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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사건- 1979~1946 : 인도차이나 (3차) 전쟁 (베트남전ㆍ월남전)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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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가리키며, 지금의 "베트남ㆍ캄보디아ㆍ라오스"에 해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독립과정"에서 "프랑스ㆍ미국ㆍ중국" 등 외국 군대와 벌인 전쟁을 말한다. 1946~1979년까지, "베트남"이 초강대국과의 벌인 전쟁으로, "베트남"이 모두 승리를 거둔다.

 

1.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① 1946.12~1954.08 : 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와 전쟁)

② 1955~1975년 : 2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ㆍ미국- 베트남 전쟁ㆍ월남전)

③ 1979년 : 3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국-베트남 전쟁ㆍ중월전쟁)

2. 배경

"베트남" 지역은 1883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의 경제수탈에 시달리던 "베트남"은 1945년 "프랑스"를 몰아낸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을 예상한 "베트남 공산당의 일제 봉기"와 뒤이은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수립"으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베트남 북부"는 "중국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고, "남부"에는 "영국군"이 주둔하였다. 하지만 뒤이어 "프랑스 군대"가 다시 "남부"로 들어가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을 점령했다. 이에 "사이공(현, 호찌민) 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3. 인도차이나 전쟁

① 1946.12~1954.08 : 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

"사이공 시"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본국 군인이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이공 시"에서 시민들이 무차별 학살되는 것을 목격한 "베트남인"들은 곧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본과 무기 등에서 뒤진 "베트남 게릴라들"이 엄청난 열세에 놓였지만,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게릴라들은 뛰어난 전략 전술을 통해, 소총ㆍ권총만 갖고서 전차ㆍ장갑차ㆍ대포 등을 동원한 "프랑스군"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1953년, 총반격을 개시한 "베트남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거의 궤멸시켰고, 그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② 프랑스의 제네바 협정 불이행ㆍ미국의 개입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맺은 "휴전 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군대만 철수시켰으며, 이로 인해 "베트남"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총선거"가 결국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를 틈타, "미국"이 반공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55년, "미국"은 "남 베트남"에 부정선거를 통해, "친미 정부"를 세웠다.

"남 베트남 정부"의 부패가 계속되고, 정부가 가톨릭교도들로 구성된 테러조직을 만들어 불교를 탄압하는 등 인권탄압이 심각해지면서, "혁명세력"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 베트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남 베트남"의 미군 주둔 병력도 계속 증가되었다. "호찌민"을 지지하는 "남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전역을 공산화할 것을 염려한 "미국"은 미군 주둔 병력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비밀 군사작전을 통해 "북 베트남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③ 1964년 : 통킹 만 사건

"미국"은 "북 베트남"을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64.08.04일에 "통킹 만 사건"을 일으켰다. "통킹 만 사건"은 "북 베트남" 밖 공해를 순찰하던 미국의 구축함이 "북 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미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의회의 인준을 받아, "베트남"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④ 1955~1975년 : 2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 베트남"과 공산주의 "북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다. 1964년, "통킹 만 사건"으로 시작되어 1975년까지 진행되었다. 1차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던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했다.

⑤ 1978~1979년 : 3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국-베트남 전쟁ㆍ중월전쟁)

보통 1979.02~03월에 벌어진 "중국ㆍ베트남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19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크메르 루주"가 "베트남" 인에 대해, 박해ㆍ인종 청소를 실시하자,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보복 침공을 가하였다.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가 쫓겨나, "중국"과 정치적인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고,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여 이루어진 전쟁이다. 1979년,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고, 전투를 격렬하면서도 짧게 끝나고 말았다. "중국"은 "베트남"에서 40km를 진군하여 1979.03.06일 "랑송"을 점령했지만, 이내 철군을 했다.

4. 1946.12~1954.08 : 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

프랑스 - 비엣민 (베트남) 전쟁ㆍ베트남 독립 전쟁전쟁이 끝나고, 북에는 "호찌민"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고, 남에는 "괴뢰 황제 바오 다이"를 총리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다. 대부분의 전투가 "북 베트남 통킹"에서 벌어졌지만, 충돌은 전국으로 이어졌고, 이웃한 "라오스캄보디아" 확대되었다.

• 일 시 : 1946.12.19~1954.08.01 (7년 8개월)           • 장 소 : 베트남 (북베트남 통킹)ㆍ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결 과 : 비엣민(베트남 독립동맹)의 승리ㆍ베트남의 실질적 독립권 확보ㆍ제네바 회담 : 베트남이 북위 17도선을 일대로 분할ㆍ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철수ㆍ베트남국ㆍ라오스ㆍ캄보디아의 독립

• 교전국 : 프랑스ㆍ프랑스령 인도차이나(캄보디아 왕국ㆍ라오스 왕국)ㆍ지원국 : 미국ㆍ영국 / 베트남 민주공화국(호찌민)ㆍ라오스ㆍ캄보디아(크메르)ㆍ지원국 : 중국ㆍ소련ㆍ독일민주공화국(동독)ㆍ폴란드 인민공화국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독립했으나,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프랑스"를 상대로 "호찌민의 민족주의 저항세력"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다. 연합군은 "베트남" 문제를 "중화민국"에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북쪽에서는 공산군이 내려오고 남쪽에서는 지도자 공백 상태라 혼란이 계속되었으므로,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어 재무장시킨 데 따라 북쪽은 "비엣민(베트남 독립동맹)"이, 남쪽은 "프랑스"가 장악하여, 8년 동안 전쟁이 계속된 것이다.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이 "라오스"와의 국경부분에 위치한 "디엔비엔푸"에서 크게 패퇴한 이후, 국제사회는 "제네바 회담"을 통해 새로운 선거에 의해 베트남 독립을 약속하게 된다. 1954.07.20일 밤과 21일 사이에 진행된 "제네바 협상"에서 "프랑스"는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남북 두 지역으로 나누는 "임시분할"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1953년에 인정받았던 "캄보디아ㆍ라오스"의 독립을 확약하였다. 1954년까지를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기간으로 간주한다.

5. 1955~1975: 2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미국- 베트남 전쟁월남전(越南戰))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베트남 전쟁"으로 칭하지만, "프랑스ㆍ베트남"이 치른 전쟁이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에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하기도 한다. 제공권을 장악한 압도적 군사력의 미군이 폭격ㆍ공습ㆍ포격ㆍ수색 섬멸 작전과정에서 "네이팜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투하하고, "고엽제" 등 화학 무기를 사용하여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희생시킴으로써, 미국 내에서 "반전 운동"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제적 군사개입에 대한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 일 시 : 1955.11.01~1975.04.30 (19년 6개월)ㆍ1964.08~1973.03월 : 미국 개입         • 장 소 : 인도차이나

• 결 과 : 북베트남의 승리ㆍ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ㆍ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베트남 공화국 병합ㆍ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수립ㆍ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공산화

• 교전국 : 미국ㆍ베트남 공화국ㆍ한국ㆍ호주ㆍ뉴질랜드ㆍ필리핀ㆍ타이ㆍ라오스 왕국ㆍ캄보디아 왕국(1967~1970)ㆍ크메르 공화국(1970~) / 지원국 : 중화민국ㆍ스페인ㆍ서독ㆍ영국ㆍ이란(팔레비 왕조)ㆍ캐나다ㆍ일본ㆍ베트남 민주공화국ㆍ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ㆍ중화인민공화국ㆍ캄보디아(크메르 루주)ㆍ라오스 / 지원국(비공식): 소련ㆍ몽골ㆍ인도ㆍ북한ㆍ동독ㆍ 쿠바ㆍ폴란드ㆍ불가리아ㆍ체코슬로바키아ㆍ스웨덴ㆍ미얀마ㆍ버마 사회주의공화국        /  지휘관 : 미국(아이젠하워ㆍ케네디ㆍ존슨ㆍ리처드 닉슨)/ 한국(박정희ㆍ채명신ㆍ이세호)/ 필리핀(페르디난도 마르코스)ㆍ베트남(호찌민)ㆍ북한(김일성)ㆍ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저우언라이)ㆍ소련(흐루쇼프)ㆍ캄보디아(폴 포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분단되었던 베트남에서 1955.11.01~1975.04.30일까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임과 동시에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전쟁" 양상을 띠었고, 1964.08~1973.03월까지는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ㆍ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베트콩"으로 알려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전ㆍ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 인민군의 정규전"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1964.08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1965년 미국ㆍ한국 등이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이후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01월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1973.03월 말까지 "미군ㆍ 한국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04.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뤄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① 남베트남 지원국가 : 한국 (비둘기ㆍ청룡ㆍ맹호ㆍ백마)

병력 누계 32만 명ㆍ의무기간 1년ㆍ전사: 5,000명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를 내걸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한국의 파병은 "미국"의 요청이 있기 전인 1961년 "박정희"가 "존 F.케네디"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케네디의 정책"은 베트남 전쟁에 미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B.존슨"은 1964년 한국에게 "의료부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64.05.09일 미국이 보낸 서한에는 "1개 이동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국방부는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 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통킹만 사건"이후 미국은 한국에 "후방 지원부대"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한국은 "제6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본부인 "비둘기 부대"를 창설하고, 1965.03.10일 인천항을 통해 파병하였다. "비둘기 부대"는 03.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사이공" 동북쪽 22km에 있는 "지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1965년 미국은 베트남 주둔 민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65.03.11일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국무부 차관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추가적인 병력을 기꺼이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이동원" 외부무 장관은 "브라운"주한미국 대사와 다음과 같이 협상을 한다.  • 파병 상한선은 5만 명 이내       •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       • 북한의 침공 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 방위조약"을 개정한다.       •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진출"을 보장한다.

위와 같은 한국 정부의 요구사항은 1965.05.17~18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고, 한국 정부는 06.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정식파병요청서"를 접수하고, 08.13일에 국회 의결을 얻었다.

한국 국방부는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청룡 부대"가 1965.10.09일 "깜란"에 상륙하였고, 09.20일부터 "주월 한국사령부"가 "사이공"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11.01일에는 "맹호 부대"가 "뀌년"에 상륙하였다. 베트남파병 병사의 의무 기간은 1년이었고, 파병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당시의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만여 명이었으며, 한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 명에 달했다.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 역시 철군하였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의 전사자는 약 5,000여 명이었고, 11,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군은 전쟁 중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약 41,000여 명을 사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억3천6백만 달러를 지불하였고, 한국은 "파병의 대가"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한국의 GNP는 파병을 전후로 하여, 5배가량 성장하였다.

6. 1979: 3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중월전쟁)

1979.02.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일어난 "중화인민공화국ㆍ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한다.

• 일 시 : 1979.02.17~03.17         • 장 소 : 중국ㆍ베트남 국경 부근 일대         • 결 과 : 양측 모두 승리 주장1990년까지 국경 충돌 지속중국군 철수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 교전국 : 중화인민공화국 (덩샤오핑) / 베트남지원국 : 소련라오스

1979.02.17일, 국경지대인 "윈난 성"에 집결한 "중국군"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베트남" 북부는 "열대 산악지형"으로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군"은 주력 부대가 "캄보디아"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침공군에 맞선 병력은 "민병대ㆍ국경 수비대"뿐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수십 년 간의 실전 경험이 있었고, 현지 지형에 익숙했던 반면, "중국군"은 1960년ㆍ1970년대를 중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 때문에 장비나 통신 면에서 근대화가 지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중국군은 전쟁 중 많은 사상자를 내는 희생을 치렀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 전진하여 03.06일 국경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요충지인 "랑선"을 점령하였다.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여, "랑선"을 철저히 파괴하고 철군하였다.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하였으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철군시키려던 당초의 전쟁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1980년대 내내, "중국ㆍ베트남"은 국경선 획정을 두고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 벌였다. 1989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양국 사이에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중국ㆍ베트남" 간 육지 국경선을 획정하는 "국경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와중에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로"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 해상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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