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진 시황제 ② 만리장성 (萬里長城)ㆍ진 시황릉 (여산릉)

by 당대 제일 2022. 12. 5.
반응형

 

"진 시황제 (秦 始皇帝BC 259~210)"는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인 "()나라"를 건설한 전제군주"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1. 절대자 시황제 (始皇帝)

① 현실주의자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천하통일"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나 신선을 믿고 있었고, "시황제"도 믿고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황제"라는 말 그자체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그때까지 누구나 다 쓰고 있던 "짐(朕)"이라는 말을 "황제"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등 황제의 절대화를 도모했다.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

황제의 절대화는 국가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시황제"는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완수한 자신은 보통 인간이 아니며, 절대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로불사의 인간",  "신"이나 "선인"과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자임했던 "시황제"는 이제 자기 자신이 "선인(仙人)"이 되겠다, "신선(神仙)"이 되겠다고 원하게 되었다.

"신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시황제"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는데, "도사(당시는 방사(方士)라고 불렀다)"가 여러 가지로 수상한 짓을 가르쳐 주었다.  예컨대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너무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③ "인주(人主)는 미행(微行)하여, 체중(體中)의 사기(邪氣)를 피(避)하라"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사기(邪氣)"가 몸에 들어와서 "신기(神氣: 몸속에 있는 신의 기운)"에 해가 된다고 해서, "시황제"에게 당분간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말했다.  더구나 자신이 있는 곳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도록 하였는데, 우연한 계기로 거처가 알려지고 말았다.  "시황제"는 매우 노하여, 누가 알렸느냐고 조사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때 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왕은 나 혼자면 충분하지 않는가?

"사기(史記)"에는 아니지만, 다른 사료 등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에 갔을 때 역시 방사(方士)였겠지만, "이 근방에는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왕기" 즉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왕은 나 혼자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대신하는 자가 이 지방에서 나올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 지방의 "기맥"에 의한 것이므로, 기맥을 단절해야겠다고 "시황제"는 산을 파서 무너뜨렸다.  "연강굴단(連岡掘斷: 연속되어 있는 언덕을 잘라 버림)" 해 버리면 왕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장소는 "진회(秦淮)"라고 일컬어지며,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것은 인공의 하천이 아니고, 자연의 하천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생긴 것은 역시 "시황제"의 인품에 의한 것이리라.

 호구(虎丘) 산

 "소주(蘇州)"에 "호구(虎丘)"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의 무덤이 있다. "()나라" "()나라" "명검"이 많이 나왔던 곳으로, 왕이 사망하면 검을 무덤 속에 넣었다 그런 명검이 몇천 개나 있다고 들은 "시황제"가 그곳을 파헤치게 했다는 것이다.  파헤친 자리가 "검지(劍池)"라는 곳이다. 

파 보았지만, "범이 나타나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파헤치려 했던 곳에 "범"이 있어서 검으로 바위를 쳤던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설명서에 쓰여 있기도 한다.  검을 차지하려 했던 것 역시 검이 갖는 "영력"이 탐이 나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치 적

①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쓰다.

"황제(皇帝)"라는 말은 영어로 "Emperor"라고 한다. "Emperor"는 로마 제국의 황제 "Emperialt"에서 유래된 말이나, "皇帝"라는 2개의 한자로 칭호를 최초로 쓴 사람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의 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 : 중국 전국시대의 7제 후)"라 하여, 중국에는 7개의 강국이 있었고, "진(秦)"은 그중의 한나라였다. "시황제"는 나머지 6개 나라를 잇따라 멸망시켰는데, BC 221년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산동(山東)반도"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진시황"은 "태황"의 "태(泰)"를 떼어내어 "황(皇)"만을 취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이다.

※ 삼황오제 (三皇五帝)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삼황(三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복희(伏羲)씨ㆍ여와(女蝸)씨ㆍ신농(神農)씨" 등 세 사람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오제(五帝)"는 "황제ㆍ전욱ㆍ곡ㆍ요ㆍ순"이라는 5사람의 성군을 가리킨다.  따라서 "황제"라는 말에는 "진시황" 자신이 "3황 5제"의 덕을 겸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② 만리장성 (萬里長城ㆍGreat Wall of China)

"천하통일"을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부담을 주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그래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몽염 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했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그리하여 10여 년 만에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장성을 완성하였다. 공사를 위하여, 30만 명의 군사 아닌 잡역부들이 동원되어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몽염" 자신도 10여 년 동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이 대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렇게 무리한 사업이 원인이 되어 "진나라"에서는 각 지방에 반란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진승ㆍ오광의 난"도 사실은 만리장성을 쌓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③ 시황릉 (일명 여산릉ㆍ동서= 600mㆍ남북= 200mㆍH= 70m)ㆍ아방궁(동서= 690mㆍ남북= 114m)

"진시황"은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13살 즉위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묘 자리를 파고 있었다. "시황릉"은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수은"으로 "황하강ㆍ양자강" 및 "바다"를 본떠 만들고, "수은"을 계속 흐르게 하였으며,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 새긴 "해ㆍ달ㆍ별"들이 반짝이게 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보이도록 했다. 아울러 "고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또한 내부에는 "활"을 설치하여, "도굴자"가 침입할 때는 즉시 자동발사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시황"이 죽어 "시황릉"에 매장되게 되자, "후궁"들도 모조리 생매장되었으며, 매장 직후에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능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궈, 매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하도록 하였으며, 무덤위에는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또한 무덤 안에는 "진시황"을 모시는 시중과 신하 그리고 호위병과 군마 등 수만 개의 도용을 배치하였으며, 심지어 산채로 끓는 "구리물"을 뒤집어 씌워 만든 것도 있었다. "아방궁"은 "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약 11.5m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이나 높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곧바로 "남산"으로 통하는 "고가도로"를 만들었으며, "수위"를 건너 "함양"으로 연결되는 "복도"도 만들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아방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④ 불로장생의 꿈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도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갱유(坑儒) 사건"을 간추려 보면, 만년의 "시황제"는 미신을 좋아하여, 오직 자신의 "불로장생(不老長生)"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로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오래 살기 위하여, 여러 차례 해외에 사람을 보내어, 불사(不死)의 영약(靈藥)을 구해오도록 하였으나, 그런 약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일찍이 "시황제"는 "방술"을 좋아하는 "서복(徐福)"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선단(船團)"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하였으나,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불사의 영약"을 구하는 일에 골몰했던 "시황제"는 이번에는 "후생(候生)ㆍ노생(盧生)"이라는 "방사"에게 영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으나, 결국은 그들로부터 우롱만 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방사"라도 효험이 없으면,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는 것이 "시황제"의 성품이었다. 후환을 두려워한 "후생ㆍ노생"도 결국은 도망치고 말았다. 이들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에 "후생ㆍ노생"이 도망하면서, 황제인 자기를 비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자기를 비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함양"의 학자들을 철저히 조사토록 하였다. 조사 결과, 자기를 비방한 자는 주로 "유생들"이고, 그들이 비방한 내용은 "시황제는 유생을 우습게 알고 법에만 의존하고 있다. 권세욕의 권화(權化), 잔학한 폭군"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비방에 관련된 "유생 460명"을 체포하여,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였다. 이것이 "시황제 35년(BC 212)"의 일로 역사상 유명한 "분서갱유 사건"이다.

⑤ 분서갱유(焚書坑儒)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 민간의 서적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 천하통일이 이룩된 후 "진시황"의 통치기간 중, "이사"는 "승상"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이사"는 "황제"가 천하를 몸소 다스리는, 36개의 군으로 나라를 구분하고, 그 밑에 현을 두어 조직적으로 일사분한하게 통치하는 제도를 추천했다.

그러나 "이사"는 학자들이 사사로이 학문을 전수하며, 법을 비난하고, 자기가 배운 것만을 기준으로 시비를 따진다고 모함하여, 또한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퍼뜨린다고 하여 학자들을 난관에 빠뜨렸다. 결국 "사관"이 갖고 있는 자료 중,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개인이 보관중인 "시경"과 "서경" 그리고 "제자백가의 책"은 모조리 몰수되어 불태워졌고, 옛것을 언급해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폭군"으로 평가 절하되기도 한다.

⑥ 치도 (馳道)의 건설

"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 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⑦ 동문 (同文)ㆍ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 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부른다. 이 "육국문자"는 "분서(焚書: 죽간(竹簡)등의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소멸되었다. "진시황"의 사후에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으로 들어왔을 때, 문서들을 버렸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가끔 지하에서 특히 사막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 이 "육국문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인장"이 돌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그 당시는 모두 "금속"을 썼다. 훌륭한 사람은 "금", 다음 사람은 "은"이나 "구리"를 썼고, 이것을 끈으로 매서 목에 걸었다.

전시에는 이것이 "인식표(認識票)" 역할을 했다. 전사한 유체(遺體)를 판별할 수 없을 때에는 목에 걸었거나, 혹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금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⑧ 동궤 (同軌)ㆍ차륜 (車輪)폭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 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

⑨ 도량형 (度量衡)의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ㆍ한 되(升)ㆍ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ㆍ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고,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 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