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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사건- 1966- 1976 : 문화 대혁명 ③ 관련 인물ㆍ 4인방ㆍ장칭 (강청)

by 당대 제일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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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주은래ㆍ周恩來ㆍ1898~1976ㆍ78세) "는 혁명가ㆍ제1대 총리로, 그는 권력에 욕심을 내지 않고, 국가를 사랑한 정치가로서, 지금까지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여성 편력도 깨끗하였다.  평생 아무것도 갖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식도 없었고,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죽거든 화장해 뼈 가루를 조국산천에 뿌려달라"고 유언하여, 유언대로 비행기로 중국 산천에 뼈 가루가 뿌려졌으며,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다.

 

1. 관련 인물

① 마오쩌둥 (모택동ㆍ毛澤東ㆍ1893~1976ㆍ83세)  군인초대 중앙위원회 주석

"마오쩌둥 주의"를 창시한 사상가ㆍ시인ㆍ서예가1931년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맡아 왔으며, 1949~ 195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을 지냈으며, "국가주석" 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중국 공산당 주석"에 전임하며, 사망할 때까지 실권을 행사했다.

초기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 이후로 "장제스"와 당시 "중화민국 정부"에 대항한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49년, "중국 공산당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겸직과 1949~ 1950년까지, "중국 공산당 국가수반 권한대행"과 1950~ 1959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국가원수"를 거쳐, 1945~ 19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초대 "중국 공산당 국가원수" 재직 중, "제2차 5개년 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1958년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1959년, "중국 공산당 국가원수"에서 물러난 뒤에는 후임 "중국 공산당 제2대 국가원수" 직위에 오른 "류사오치"와 갈등하다가, "부총리 린뱌오" 등을 사주하여, 1969년 "류샤오치"를 실각시키고 그 후 1975~ 1976년 사망 직전까지, "중국 공산당 국가주석 권한대행"을 지내는 등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오쩌둥"이 중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장제스"를 격파하고, 중국 대륙에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혁명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지만, "대약진 운동" 실패와 "문화 대혁명"으로 약 2,50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대약진 운동ㆍ문화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급진적인 정책이 중국의 문화ㆍ사회ㆍ경제ㆍ외교관계에 입힌 물적ㆍ인적ㆍ문화적 피해는 수치로 계산이 힘들 정도다.

② 덩샤오핑 (등소평ㆍ鄧小平ㆍ1904~1997ㆍ93세)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 주관

공산당의 소위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ㆍ"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한 사상가1968, "문화 대혁명",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았으나,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1978~ 1983년까지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 198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ㆍ재정부장ㆍ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ㆍ중소회담 중공 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ㆍ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고, 1981~ 1983년까지는 "국가원수" 직에 있었다.

1983년 이후, "국가원수ㆍ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 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주석" 직의 교체에 관여하고,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의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다.

③ 린뱌오 (임표ㆍ林彪ㆍ1907~ 1971ㆍ66세)  홍위병 책임자 군인ㆍ팽덕회보다 9살 아래

1968~1971년까지, 부총리 겸 총리 권한대행ㆍ국방부 부장과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역임"임표"는 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지명한 "모택동"에 속아,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었는데, 그는 "모택동"에게 아부하기 위해, 선배 "팽덕회(1898~1974사령관)"를 매장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홍위병 난동"이 끝난 뒤, 필요 없게 된 "임표"는 "모택동"에게 버림을 받게 되자,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소련"으로 비행기로 도주 중, "내몽골"에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

④ 류사오치 (유소기ㆍ劉少奇ㆍ1898~ 1969ㆍ71세) 중국공산당 지도자

1949~1954년까지, 중국본토의 임시 부수반을, 1954~ 195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을 역임1959.04~1968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가주석"을 역임1959, "마오쩌둥""대약진 운동"의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2대 국가주석 겸 당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으나,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려던 "마오쩌둥"과 수시로 갈등한 끝에, "문화대혁명"으로 1968년 실각했다.

⑤ 4인방 (四人幫ㆍ4사람의 불량배) : "문혁" 기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4명의 공산당 지도자

• 장칭 (강청ㆍ江青 ㆍ1914~1991ㆍ77세) 모택동의 4번째 부인(마담 마오) → 자살연극영화배우ㆍ작가ㆍ서방 문헌에서는 "마담 마오(Madame Mao)"로 지칭ㆍ란핑(연극배우 시절의 예명(藝名))

• 왕훙원 (왕홍문ㆍ王洪文ㆍ1935~1992ㆍ57세) "장칭"과 정치적으로 친밀ㆍ정치가

• 장춘차오 (장춘교ㆍ張春橋 ㆍ1917~2005ㆍ88세) 정치선동 전문가ㆍ문학평론가

• 야오원위안 (요문원ㆍ姚文元ㆍ1931~2005ㆍ74세) 정치선동 전문가ㆍ문학평론가

 

⑥ 저우언라이 (주은래ㆍ周恩來ㆍ1898~1976ㆍ78세) 혁명가ㆍ제1대 총리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총리"진시황릉 발굴"에 중요한 인물시인소설가노련한 외교관ㆍ유능한 행정가ㆍ헌신적인 혁명가ㆍ실용적 정치가국가 부주석까지 지낸 역사학자"시안 사건" 당시 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국공합작 추진추수 봉기광저우 사태 등 주도"마오쩌둥왕자샹"과 함께 "홍군"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마오쩌둥"의 충실한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공산당 내 2인자로 군림했다

"마오" 정권 내내 2인자로서, 그를 보필하였으나, 일설에는 "마오"가 그가 자신보다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 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 "문혁"기간 중, "마오"의 행보를 완화시켰다는 통설과는 달리, 1974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갈 무렵, 그는 "마오ㆍ4인방"에 단지 협조하면서, "마오"에게 굴복하여 수수방관하는 자세로 일관,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숙청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그럼에도 총리직 사퇴를 만류하는 주변의 요청에 따라 정계에서 은퇴하지 않았고, "4인방 체제" 하에서 "문혁" 내내 계속 정무를 맡아보았다. 1976.01, "마오" 8개월 앞서 사망했다.

그와 아내 "덩잉차오(鄧穎超)"는 자식이 없어서, "혁명기간" 중 부모를 잃은 동지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키웠고, 그 중 유명한 이는 후에 총리를 지낸 "리펑(李鵬)"이 있다. 말년에 자신에게 "방광암"이 발병한 것을 알고, "덩샤오핑"에게 많은 직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그는 권력에 욕심을 내지 않고, 국가를 사랑한 정치가로서, 지금까지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여성 편력도 깨끗하였다.  평생 아무것도 갖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식도 없었고,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죽거든 화장해 뼈 가루를 조국산천에 뿌려달라"고 유언하여, 유언대로 비행기로 중국 산천에 뼈 가루가 뿌려졌으며,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다.

2. 홍위병 (홍위군ㆍ紅衛兵)

 "문화 대혁명" 당시, 조직된 "극좌 대중 운동"의 구성원들을 말한다.

이후, 다른 나라에서는 "극단 행동"을 불사하는 "급진파"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 구 성 : 대부분 중학생~대학생 사이의 젊은이로 구성"홍위병" "봉황파(보수파)조반파(혁명파)"로 나뉘었는데, 1966년 당시 처음           권 한 : 군ㆍ공안부ㆍ사법 기관을 넘어섰다.

 봉황파 : "북경대학ㆍ청화대학"에서 조직ㆍ"중국 고위관료 자녀" 출신→ 과격한 폭력성  / 조반파 : 노동자ㆍ농민 자녀들의 비중이 높았다.

"마오쩌둥"과 그의 이념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며, 1966~ 1968년에 무리를 지어 다니며, "마오쩌둥"의 정적이나, "구시대적ㆍ부르주아적"이라고 간주된 모든 것에 폭력을 행사하거나, 철저히 파괴하는 급진성을 보였다. 초반에 과격한 폭력성을 보였던 그룹은 "봉황파"에 속했으며, "봉황파"의 경우는 "모택동"에 대한 충성ㆍ믿음을 강조하고, "모택동"의 반대파를 테러하거나, 공산주의적 문화를 주장하여, 문화재 파괴를 주도했다.

"조반파"의 경우, "모택동" 자체의 인물보다는 "모택동주의 사상"에 입각한 농촌 지역의 "문화 대혁명 운동"을 전개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 "조반파"가 "홍위병"의 상당수를 차지했고, 이들은 "중국 대지진"에서의 "봉사활동ㆍ하방운동"에서의 농촌 근대화로, 초반 "봉황파"에 대한 인민들의 좋지 않았던 이미지를 고쳐나가긴 했으나, "모택동"에 대한 반대파 탄압, 극단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후에 "홍위병"은 내부에서도 "분파"가 심화되어, "홍위병"끼리도 유혈 충돌이 발생하는 여러 사건이 일어났고, "경찰"의 통제력은 상실되었다.

 "청두"의 홍위병 사건

"홍위병 운동" 당시 수 십 만의 홍위군 소년들이 "중국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로 밀려든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당시 상황으로 인해, 한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967년 당시, 중국의 대도시에는 인구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중국 정"부는 대도시의 인구를 지방으로 분산시키고, 아이들을 훌륭한 공산당원으로 만든다는 명목으로 "홍위병 양성소"로 보냈는데, "홍위병 양성소"는 "강제 노동수용소"에 비할 정도로 생활 조건이 몹시 열악했고, 소년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심지어는 아이들을 상대로 "톱밥"을 주원료로 한 "섬유소 식품에 관한 실험"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 무렵, "마오쩌둥"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홍위병"의 책임자였던 "린뱌오(임표)"가 "마오쩌둥"의 총애를 잃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간부들"은 "홍위병"들에게 폭동을 부추겼다.

"모택동 주의"라는 명분으로 "모택동"의 병영을 탈출하고, 교관들을 구타하는 행위가 벌어졌다.  병영을 뛰쳐나온 "소년 홍위병"들은 부패한 권력에 맞서, "모택동주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전국으로 흩어졌는데, 이 같은 상황에서 몰래 국경을 넘어, "인도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비밀 루트에 대한 헛소문이 퍼져, "소년 홍위병"들은 "기차역"으로 몰려가서 서쪽으로 떠났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는 모든 기차들의 종착역은 "청두"였다.  그리하여 산악도시 "청두"에 수천 명의 "소년 홍위병"들이 갑자기 들이닥치게 된 일련의 사건들을 "청두의 홍위병 사건"이라고 한다.  1970년대 초반에 들어 전국적으로 "소년 홍위병"들의 수는 후에 100만이 훌쩍 넘게 되었다.  이들의 횡포는 도를 지나쳤고, 후에 "중앙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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