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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사건- 1966- 1976 : 문화 대혁명 ② 홍위병ㆍ덩샤오핑의 등장

by 당대 제일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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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 (紅衛兵ㆍ(Chinese) Red Guards)"으로, "문혁"을 추종하는 대중주의 조직병사를 뜻하는 "병(兵)"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중국 인민해방군"과의 직접적 연결은 없으며, 본래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이었다. 즉, 준군사조직 같은 성향이 있기는 했으나, "정식 군 조직"은 아니었다.

 

1. 전 개

① 개시 (1966.05.16~)

1966.08.0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ㆍ약칭 "16개 항"을 발표하였다. 이 문건은 "문혁"을 인민들의 혼까지 와 닿는 혁명이고,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사에 새로운 장을 연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결정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학생운동"을 노동자ㆍ농민ㆍ병사들이 집단이 참여하는 전국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렸다. 이들은 "상부구조"를 전환시키기 위해 대자보와 논쟁을 사용했다. "문혁"의 주 목표중의 하나는 "4개의 낡은 것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낡은 "사상(舊思想)ㆍ문화(舊文化)ㆍ풍속(舊風俗)ㆍ관습(舊習慣)"을 말한다.

이 결정문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인민"에게 최대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이 "표현의 자유"는 "마오 사상"에 의해, 범위와 성질이 규정된 것이었다. 또한 언론ㆍ표현ㆍ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15항ㆍ16항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마오"의 의중에 따라 진정한 의미가 결정되었다. 제16항이 규정한 "자유"는 후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대 민주(大民主)의 4대 자유(四大自由)로 규정되었는데, 그것은 자유롭게 말할 권리(大鸣)ㆍ자신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권리 또는 다른 사람과 단결할 수 있는 권리(大串聯)ㆍ대자보를 쓸 수 있는 권리(大字報)ㆍ논쟁을 할 수 있는 권리(大辯論)였다.

이렇게 규정된 "자유들"에 의거해, "홍위병"은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마오 주의자"가 아닌 모든 사람은 비판을 하였고, 때로는 부패혐의로 고발하여, 감옥에 보내거나 실각시켰다. 후에 이 "자유들"에 "쟁의권"이 추가되어 다시 보완되었다. 그러나 이 "쟁의권"은 1967.02월, 민간 대중 정치에 대한 "군대의 개입"으로 심하게 약화되었다. 이 권리들은 1978년 "서단민주장(西單民主墻) 사건" 이후, "덩샤오핑" 집권기인 1979년 헌법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② 1966. 8월 이후

1966.08.16일, 전국으로부터 수백 만 명의 "홍위병"이 "마오 주석"을 회견하기 위해 "베이징"에 모였다. "마오ㆍ린뱌오"는 "톈안먼 광장"의 단상에서 전국에서 상경한 약 1,100만의 "홍위병"들에게 자주 모습을 드러내어, 매번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마오"는 "사회주의ㆍ공산주의"를 위한 최근의 운동(즉 문혁)에서 보여준 "홍위병"의 행동을 칭찬했다.

"4구 파괴" 운동에서, "홍위병"은 모든 종교 활동에 핍박을 가했다. "절ㆍ서원ㆍ교회ㆍ수도원" 등은 문을 닫았고, 더 나아가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홍위병"은 "4구"라고 간주된 모든 것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핍박 끝에 심문ㆍ고문도 일어났고, 구타ㆍ폭행을 견디지 못한 많은 이들이 자살을 마지막으로 선택하였다. 8~ 9월, "베이징"에서만 "홍위병"에 의해 1,772명이 살해되었다. "상하이"에서는 "문혁"에 관련되어 704명이 자살하고, 534명이 살해되었다. "우한"에서도 62명이 자살하고, 32명이 살해당했다.

관계 당국은 이런 "홍위병"의 폭력을 막는 것을 제지당하거나, 방관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 당시 공안부의 수장, 셰푸즈 >

1968년까지, 약 2년 동안(어떤 곳에선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하였다), "홍위병"과 같은 학생운동세력은 사회적 발언권ㆍ권한을 늘렸고, 사회의 "공산주의적 개편"을 위한 자신들의 노력을 가속화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발전ㆍ강화를 위한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전단을 뿌렸고, "반혁명 혐의자"라고 지목된 이들의 명단을 "대자보"에 공개했다. 그들은 집단을 이뤄, 집회를 열고, 교훈적인 연극을 상연했다. 또한 그들은 집회에서 "자아비판"을 행하고, "반혁명 혐의자"들을 비판했다.

"마오"를 비롯한 "문혁"의 수뇌부들과 "16개 항"은 물리적 수단보다는 언어적 수단의 투쟁을 권고했으나, 이런 활동은 결국 폭력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그리고 활동가들 사이의 논쟁이 더욱 폭력적이 되어, 급기야는 1967년 "군부대"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문혁" 수뇌부들은 활동가들의 언어 투쟁이 폭력사태로 비화하는 것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가끔은 "무력투쟁"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기고 탈취"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러한 대중 운동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한편 "류샤오치"는 "카이펑"으로 유배되었다가, 지병이 악화되었지만, 의사가 치료를 거부하여, 1969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덩샤오핑"은 소위 3번의 "재교육 과정"을 거쳐, 결국 "엔진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이후, "저우언라이"에 의해, 구제될 때까지 몇 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혁명 분자ㆍ우파"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마오"는 "홍위병"의 행동을 칭송하였다. 1966.08.22일, "마오"는 "공안"이 "홍위병"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지문을 발표하였다. "홍위병"의 행동을 제지하는 "공안"은 "반혁명 세력"의 딱지가 붙어서, 자신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1966.09.05일, "마오"는 모든 "홍위병"이 "베이징"을 순례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숙박비ㆍ교통비는 정부가 부담한다는 것을 곁들였다. 10.10일, "문혁"의 수뇌부 중의 한명인 "린뱌오"는 "류샤오치ㆍ덩샤오핑"을 공개적으로 "주자파(走資派ㆍ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자)"로 비난하였다. 또한 "펑더화이"도 "베이징"에서 "홍위병"에 의해, 자택에서 끌려나와 조리 돌림되었다.

※ 홍위병 (紅衛兵ㆍ(Chinese) Red Guards)

"문화대혁명"을 추종하는 대중주의 조직. 병사를 뜻하는 "병(兵)"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중국 인민해방군"과의 직접적 연결은 없으며, 본래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이었다. 즉, 준군사조직 같은 성향이 있기는 했으나, "정식 군 조직"은 아니었다. "革命無罪, 造反有理 (혁명무죄, 조반유리): 혁명에는 죄 없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③ 1월의 폭풍과 정리 작업

1967.01.03일, "린뱌오ㆍ장칭"은 미디어를 동원하여, 지방의 "문혁 지도원"들에게 소위 "1월의 폭풍(一月風暴)"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 이 운동에서 "상하이"의 수많은 고위 행정직들이 심하게 비판받았고, 숙청되었다. 이것은 "문혁파"였던 "왕훙원"이 "지역혁명위원회 지도자"로서 "상하이"의 행정ㆍ시당(市黨)을 장악하는 데 길을 열어주었다. 이곳의 지역정부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이것을 "조반"이라고 했으며, 이들을 본 따, 각 관공서에서 하위직들이 상급자들을 몰아내는 "조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는 "류샤오치ㆍ덩샤오핑"이 다시 한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당"의 비판활동에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던 "캉셩이나ㆍ천보다" 등은 이를 기회로 삼아 부총리였던 "타오주"가 과오를 범했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중앙정부" 내부와 "지방당"의 책임자들 사이에서 "문혁"을 자신의 반대자ㆍ정적을 "반혁명분자"로 고발하여 실각시키거나 ,숙청시키는 기회로 삼는 "권력투쟁"의 시작이었다.

01.08일, "마오"는 "인민일보"를 통한 이러한 활동을 크게 칭찬하였고, 모든 지방 정부 지도자들이 자아비판과 함께,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숙청하도록 권장했다. 이것은 "지방정부" 내에서 숙청에 숙청이 꼬리를 문 "대규모의 권력투쟁"을 야기하였다. 이것이 심화되자, "지방 정부" 기능은 마비되었다. 숙청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혁명 활동"(즉 문혁)에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이것도 꼭 확실한 보장은 아니었다.

④ 사회 전 부문으로 "자기비판" 확산

1967.02월, "장칭ㆍ린뱌오"는 "마오"의 승인 하에서 "계급투쟁"을 "군사부문"까지 확대했다. 동시에 자기비판ㆍ퇴폐ㆍ향락문화에 대한 정리 작업이 "공공부문"으로도 확산되었다. "중공 정권"을 세우는데 일조한 "인민해방군"의 많은 유력 지휘관들이 "군사부문의 문화혁명"을 우려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전(前) 외교 부장이자, 군에서 원수인 "천이"는 "정치국 회의"에서 "문혁파"가 군사부문을 황폐화시키고 다음에는 "당"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다른 원수였던 "네룽전ㆍ쉬샹첸"도 이런 운동에 큰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던 "문혁파"의 "장춘차오ㆍ야오원위안"의 반격을 받아, 차례로 "2월 역류(二月逆流)"의 낙인이 찍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결국 "홍위병"의 비판을 받아, 강제 예편과 동시에 "당정군"의 요직에서 실각하였다.

동시에 많은 "홍위병" 조직들도 분화하여, 자신과 다른 혁명적 메시지를 전하는 다른 조직들을 서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것들은 상황을 악화시켰고, 혼동을 가중시켰다. 이에 대해 "장칭"은 "홍위병 내의 모든 불건전한 활동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04.06일, "류샤오치"는 "장칭ㆍ캉셩 일파"로부터 공개적이고, 광범위하게 비판받았고, 여기에 궁극적으로 "마오"가 가세하여 비판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공개 비판 집회들이 열렸고, "장칭"은 이에 참석하여 모든 "반혁명활동"을 규탄하였다. "장칭"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군사부분"까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러한 집회 중에서 가장 큰 규모가 열렸던 "우한"으로 달려가서 "우한"의 방위를 맡고 있던 "천자이다오 장군"을 비판하였다. 07.22일, "장칭"은 "홍위병이 필요하다면, 인민해방군을 대체하고, 현존하는 군을 무력화 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장칭"의 선동으로 "홍위병"은 군대에 난입하여, 약탈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은 "반혁명분자"로 몰릴 것을 두려워 한, "군 지휘관"들이 통제할 수 없어서, 1968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⑤ 청년 하방(下放) 운동

동시에 도시의 지식인 청년들 사이에서, "실천주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마오"의 혁명사상을 농촌에도 보급하자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자신의 청춘ㆍ피ㆍ생명을 이 "성전"에 내걸었다. 1967.10월, "베이징"의 일단의 "홍위병"그룹이 "네이멍구"로 갔다. 이것이 "하방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때 "문혁"을 믿어 의심치 않은 순진한 그들은 "사회주의 농촌의 건설ㆍ자신을 참된 공산주의자로 개조한다."는 꿈을 그렸다.

"하방"은 한 세대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홍위병 운동"보다도 더욱 심각한 사회 운동이었다. "홍위병 운동"은 청년들에게 "철저한 해방"이라는 큰 무대를 제공하고, 거기서 자유분방하게 청춘을 발산케 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유혈투쟁"도 등장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년들은 "하방운동"에서 급속히 하나의 운명 공동체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운명 공동체" 속에서 한때 서로 다투던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투쟁 상대인 다른 청년그룹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홍위병" 운동에서 철저하게 해방을 맛본 청년들은 "하방"을 통해, 집단 인격과 공동 문화를 구축해갔고, 자신들만의 "성인 의식"을 완성시켰다.

지식 청년들은 "혁명의 실천에 참가한다"는 정치적 사명을 갖고, 농촌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하방"에 적극적이어서, 변방의 가장 궁핍한 촌락을 고르곤 했다. 지식 청년들은 낮에는 밭에 나가 일했고, 저녁이면 농촌문제를 토론하고, 농민 발전에 대해 연구했다. 이들은 "농촌 계몽"에도 앞장서서, "야학당"을 개설하고, 문맹자에게 무료로 한자ㆍ숫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외지인 지식청년"에 대한 농촌지역의 배척ㆍ경계는 식자 청년들에게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고, "반동 부르주아 자본가"들이 획책하는 음모로 이해되었다.

"제3세대"라 불리는 지식 청년들은 자신들의 "하방 경험"을 "혁명 제1세대의 전쟁 체험"과 같은 것으로 보곤 한다. "혁명 빈농이 주인공인 농촌 사회"는 학교에서 배우던 "사회주의의 장밋빛 사회"가 아니었고, 학교에서 말하던 "좋은 아이"의 기준은 어려운 생존 환경 속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옳다고 배워왔던 것이 현실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것과, 인맥과 연줄로 만사가 정해지는 농촌의 풍경과 적당히 은폐하려는 농촌 문화에 지식청년들은 좌절했다.

동시에 지식청년들은 학교 교육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철저한 적자생존의 법칙"은 청년들의 가치관을 철저히 깨뜨렸다. 현실의 농촌 생활은 장밋빛과는 전혀 다른 혹독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받아 온 교육이 현실 사회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었음을, 척박한 들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온 몸으로 실감하게 된 것이다. 후일 "문혁"이 실패로 인정되었으나, 당시 "홍위병ㆍ하방" 등에 참여한 청년들은 대부분 당시 교육자들에 대한 단죄ㆍ숙정작업에 한해서는 후회ㆍ반성을 거부하였다.

⑥ 1968년

1968년 봄, 이미 숭배의 대상이 된 "마오"를 신격화시키려는 대규모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마오"는 이런 시도를 자신의 "최고 지침"으로 지지하였다. 1년 후 "홍위병"은 완전히 몇 개 "파"로 분열되었고, 갈등은 더 커졌다. "마오"는 "홍위병"이 야기하고 있는 이러한 혼란이 "공산당의 지지기반에 해가 될 것"을 우려했다. "마오"의 입장에서는 "홍위병"이라는 존재로써, "권력회복"이라는 목표를 대체로 달성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혼란은 원치 않았다. 이제 광범위한 파괴ㆍ혼란을 부른 "홍위병"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07.27일에는 "인민해방군"에 대한 "홍위병"의 우위는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군대가 나서 "홍위병"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정부"는 병력을 파견하여, "홍위병"의 목표가 될 만한 곳들을 경비하였다.

10월 초반, "마오"는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고위 공직자를 겨냥한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재교육의 명목"으로 농촌으로 보내져서, 육체노동을 하게 되었다. 같은 달, "제8차 중앙위원회의 제12차 전체회의"에서는 "류샤오치"를 "당"에서 영구제명하기로 결정하였고, "린뱌오"가 "당의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린뱌오"를 "마오 주석의 친밀한 전우"로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마오"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린뱌오"는 "마오"에 이어, 권력 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

⑦ "마오"의 "하방 운동" 주목

"마오"는 "하방 운동"의 자발적이고, 전국적 전개과정을 주목하였다. 1968.12월, "마오"는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다시 배우자"고 주장하면서,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개시하였다. 10년간 계속된 이 운동에서 도시에 살고 있던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그곳에서 육체노동을 하도록 명령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최근에 "중학교(한국 학제로는 고등학교에 해당)"를 졸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외지의 이질적인 문화로 고통 받으면서도, 지식청년층들은 "마오"의 혁명사상 전파와 사회주의 신 농촌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0년 후반, 이런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 운동은 "홍위병"들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보내, 사회적 분란을 감소시키려는 의미도 부분적으로 있었다.

2. "린뱌오"의 득세ㆍ몰락

"린뱌오"의 득세당내 권력 이동

"마오"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린뱌오"1968년 이래, "중국 지도부"의 가장 유력한 인사가 되었다그러나 몇 차례 "마오 암살기도"가 벌어진 후, 1971.09"린뱌오"가 탄 비행기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과 전 세계는 깜짝 놀랐다"린뱌오"의 득세몰락죽음은 아직까지 역사가들의 주된 이슈이고, 아직도 확실히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1968~1971년 사이, "린뱌오"와 관련된 사건들을 정확하고 타당성 있게 검증하는 것은 현재에도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불가능하다.

1969.04.01, "중국공산당 9차 중앙위원회"에서 "린뱌오" 가장 큰 승리자였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2인자가 되었다. 또한 "국방부장"을 오래 지낸 그는 "군부"에 대한 영향력도 다른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린뱌오"의 가장 큰 잠재적 경쟁자이었던 "류샤오치"는 이미 숙청되었고, "저우언라이"는 이미 고령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9차 중앙위원회""린뱌오"가 제출한 "정치 보고"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보고는 "류샤오치다른 반혁명세력"에 대한 규탄과, 지속적으로 "마오 어록"을 인용하는 것으로 채워졌다그리고 2번째는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에 맞춰 당을 새롭게 건립하는 것이었다그래서 모든 사안에서 "마오"의 이름은 "린뱌오"와 연결되어 언급되었다"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 식의 호칭이다3번째로 새롭게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마오쩌둥린뱌오천보다저우언라이캉셩"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정치국""문혁"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사들로 대부분 채워졌다"저우언라이""정치국"에 남았지만, 서열은 5명중 4위로, 위상이 축소되어 있었다.

"린뱌오"의 권력 기반확장 시도

당시 "린뱌오" 최전성기였으며,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마오"에 이어 2인자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러나 "린뱌오" 좀 더 확실한 안전판을 두고 싶어했다, "마오 후계자"로 확정된 이후, "린뱌오" "류샤오치"의 실각으로 폐지된 "국가주석 직"을 복원하려고 노력하였다. "뱌오""마오"를 주석에 두고, 자신은 부주석 자리를 가지려고 한 것이다.

1970.08.23, "중국공산당 제9차 중앙위원회""2차 전체회의"1959년에 이어, 다시 "루산"에서 열렸다"천보다"1번째 연설자로 나서, 간접적으로 스스로를 높이려는 의도로, "마오"를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발언을 하였다. 동시에 "천보다" "국가 주석제를 복원하자"는 제안을 했다그러나 "마오""천보다"의 제안을 크게 비판했고,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하였다.

"천보다""상무위원직 해임""린뱌오"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졌다"9차 중앙위원회"가 끝난 후에도, "린뱌오"계속적으로 "당직정무직"에서 승진을 요구하였다"마오""린뱌오"의 의도가 "최고 권력을 차지하고, 자신을 축출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마오""천보다"가 제의한 "국가 주석직 신설"도 의심의 눈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주석인 "마오"의 사후에 부주석인 "린뱌오 자동적으로 승계를 하겠다"는 의도로 판단한 것이다이것은 "마오"의 안전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린뱌오""마오"에 대한 쿠데타기도죽음

"새로운 권력투쟁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혁명 활동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다른 무리가 이를 낚아챌 것이다." < 린뱌오 "린뱌오""정부"안에서의 권력 확장 시도에 대한 "마오"의 의심거부는 "린뱌오"을 심리적으로 좌절시켰다더욱이 "린뱌오"의 권력기반은 "당 기관"에서 이 날로부터 축소되기 시작하였고, 그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다. "린뱌오"는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한다.

"린뱌오"의 지지자들은 "마오"를 축출하기 위해 아직 "린뱌오"의 손에 남아있는 군권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린뱌오"의 아들이자, 공군 고위지휘관이었던 "린리궈"와 다른 고위 음모자들은 "상하이"에서 "마오"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이를 "571 공정"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571"의 중국어 발음 "우치이" 무장 봉기를 뜻하는 중국어 단어인 "우치이(武起義)"와 발음이 같다.

이 음모에 "린뱌오"가 얼마나 간여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수정주의" 해석자들은 이 계획은 "린뱌오" 보다는 "린리궈(린의 아들)"이 대부분 꾸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음모는 대체로 "공군"을 동원한 폭격병력동원으로 이뤄져 있었다이 계획이 성공했을 때, "린뱌오"는 모든 정적을 체포하고, "최고 지도자"로 등극할 예정이었다.

1971.09.08~ 10일 사이에, "마오"를 암살하기 위한 기도가 있었다이러한 음모는 실행되기 이전에 "지역 공안당국"이 눈치 채고 있었다"공안 당국""린뱌오" 측이 거사를 위한 요원들을 군부대에서 훈련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오"는 이때 "남부 중국"을 방문 중이었는데, "마오"가 습격당했다는 여러 설과 보도가 있었다그 중 하나는 "마오""전용 열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오던 중, 위해를 입었다는 것이다또 하나는 "마오"가 탄 열차가 다리를 지날 때 폭파하려고 했으나, "정보기관"이 미리 감지하여 "마오" 일정을 바꾸어 무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수많은 병력이 "마오"를 경호하기 위해, 10~20m 간격으로 배치되어 철로를 지켰다또한 이 "병력 중에도 암살자가 섞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아래, 모든 병력의 시선은 바깥쪽을 향하도록 하였다이런 설들은 서로 모순되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1971.09.11일 이후, "린뱌오린의 부하들"은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 당시 많은 수가 "홍콩"으로 도피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실패하였고, 20명의 "육군 장군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1971.09.13.일에는 "린뱌오예췬(부인)린리궈(아들)몇 명의 보좌관들"이 비행기로 "소련"으로 도피하려고 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몽골"에서 추락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같은 날, "정치국""비상회의"를 소집하여, "린뱌오"의 혐의에 관한 여러 건을 토의했다09.30일에 "린뱌오"의 사망이 "베이징"에서 확인되면서, 당초 10.01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국경절(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 행사"도 취소되었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가랑 유력한 설은 연료가 부족했거나, 혹은 갑작스러운 엔진고장이라는 것이다또한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는 설도 있다또한 소련 측이 이 비행기에 탄 탑승자의 유해를 수거했다는 설도 있다어쨌든 "린뱌오""쿠데타기도"는 실패했고, 그것으로 그는 정치적으로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신의 목숨도 잃는 파멸적인 운명을 맞았다.

3. "사인방"의 득세ㆍ몰락

① "사인방"의 대두ㆍ"저우언라이ㆍ덩샤오핑"에 대한 "4인방"의 적의

"자신의 가장 친밀한 수하였다"고 생각했던 "린뱌오"의 배신 때문에, "마오"는 후계 문제와 당의 앞날에 관해 깊이 근심하게 되었다. 마땅한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1972.09월, "상하이"의 젊은 당 간부였던 "왕훙원"이 "베이징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승진하여, 다음 해에 "공산당 부주석"에 올랐고, "마오"의 잠재적 후계자로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같은 해, "저우언라이"의 건의로, 이전에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다시 중앙에 진출하여, "부총리"에 올라, 정부의 일일 업무를 관장하기 시작했다.

"린뱌오"의 죽음와 "마오"의 건강 악화 때문에, "장칭ㆍ그녀의 추종자들"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장칭"은 "문혁"의 초반에 방향을 이끌었던 주역이었지만, "린뱌오"의 사후 "장칭"이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장칭"은 정치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ㆍ야오원위안", 그리고 정치적으로 친밀했던 "왕훙원"과 연합하였다.

이 4명은 후에 "사인방(四人幫ㆍ4사람의 불량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미디어ㆍ선전망을 장악하였고, "저우언라이ㆍ덩샤오핑"이 집행하는 경제정책에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1973년 말, "사인방"은 "비림비공(批林批孔ㆍ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함)"운동을 개시하였다. 이것은 겉으로 내건 목표로는 중국 문화에서 "유교적 영향"을 제거하고, "린뱌오의 반역행위"를 비판하자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이는 "저우언라이"를 겨눈 운동이었다. "사인방"은 "저우언라이"를 "포스트- 마오"이후, 후계구도에서 가장 큰 잠재적 위협으로 보았다. 이 운동에서 "저우언라이"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았지만, "사인방"은 역사적 인물인 "주나라의 주공(周公)"을 자주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저우(周)씨"였던 "저우언라이"를 은유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대중은 대체로 쓸데없고, 파괴적인 정치적 운동에 식상하게 되었고, 이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저우언라이를 실각시키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하였다. "사인방"은 미디어를 장악했지만, "덩샤오핑"이 경제정책의 집행을 통해, 실세로 떠오르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덩샤오핑"은 "당의 분파운동"에 대해 명백히 반대했으며, 그는 "당"의 단합이 효과적인 생산 활동의 전제 조건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오"는 "덩샤오핑"의 정책이 "우파의 복권운동"이라고 칭했다. "문혁" 전체의 명성이 "덩샤오핑"의 정책 때문에 "금이 갈 위기"에 처하자, "마오"는 1975.12월, "덩샤오핑"에게 "자아 비판서"를 쓰도록 하였다. 이것은 "사인방"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② 1976년 저우언라이 사망ㆍ마오쩌둥 사망ㆍ덩샤오핑 가택연금ㆍ천안문 사태 발생

"4인방" 체포→ "문화 대혁명" 종말

1976.01.08일, "저우언라이"는 "방광암"으로 사망하였다. 다음날 "베이징"의 "인민 영웅비" 앞에서는 이를 추모하는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01.15일, "저우언라이"의 장례식이 열렸고, 그에 대한 폭넓은 인민들의 존경심 때문에 추모 열기는 전국을 휩쓸었다. 이런 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사인방"은 이것이 정치적인 파고로 변모하지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미디어를 통해, 추모열기에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검은 옷ㆍ하얀 조화ㆍ다른 조문행위에 대해 제한을 가했다. 그 자신도 심하게 와병 중이었던 "마오"를 제외한 모든 중국의 고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덩샤오핑"은 공식적으로 "저우언라이"의 추모사를 낭독했다. 

"저우언라이"의 죽음 이후, "마오"는 "사인방" 중에서 총리를 선발하지 않고,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하였다. 2월, "사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인 "부총리 덩샤오핑"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04.05일은 중국의 전통 명절인 "청명절"이었고,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추모를 행하는 날이었다. 군중들은 3월 말부터 "톈안먼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은 전횡을 일삼는 "사인방"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점차 많은 군중이 여기에 가담하였고, "사인방"을 규탄하는 포스터나 격문이 발표되었다.

04.05일, 수십만의 인파가 "텐안먼 광장"에 집결하였고, 이 군중은 "비폭력 항의 시위"로 변하였다. "사인방"은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공안"이 이를 해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텐안먼 시위대"는 "덩샤오핑"의 지도하에서 "소수의 우파 반혁명 분자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국적인 미디어를 통해 이를 규탄하였다. 04.0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장춘차오"는 개인적으로 "덩샤오핑"을 공격했고, "덩샤오핑"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가택 연금되었다.

1976.09.09일, "마오쩌둥"은 사망하였다. "문혁" 동안, 형성된 "마오"의 이미지는 대중과 항상 함께한 이상적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 "마오"의 죽음은 "중국 사회주의의 상실을 상징화"하는 것이었다. "중앙위원회"의 통지문으로 09.09일 오후, 그의 죽음이 발표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슬픔에 잠겼고 추모열기에 휩싸였다. 거리에서는 통곡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쪽지를 넘겼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화궈펑"을 새로운 "당 주석"으로 등극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이 사건 이전에는, "화궈펑"은 정치적 기술이나 야망이 부족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사인방"이 "마오"를 계승하는데, 별로 위협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젠잉"과 같은 유력한 군 지도자와 비록 몰락했지만, "당"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덩샤오핑",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지지아래서 "화궈펑"은 "사인방"의 체포를 명령하였다.

지금까지 4인방의 체포에 대해서는, "예젠잉(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중심이 되어 모의하였고, 망설이는 "화궈펑"에게 결단을 강요했다는 견해가 있었다. 스스로 "마오" 사망 다음날에 "4인방 체포"를 결단하였고, "예젠잉" 등 당의 원로들과 사전에 교감을 가졌다고 "화궈펑" 본인이 증언했다는 설도 있다. 10.10일, "8341 특수연대"는 "사인방" 전원을 체포하였다. 역사적으로는 이것을 "문혁"시대의 종말로 간주한다.

4. 이후 상황 전개ㆍ"덩샤오핑"의 집권

"화궈펑"은 공식적으로 "사인방"을 비판하고, 그들을 체포하였지만, 그도 "마오"의 이름을 빌어, "마오 시대"의 정책을 옹호하였다. 그는 "양개범시(兩個凡是)ㆍ마오쩌둥이 "결정한 것과 지시한 것" 2가지는 무엇이든 옳다"는 구호를 외치며, "마오 주석"이 행한 정책은 모두 옳고, 이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화궈펑"의 목표도 "문혁"으로 야기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실용적이었던 "덩"과는 달리 "화"는 1950년대 "소련의 통제경제"를 모델로 한 정치경제구조를 선호하였다.

"화"의 정무에는 재야에 있던 "덩샤오핑"의 도움이 필수적임은 명백해졌다. 비록 "사인방"에 의해 당에서 축출되었지만, "덩"은 당내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10.10일, "덩"은 개인적으로 "화"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을 복권ㆍ복직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예젠잉"은 "덩"이 "정무원"에 복직되지 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화"를 닦달했다는 설이 있다. 증가하는 압력 하에서, 1977.07월 "화"는 "덩"을 다시 "정무원"으로 복직시켜 "부총리"에 임명하였고, 당직도 복원시켜주었다.

이것으로 "덩"은 "화"에 뒤이은 "실력자 2인자"가 되었다. 1977.08월, "제11차 중앙위원회"가 "베이징"에서 열려,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화궈펑ㆍ예젠잉ㆍ 덩샤오핑ㆍ리셴녠ㆍ왕동싱"이 서열 순으로 선출되었다. 1978.05월, "덩"은 자신의 피후견인인 "후야오방"을 더 승진시킬 기회를 잡았다. "후"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기고하면서, "마오"의 어록을 인용하여, "덩"의 이론을 치켜세웠다.  이 기고문이 발표된 후, "덩"과 "후"의 지지는 확산되었다. 1978.07.01일, "덩"은 "대약진 운동"에 관한 "마오의 자아 비판서"를 공개하였다. "덩"은 지지기반을 넓혀가다가, 1978.09월부터 공개적으로 "화궈펑의 양개범시" 정책을 비판하였다.  1

978.12.18일,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위원회의 제3차 전체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덩"은 "사상의 해방"이 바람직하며, 당과 국가는 "실사구시"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화"는 자아비판을 하고, "양개범시는 자신의 과오였다"고 말했다. 예전 "마오"의 추종자였던 "왕둥싱"도 비판받았다. 이 총회에서 "청명절"에 열렸던 "텐안먼 사건"도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또한 유배 중 사망한 "류샤오치"의 뒤늦은 국장도 치러졌다.

1980년에 열린 "제11차 중앙위원회의 제5차 전체회의"에서는 "문혁"기간에 숙청된 "펑전ㆍ허룽" 및 다른 고위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 행해졌다. "후야오방"은 "당 총서기"가 되었고, 또 다른 "덩"의 피 후견자인 "자오쯔양"도 "중앙위원회"에 들어왔다. 9월, "화궈펑"은 사임하고, 총리직은 "자오쯔양"이 계승하였다. "덩"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로써 "실용적인 개혁파 지도자"로의 권력 이동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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