생 : 청나라 허난성          • 사 망 : 중화민국 허베이성 베이징          • 사 인 : 병사 (요독증신장의 기능 부전)          • : 용암 (容庵)          • 별 칭 : - 위정(慰庭)          • : 본부인 우씨 (于氏)          •  자 녀 : 32남매 (17남 15녀)

• 첩 실 : 9명- 심씨ㆍ양씨ㆍ섭씨ㆍ장씨ㆍ곽씨ㆍ유씨  /  조선인(3명)- 김씨(안동 김씨 조선 왕족)ㆍ이씨(안동 김씨의 여종)ㆍ오씨(안동 김씨의 여종)

• 정 당 : 공화당 → 북양군벌          • 경 력 : 청나라 육군ㆍ청나라 북양군ㆍ중화민국 육군          • 계 급 : 중화민국 육군 원수중화민국 대총통

"조선"과도 관계가 깊어, "임오군란(1882년)"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광서제"를 대신함으로 내정 간섭을 수행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후, 1885.08월 다시 "조선"으로 온 그는 사실상 현대적인 의미로 "식민지 총독"과 비슷한 "감국대신(監國大臣)" 역할을 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도망치듯 귀국한 이후, "청 군대"의 신식군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무술변법"을 계기로, "청나라"의 실권을 차지하였다.

1912.01.01일, "중화민국" 성립 후, 4월 "쑨원(임시 대총통)으로부터 실권을 위임받았고, 이듬해 1913.04.01일, "쑨원"과의 약정에 따라, "대총통" 직을 넘겨받아, "임시 대총통"에 올랐다. 하지만 제위의 욕망이 있던 그는, 만년에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하여, "중화제국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일으켜, "칭제"를 감행하였으나, 중국 전체에서 "토원(討袁)"의 깃발이 세워지자, 이내 "제위"를 포기한다. 이후 얼마 안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제제운동"은 지방 군벌의 세력이 중앙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군벌 세력"으로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필"에 재능이 없어, 과거를 포기하고, 일찍이 군문에 들어간 그였으나, "무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리더십ㆍ결단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에 진출한 "청군" 병졸들의 기율이 느슨해져 민가를 약탈하는 등 문제를 야기하자, 그가 "오장경"에게 실태를 보고해, "군율 확립의 권한"을 위임받고서는 민가 출입이나 대열 이탈 등의 위반 행위를 저지른 병졸 여러 명을 참수하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군 간부들도 본국에 귀환시킴으로써 장졸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2. 배신의 귀재

1898 : "서태후" 편을 들면서, "황제 광서제 (청11대)"를 배신 → 1912 : "쑨원"과 합세하여, "청나라"를 버리고, "중화민국 대총통(2)"가 됨 → 1915 : "중화민국"까지 배신 "중화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됨.

청나라 산동순무 (00.02~01.09) → 청나라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01.11~07.09) → 청나라 외무부상서 (07.09~ 08.) → 청나라 호광총독 (11.10~ 11.10) → 청나라 제2대 내각총리대신 (11.11~12.03) → 중화민국 제2대 임시대총통 (12.02~13.10) → 중화민국 제1대 대총통 (16.03~16.06) → 중화제국 황제 (15.12~16.03): 전임자 - 선통제 (청 황제)

2번의 "향시 실패"로 "문과"를 포기한 후,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1881년(22세) 양부(養父) 원보경(袁保慶)의 추천으로 청나라의 거물 정치가 "이홍장(李鴻章)"의 참모인 "우창칭 (오장경 (吳長慶))"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21세ㆍ무혈정변):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이에 "조선"이 친청 세력인 "명성황후"의 주도하에 "청나라"에 구원 요청하였고, 젊은 "위안스카이"는 "우창칭"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 "이홍장"의 천거로 "한성 방위 책임자"로 머물렀고, 그는 "청"을 대표하는 "외교수장"은 아니었으며, 떠나기 전까지도 수장이 아닌 외교를 담당하던 "북양대신의 파견원"의 신분이었음.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도주하여 귀국, 이후 "청나라 군대"의 신식 군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무술변법"을 계기로 "청나라"의 실권을 차지하였다. 1912.01.01일, "중화민국" 성립 후, 4월 "쑨원 임시 대총통"으로부터 실권을 위임받았다. 1913.04.01일, "쑨원"과의 약정에 따라, "대총통 직"을 넘겨받아, "임시 대총통"에 올랐다. 하지만 제위의 욕망이 있던 그는, 만년에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하여, "중화제국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일으켜 "칭제"를 감행하였으나, 중국 전체에서 "토원(討袁)"의 깃발이 세워지자, 이내 "제위"를 포기한다. 이 "제제 운동"은 "지방 군벌 세력"이 중앙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군벌 세력으로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얼마 안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북양군(청나라 정규군)"ㆍ창설 "군벌 시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

"군벌 시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서 "군벌"로 잘 알려져 있는데, 후일 "북양군벌"이 되는 "북양군"을 창설했으나, 실제로는 "군벌"이 아니다. 그가 창설한 "북양군"은 "청나라의 정규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군을 강하게 사병 화하고, 군대 내에 심복을 두는데,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그들 심복들이 본격적인 "군벌"이 된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그 행정적인 공백을 각 지방군이 "군정"을 통해서 통치권을 행사함으로, "군벌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16~1928) 군벌들이 벌인 "내전"은 그의 사후인 1916년 이후 시작되었고, 1920년대에 들어서면 본격화 되며, 1928년까지 계속된다.

※ 이홍장 ( 1823~1901ㆍ78세)

후에 권력은 "원세개 (위안 스카이ㆍ1859~1916ㆍ56세)"가 세습ㆍ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주도ㆍ여러 한족계 민병단(회군)을 이끌고 있던 중, "태평천국의 난"에 스승인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ㆍ조정에 등용 → 증국번 사후, 청나라의 한족계 대신이 되어,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른다 →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유일의 실력자 위치 → "북양대신"이 되면서 그의 군은 "북양군"이라 불리게 된다.

3. 처ㆍ자녀 관계 : 그는 총 1명의 정실부인ㆍ9명의 첩실을 두었다.

"조선"에서 조정 위에 군림한 "원세개"는 "조선"에 머무는 10여 년 동안, 3명의 "조선" 여인을 취해, 7남 8녀를 둘 정도로 "군주"에 못지않은 향락을 누렸고, 이 같은 그의 "황금기"는 "청일 전쟁"에서 패해, "청국"으로 쫓겨 간 1894년에야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 처 : 본부인 우씨 (于氏)         첩 실 : 9- 조선인(3)  /  1: 심 씨 (沈氏) 6: 섭 진 (葉蓁남경인)  /  2: 이 씨 (李氏조선인3첩 김씨의 여종) 7: 장 씨 (張氏하남인)  /  3: 김 씨 (金氏조선인안동 김씨양반) 8: 곽보선(郭寶仙만주인)  /  4: 민 씨 (閔氏조선인3첩 김씨의 여종) 9: 유씨 (劉氏)  /  5: 양 씨 (楊氏)

이 중 3명이 그가 1882년 23살 때,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왔다가 맞아들인 여인들이다. 1번째 첩실로 맞아들인 조선 여인은 "안동 김씨"로 알려졌다. 일설에는 "대한제국 조선 왕족" 출신으로, "대한제국 고종 임금"이 그에게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1889년 "위안스카이"의 2째 아들인 "원극문(袁克文, 1889~ 1931)" 낳은 후, 총애를 받았다. "원극문"의 경우,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 이후, "후계자"로써도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후 "안동 김씨"의 두 조선인 몸종인 "이씨ㆍ오씨"도 "첩"으로 맞아들였다. 이들 "조선인 첩"이 낳은 "위안스카이"의 자녀는 총 15명(7남 8녀)를 얻었으며, 그의 자녀 17남 15녀(32남매) 중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4. 등장과정

① 1898년, "광서제"가 "서태후"에게서 벗어나고자, "변법자강운동(189년ㆍ무술변법ㆍ100일 변법)" 실시

강유위(캉유웨이)가 광서제에게 제안 : "양무운동"으로 아무리 신식군대를 키워도, "수구세력ㆍ서태후" 때문에 안 되니, 서양의 법제도를 받아 들여, 정치전반ㆍ법제도까지 싹 다 갈아엎어야 한다.  → "서태후 세력(수구정치인)"을 제거  → "광서제ㆍ강유위"는 "원세개(당시 청 군대를 거의 통솔)"에게 협조 요청  → "서태후"와 소통하고 있던 "원세개"는 군대를 일으켜, "자금성" 공격하여, "광서제" 세력들을 체포  → "서태후"가 재집권  → "부준(1885~1942ㆍ13세ㆍ광서제 6촌 형의 아들)"을 황제로 앉히려고 하자, 열강들이 "광서제"를 복귀시키라고 요구

② 의화단 등장ㆍ신축조약ㆍ신정운동

"의화단" 출몰 → 무작정 보이는 서양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파괴하면서, "베이징"으로 진격ㆍ의화단(義和團) : 농민이 주체인 반청세력(반청복명)의 한족 민족주의 비밀결사 조직ㆍ청나라의 전복 + 외세 배척 목표로 무장 봉기→ 부청멸양(청나라를 도와, 서양 것들을 멸하자)  손오공ㆍ저팔계 따위를 신으로 숭배하면서, 칼에도 피나 부상을 입지 않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열강들은 자국 국민의 안위가 걱정 → 청나라에게 진압 요구 → "서태후"는 "의화단"을 그냥 두는 게 낫다고 판단

1900.06.16일, "서태후"는 "의화단"을 믿고, 열강에 선전포고 (청나라 육군 + 의화단원) → 08월, 34,000명의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입 →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도망 → 신축조약 (신축조약 : 4억5000만 냥 배상ㆍ의화단 주동자 처형ㆍ외국군의 베이징 주둔ㆍ베이징 주변 청군 철폐)ㆍ1901년, 신정(新政)운동 : "서태후" 주도의 정치 개혁운동ㆍ1906년 예비입헌을 통해 정치개혁 실시

③ 신해혁명 (쑨원, 위안스카이)ㆍ칭따오 일본 점령

1905년,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결성ㆍ삼민주의 제창ㆍ반청(反淸) 무장투쟁 전개

※ 쑨 원 (손문(孫文)ㆍ중산ㆍSun Wenㆍ1866~1925ㆍ59세): 삼민주의ㆍ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ㆍ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립자ㆍ중국 외과 의사ㆍ정치가ㆍ중화민국 : 국부로 추앙 (1911~12: 중화민국 초대 임시총통, 1923~25년 : 중국 실질적인 통치자) /  중화인민공화국 : "마오쩌둥" 보다 유명한 혁명 선구자로서 존경

청나라가 철도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쓰촨봉기"로 발전 → 10.10일,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1달 만에 14 성(省)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고, 12월 말에는 17개 성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

1912.0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 "선통제(푸이ㆍ청12대ㆍ1908~1912 재위ㆍ1906~1967ㆍ61세)"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

< 1911년 신해혁명 >

"쑨원(45세)" 세력은 군사력이 딸리자, "위안스카이(52세)" 힘을 빌려, "청"을 몰락시킴 → 1913.07월, "쑨원"은 일본으로 도망 → "위안스카이" 독재 시작 → 초급 총통제(중화민국의 총통을 황제 급으로 격상하는 법) 통과

1914년 당시, "1차 대전" 중으로, "칭따오"는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상황 → 일본은 "영일동맹"의 일원으로, "영국"의 적인 "독일"을 자신들이 공격할 것이라고 하였다  : 당시 일본은 "독일"이 점령한 "칭따오" 뿐 아니라, 중국 대륙 전체를 만주를 시작으로 먹고 있던 중이었다 → 일본은 "칭따오"를 쳐들어간다고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에게 통보.  안 들어 주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고, "청일전쟁"도 졌는데, 해볼 것이냐고 협박.  당시 중국은 일본과 싸움 힘이 없었음 (칭따오 헌납 + 만주까지 약속)  →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칭따오"가 일본 영토가 됨 (열강들은 1차 대전 중이라 정신없었음)

④ 한족 민심이탈ㆍ공산주의 여건 형성

"위안스카이"는 한족의 민심을 상실 → 1915.12.12일, "중화민국"을 접고, "중화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됨 → 13일 뒤, 전국적으로 "반란" 발생 → "반란"을 막아달라고, "일본"에게 요청 → 일본 거부 → 6개월 뒤, 1916.06.06일 "화병"으로 사망 → "대총통" 자리를 두고, 수많은 군벌(직예군벌ㆍ안휘군벌ㆍ봉천군벌 등)이 싸움 → "공산주의" 여건 형성

⑤ 1917.10월, "소련"에서 "볼셰비키 러시아 혁명" 발생

"이대쇠(리다자오ㆍ1888~1927ㆍ베이징대 도서관장)"가 당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책을 공부하고, 많은 공산주의 관련 책을 구매하여,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에 구비 → "모택동(마오쩌둥ㆍ1893~1976)"이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로 취업.

5. 감국대신 (식민지 총독) : 조선의 마지막 "자주개혁 기회"를 앗아간 사나이

19C 후반, 악랄한 국권 침탈과 가혹한 경제 수탈로 조선 왕조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외세의 선봉이라고 하면,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외세에 예속되는 길을 걷게 만든 결정적 인물로 청조 말기의 풍운아 "원세개(袁世凱ㆍ위안스카이)"를 꼽는다.

"임오군란(1882)~ 청일전쟁(1894)"의 시기는 그야말로 날로 격화되는 "세계적 제국주의" 상황에서 "조선"에는 짧지만, "자주 개혁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이었는데, 이 황금 같은 시기가 "원세개"의 기막힌 간섭과 책동으로 유실되고 말았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국"은 조선 정세에 개입하기로 하고, "수사제독(水師提督) 오장경"이 이끄는 3,000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원세개"는 "오장경"의 막하로 조선 땅에 들어왔다.  이때 나이 23세에 불과했으나, "대원군(민비의 정적)"을 "청"으로 납치해 연금하고, 반군을 진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을 보호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조선"은 물론 "청"의 정치 무대에서도 뚜렷이 존재감을 부각했다. "대원군ㆍ고종ㆍ민비ㆍ일본과 청국의 군대" 등 모두가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임오군란" 와중에 "대원군"을 제압하는 것만이 "청"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길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를 납치해 "청국"으로 압송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조선 군사들을 제압한 것도 그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그는 "조선 신식군대"의 창설을 주도해 1883.01월, 2,000여 병사의 "총수"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갑신정변"에서는 더욱 결정적 역할을 맡는다.

1884년,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개화파"들이 거사해, 중신들을 살해하고 "신정부"를 수립하자 그는 직속상관인 "오장경"은 물론 "청국"의 실력자인 "이홍장"까지도 건너뛰어, 독자적 판단으로 "개화파"와 이를 지원하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삼일천하"에 종지부를 찍었다.

1884.11월, 일시 귀국했다가 1885.08월 다시 "조선"으로 온 그는 사실상 현대적인 의미로 "식민지 총독"과 비슷한 "감국대신(監國大臣)" 역할을 하게 된다.  "청과 조선"은 명목상 "종주국과 번국"의 관계였지만, 양국의 역사에서 "청"의 관리가 조선에 주재하며, 온갖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는 "총독" 행세를 한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조선"의 내정ㆍ외교를 감시하는 것은 물론 "조선 해관(海關ㆍ현대의 세관과 유사)"을 "중국 해관"에 통합ㆍ종속시켰고, "조선의 차관 문제"도 낱낱이 간섭해, "청국"으로부터만 차관을 얻도록 했으며 "전신ㆍ통신 분야"의 시설도 "청국"이 선점 및 독점토록 하는 것과 함께, "청국 선박"에 조선의 연해와 주요 강에 대한 "독점적 운항권"을 부여하는 등 경제적 침탈에도 열을 올렸다.

"원세개"의 비호를 받은 "청국 상인들"은 버젓이 밀무역을 일삼았고, 이를 단속하는 "조선 관청"을 습격하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원세개의 활약"으로 "조선 경제"에서 "청"이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더 일찍 조선에 진출한 "일본"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사유가 됐다

6. 연 보

1882(21):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이에 "조선"이 친청 세력인 "명성황후"의 주도하에 "청나라"구원 요청함. 젊은 "위안스카이""우창칭"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 "이홍" 천거로 "한성 방위 책임자"로 머물었음. 그는 ""을 대표하는 "외교수장"아니었으며, 떠나기 전까지도 수장이 아닌 외교를 담당하던 "북양대신의 파견원" 신분이었음 "그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을 것이며, 고종을 "혼군()"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20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 미국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불렀다

1894(33): "청일전쟁" 발발발발 수 일 전, 신변의 안전을 위해, 본국으로 도주→ 1895(34): "톈진(天津)"에 주둔하던 "정무군(定武軍)"에 파견"정무군""신건육군(新建陸軍)"으로 바꾸고, 신식 군대화 된 무기로 훈련을 하였으며 많은 심복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많은 수가 후일 "북양군벌의 군벌들"로서, 또는 초기 "중화민국 정계군계" 인물로 활약

1898(37): "무술변법"에서 "개혁파 동지들"을 배신, "서태후"의 신임을 얻음 → 1899(38): "공부 우시랑(工部 右侍郞) 산동 순무(山東 巡撫) 서리"로 승진 →  신형 무기훈련으로 무장한 "무위(武衛軍)"을 동원하여,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였고, 이 일은 그가 능력 있는 "장군"으로 인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1(40): "직례 총독(直隷 總督)겸 북양대신(北洋大臣)"에 임명 → 1902(41): "허베이성 바오딩(保定)"에서 "북양상비군(북양군)" 편성 → 1905(44): "북양군""북양육진(北洋六鎭)"으로 확대 편성 그 중 하나는 "만주족" 귀족인 "철량(鐵良)"부대였지만, 다른 "5"은 그의 통제 하에 있었다. → 1906(46): 모든 "군무"에서 사임하도록 종용을 받음. "북양군"에 대한 "병권""육군부"로 넘겨주었다. → 1907(47): "북경"에서 근무하면서, "군기대신(軍機大臣)외무부 상서(尙書: 외무부 장관)"를 겸직 → 1909(49): "만주족 섭정왕(攝政王) 재풍(載沣)"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일시 귀향.

1911(51): "무창"에서 봉기 발생"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 "진압군"으로서 "호북"의 육군해군의 군권 장악"내각총리 대신"에 임명됨. 그러나 "북양군"을 이끌고, "한커우(漢口)"점령이어 "베이징"으로 진격, "청나라의 군권"을 장악"쑨원(孫文)"과 막후 협약. "쑨원의 혁명당""황제 퇴위공화정 체제"를 요구"위안스카이""새로운 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된다."는 조건을 내 놓음"위안스카이""명당"의 이름을 빌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킴.

1913(53):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중국 국민당국회 해산 1914(54): "임시약법(臨時約法)" 폐기국무원 해산"북양군 단기서" 등의 군권 박탈 "임시약법"의 폐지로, "봉건 독재적 대총통 권력"을 가지게 됨.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한 "일본" "중국 산둥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  그리고 1915.01, "만주산둥반도" 등에 대한 "일본"이권을 반 영구화하고, "남만주내몽골 일부""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일본"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21개조 요구조건""위안스카이 정부"에 제시

1915.05.07, "일본""위안스카이 정부"에 최후통첩을 발하였으며, "위안스카이 정부" 05.09일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21개조 요구 "21개조"에 대한 처리는 "중국 민중""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

1915(55): "참정원"을 조정하여, "중화제국 대 황제""칭제(홍헌제(洪憲帝))" "중화민국 연호"를 폐지하고, "중화제국"으로 바꿈. 이에 "윈난구이저우광시광둥저장산시(陝西)후난쓰촨" 등의 "지방군" 봉기하고, 중국 일반 시민은 물론,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북양군"의 일부 계파를 포함한 내외적인 반격반발을 받음.

1916(56): 03.22, "군주제"를 취소하고, "중화민국"의 연호를 회복. 추가적인 유화책으로, "북양군 단기서"를 다시 기용하고, "위안스카이" 본인은 다시 "중화민국 대총통" 위치로 돌아가기를 희망.  그러나 "봉기"가 일어난 각 "지방 성""군벌민중"은 그를 성토하며, "지방 성""군벌들" 관계단절이나, 독립을 선포

1916(56): 05"요독증(尿毒症uremia)" 발병, 06.06일 사망. (신장에서 질소 화합물이 소변을 통해 배출되지 못함으로써 이 물질의 혈중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서 생기는 독성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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