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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칭기즈칸 (테무진) ① 1162ㆍ몽골ㆍ원 / 누르하치 (1559ㆍ청)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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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성길사한 (成吉思汗)ㆍ1162(55ㆍ67?)~1227ㆍ65세(72ㆍ60?))"은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점유한 몽골 제국의 창업자이자 초대 칸이며, 원(元) 태조(太祖)로 기록된다.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정복 왕 중의 한 사람이다.

 

1. 칭기즈 칸 (성길사한 (成吉思汗)1162(5567?)~1227ㆍ향년 65(7260?))

칭기즈칸은 분열된 몽고 민족을 하나로 통일했으며,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출신이 아닌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합리적 인사제도인 능력주의에 기반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사,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몽골 칭기즈 칸 국제공항"으로 남아 있다.

•  본 명 : 보르지긴 테무진 (패아지근 철목진)       •  재 위 : 1206 ~ 1227.08       •  출 생 몽골 헨티 산       •  왕 조 원나라       •  후 임 툴루이 (임시)       •  사 인 열병       •  처 보르테 (왕후)       •  가 족 예수게이호엘룬       •  묘 호 태조(太祖)       •  시 호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푸른 늑대 테무진"은 "타타르 족"의 포로가 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타타르 족"에게 살해됐고, 아내마저 붙잡혀서 "타타르 족"의 아이를 임신했다. 1206년, "몽고고원"에서 "타타르 족"을 정복하고, 초원과 사막을 지나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정복하고, 동시에 해가 지고 해가 뜨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몽고제국"을 건설했다. 

"테무진"은 "황제 중의 황제"라는 뜻으로 "징기스 칸"의 존칭을 받았다 그는 "성을 쌓는 자는 망할 것이고, 이동하는 자는 흥할 것이다"며, 중국을 정복하고 다시 서쪽으로 정복을 나섰다. 중앙아시아ㆍ인도ㆍ페르시아ㆍ러시아 유럽까지 정복하여 150년 동안 동양과 서양을 지배했다 10명ㆍ100명ㆍ1,000명ㆍ10,000명 단위로 군대를 편제하여 빠른 기동력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항복하면 용서하고, 저항하면 무참하게 파괴하고 살육했다. 유럽인들은 "지옥"이란 뜻으로 "타르타투스"라고 불렀다

그는 1227년 "탕구트 원정"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군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절대로 울거나, 한탄하지 말라. 그리고 약속한 날에 탕구트의 왕과 백성들이 성을 떠났을 때, 그들을 전멸시켜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과 함께 생활하던 "매"를 오해하여 칼로 죽였다. 금으로 "매의 동상"을 만들어, 한쪽 날개에는 "분개하여 판단하면, 반드시 패하리라."고 새기고, 다른 쪽 날개에는 "좀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벗은 벗이다"라고 새겼다.

 요약 

"손자 쿠빌라이" ""을 세운 후, "원의 태조"로 추증"몽골 제국"의 창시자 (재위 1206~1227)"바이칼 호" 근처 출생태어난 연도에 대해서는 115511621167년 등의 이설이 있다 "칭기즈"란 고대 터키어인 "텡기스(바다)"의 방언이었다고도 하고, 1206년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瑞鳥) "칭기즈, 칭기즈"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샤머니즘의 "광명의 (Hajir Chin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어 부족이 흩어졌기 때문에, 빈곤 속에서 성장하였고,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 "완칸"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 1189년경 "몽골씨족연합" 맹주(盟主)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1201 "자다란 부족" "자무카"를 격파하고, "타타르케레이트"를 토벌하여, "동부 몽골"을 평정하였으며(1203), 군제(軍制)를 개혁한 후, 서방의 "알타이" 방면을 근거지로 하는 "나이만" 부족을 격멸하고(1204), "몽골초원"을 통일하였다. 1206 "오논 강변" 평원에서 집회를 열고, 몽골제국의 ""에 오르면서, 씨족적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千戶)"라고 하는 유목민 집단을 95개 편성하였다.

"천호" 및 그 하부조직인 "백호"는 동시에 행정단위이며, "천호장백호장"에는 공신들을 임명하여, 이들을 "좌익(左翼),중군(中軍),우익(右翼)" "만호장" 지휘 하에 두었다  "케시크테이"라고 하는 친위대를 설립하고, "천호장백호장"의 자제로 편성하여 특권을 부여,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부대를 구성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서하(西夏)"를 점령하고, "()나라"에 침입하여, 그 수도인 "중도(中都: 지금의 베이징)"에 입성하였다(1215). 한편 앞서 멸망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 "서요(西遼)"로 망명하여 그 나라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부장 "제베"를 파견하여 토벌한 후에 병합하였다(1218). 또 서아시아 이슬람세계의 패자(覇者) "호레즘 국"과 교역하려고 파견한 사절단이 살해되자, 이것을 계기로 "서정(西征)"에 올랐다(1219).

"오트랄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別軍)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 "카스피 해상"의 작은 섬으로 내몰아 굶어죽게 하였고(1220), 다시 "카프카스 산맥" 넘어 "남 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와 장인(匠人)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 정복한 땅은 아들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汗國)"을 이룩하게 하였으나, "몽골 본토"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주기로 하였다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征)"참가를 거부한 "서하"를 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寧夏)"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淸水縣) 시장강(西江)"강변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다 특히, "위구르 문화"를 사랑하여,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 "타타동가"에게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그것을 "국자(國字)"로 채용하였다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 문자" "만주 문자"가 만들어졌다  "()나라" 유신(遺臣) "야율초재(耶律楚材)" "위구르" "진해(鎭海)"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 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다.

 칭기즈칸 명언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지도자로서의 장점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

• 철저한 능력위주의 군 인사행정       • 이민족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인재흡수       • 승마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       • 상인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       •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에 대한 존중       •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가 다종교사회인 경우, 특정 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조성

칭기즈칸은 주변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칭기스칸의 손자인 "모토칸(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칭기스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생 애

칭기즈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1155년, 1161년, 1162년, 1167년 등 몇 가지 설이 존재하나,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아직 없다.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11.14일이다.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칭기즈칸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직후에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한 움큼"을 쥐고 있는 등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표들이 나타났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 군주, "테무 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칭기즈칸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유목민 사회에서 쇠가 중요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의 유년 시절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 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 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 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토그릴 완 칸과 협상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 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 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 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 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 비사ㆍ원조 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2. 누르하치 (노아합적 (奴兒哈赤)1559~1626ㆍ67묘호: 태조 (太祖))

"청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청 태조(재위 1616~1626)만주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建州女眞)" 추장 "후금(後金)"의 태조, 시호 처음에는 "무황제(武皇帝)", 나중에는 "고황제(高皇帝)" 그가 확립한 "청조(淸朝)"의 기초 위에 그의 아들들이 그 대업을 완수하였다.

"만주""푸순(撫順)동쪽 훈허강(渾河) 싱징(興京)분지"의 한곳에 위치한 "건주여진(建州女眞)"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1583년 처음으로 독립을 위한 군사를 일으켜, 수 년 사이에 "건주여진" 일하고, 1587"쑤쯔허(蘇子河)"상류에 최초의 성()"싱징라오청(興京老城)"을 구축하였다""에 대해서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여, 1589""으로부터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되었으며, 1595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1599년에 "해서여진(海西女眞)""하다(哈達)"를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을 병합하여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1616"()"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그동안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였으며, 도성을 "혁도아랍(赫圖阿拉)"으로 옮겼다. "후금(後金)"의 성립은 ""에 커다란 위협이 되어, 마침내 ""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1618년에 """푸순(撫順)" 급습하여 취하고, 이어 "칭허(淸河)"를 공략하여 빼앗았다.

1619년에는 ""과 일대 결전을 각오하여 진격, "푸순(撫順)" 관외의 "사르프 전투"에서 명군 10만을 격멸하여 대승하였고, 1621년에는 "랴오둥(遠東)"을 공략하여 "랴오허강(遼河)" 이동지역을 지배하였으며, "랴오양(遼陽)"에 천도하였다가, 1625년에 다시 "선양(瀋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1626년에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였으나, 명장 "원숭환(袁崇煥)"의 고수로 실패, 부상만 입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1626.04"몽고의 파림(巴林)"를 직접 공략하다가, 도중 9월에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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