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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사건- 1966- 1976 : 문화 대혁명 ① 문혁 (文革)ㆍ십년 동란 (十年動亂)

by 당대 제일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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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ㆍ문혁 (文革)ㆍ십년 동란 (十年動亂)"은 1966.05월~1976.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ㆍ문화ㆍ정치" 소란으로, "문혁"은 대개의 중국인ㆍ외부인ㆍ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국가적 재난"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1.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문혁 (文革)십년 동란 (十年動亂)

공식적으로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無産階級)이다.

1966.05월~1976.12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ㆍ문화ㆍ정치" 소란으로, "문혁"은 대개의 중국인ㆍ외부인ㆍ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국가적 재난"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한편, "마오쩌둥" 자신이 시도한 "대약진 운동"에서 파멸적인 결과를 빚어, ""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이 "덩샤오핑류샤오치"에게 넘어가려 하자, "극좌적 계급투쟁" 형식을 빌려, 이를 선회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는 것도 통설이다.

형식상 표면에 내세운 구실은 "회생하려는 전근대성 문화와 시장 정책 문화를 비판하고, 더욱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출하자!"라는 "정치ㆍ사회ㆍ사상ㆍ문화" 개혁 운동이었지만, 실제로는 "대약진 운동"이 크게 실패한 탓에 정권 중추에서 잠시 물러난 "마오쩌둥"이 자신의 재부상을 획책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민중ㆍ학생폭력운동"을 동원해, "시장회생 파"를 공격하고 죽이려고 몰아간, "마오쩌둥 파와 덩샤오핑 파" 간의 권력 투쟁을 겸하였다.

1966.05.16일,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부르주아"계급의 "자본주의ㆍ봉건주의ㆍ관료주의" 요소가 "공산당ㆍ중국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 청년 학생들과 민중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인민민주독재"를 더욱 확고히 실현키 위해 "트로츠키주의 식"의 진일보 투철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후의 영구적 계급투쟁"을 통해, 이런 것들을 분쇄시켜야 한다고 하였고,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마오쩌둥"이 "문혁"을 제창하게 된 동기는 노선을 변경한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공에서도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국"에서 더욱 이상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① 책 임 자 : 4인방 + 홍위병 책임자 : 린뱌오 (임표林彪1907~197164)

• 장칭 (강청ㆍ江青 ㆍ1914~1991ㆍ77세) 모택동의 4번째 부인(마담 마오) → 자살

왕훙원 (왕홍문王洪文1935~199257) "장칭"과 정치적으로 친밀정치가

장춘차오 (장춘교張春橋 1917~200588) 정치선동 전문가학평론가

야오원위안 (요문원姚文元1931~200574) 정치선동 전문가학평론가

일 시 : 1966.08.08.(05.16?)~ 1976.12월까지 : 1969년, "마오쩌둥"은 공식적으로 "문혁이 끝났다"고 선언하였고, 학생ㆍ노동운동가들 일부를 체포하였으나, 사실상 1976년 "마오쩌둥 죽음ㆍ4인방의 체포"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여러 혼돈변혁을 통틀어, 길게 "문혁기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 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중국 공산당"1981, 이를 "마오쩌둥의 과오가 크다"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나, "문혁 기간에서의 마오의 과오"로 제한하였다.

구 호 신선한 피와 생명으로, 당 중앙을 보위하자! 마오 주석을 무한히 우러르자 신선한 피와 생명으로, 마오(마오쩌둥) 주석을 보위하자!

피해자수 "4인방 재판"에서 법원은 "문혁"기간 중 729,511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중 34,800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추정치 각계에서 많은 명사가 "홍위병"의 학대핍박에 의해 사망하거나, 그로 인한 병사, 혹은 이를 견디다 못한 자살을 하였고, 가족에 의해 고소고발되어 처형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자신의 치부가 가족지인에 의해 드러나는 일이 계속되면서, 가족지인간의 신뢰도는 추락하고, 문화사회면에서, 다소 타인을 불신하는 가치관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라오서 : 유명 작가핍박을 받고 자살          슝스리 : 유학자전 베이징 대학 강사 핍박을 받고 절식하여, 자살           리리싼 : 정치가1920년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비판의 대상이 되자, 음독자살           톈 한 :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 "사인방"이 가사를 "문혁" 이상에 맞게 고쳐, 새로운 국가를 발표하면서, 핍박을 받고, 병사           허 룽 : 군인원수 "홍위병"에 의한 구타폭행 중 병사           주덕해 : 조선족연변 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장(州長) 박해당해 병사

핍박가혹 행위 : "문혁"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의 중국인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홍위병"의 구타 때문에, 4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목숨을 건졌으나, 장애인이 되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였다 "자본주의의 첩자(走狗)수정주의자"로 몰린 인사는 감금강간심문고문 등을 당하는 것이 예사였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수십만 명 또는 그 이상의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거나, 중노동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수백만 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어떤 사람은 구타와 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광시 성"의 어떤 지역에서는 이런 폭력이 극단적으로 변하여, "계급투쟁정치혁명"의 이름으로 "식인 행위까지 일어났다"고 하는데, "당의 고위 역사가들"조차도 "문혁" 기간 동안, 어떤 곳에서는 "반혁명세력"을 학살 후, "소화기관살점을 익혀먹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소수민족 문화의 핍박 : "문혁"은 특히 "소수 민족"의 전통 문화에 파괴적이었다 "티베트"에서는 "티베트인 홍위병"도 참여하여, 6,000개의 사찰이 파괴되었다 "내몽골"에서는 수십 년 전 해체된 "내몽골 인민당의 분리주의자"로 지목된 79만 명의 인물이 박해받았다 그 중 22,900명은 학살로 사망하고, 12,000명은 장애인이 되었다.

"이슬람"이 전통 종교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위구르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꾸란"이 불살지고, "무슬림 이맘"이 물감을 뒤집어 쓴 채, 조리돌림 되었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조선어"로 수업하는 "민족학교"들이 파괴되었고, "족보""홍위병" 강요도 있었지만, "반혁명 세력"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하여, 자발적으로 불살라졌으며, 민족 문화를 보호한다고 지목된 인사들은 핍박학대를 당했다. "윈난 성"에서는 "다이족"의 왕의 궁전이 불살라졌다 또한, 1975"샤덴 사건"에서는 "인민 해방군""회족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는데, 희생자 수는 1,600명에 이른다고 한다.

※ 저우언라이 (주은래ㆍ周恩來ㆍ1898~ 1976ㆍ향년 78세) 정치가ㆍ혁명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총리"진시황릉 발굴"에 중요한 인물시인소설가국가 부주석까지 지낸 역사학자노련한 외교관ㆍ유능한 행정가ㆍ헌신적인 혁명가ㆍ실용적 정치가"시안 사건" 당시 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국공합작 추진추수 봉기광저우 사태 등 주도"마오쩌둥왕자샹"과 함께 "홍군"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마오쩌둥"의 충실한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공산당 내 2인자로 군림했다.

2. 평 가

대부분의 서방ㆍ중국의 학자들은 "문화 대혁명"을 미증유의 재난이며, "중국사의 비극"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이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그 입장에 따라, 비판의 측면은 약간 다르며, 중국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자, "문혁 "시기의 "극좌 투쟁"을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마오 주의자"들 중에는 "문혁"이 있었기에, 개혁개방이 역시 가능했다는 허술한 주장을 펴며, "문혁"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중국의 기성세대들이 이렇든 저렇든 "문혁"을 대부분 겪었으므로 너무 과도하게 매장하고 싶지 않은 바람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① "중국 공산당"의 공식 평가

"중국"에서는 모든 역사 사건에 대해, "중국 공산당"의 입장이 역사해석의 기준이 된다. 그리하여 "문화 대혁명"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평가는 현재 중국의 공식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사인방"의 몰락 이후, 집권한 새 정부가 당면한 과제중의 하나는 어떻게 "문혁"을 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이 사건을 중국의 복잡한 역사지형에서 다룰 것인가 였다.

1981.06.27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건국이래의 몇 가지 역사적 문제에 대한 당의 결의"를 발표하여 건국 이후, 발생한 여러 사건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 문건은 "문혁의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있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잘못된 지도하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은 다시 린뱌오 및 장칭 등의 반동세력 등에게 포섭되어, 당과 인민에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범했다"고 밝혔다. 

이 문건은 현재 "중국 역사 해석"의 주된 뼈대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계속 "중국 공산당"에서 발표되는 문건에서는 "문혁"은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문건은 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문혁의 지도자 마오"와 "혁명의 영웅 마오"를 분리했고, "마오"의 개인적 과오를 "마오의 사상"과도 분리하였는데, 그것은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절대적으로 기여했고, "마오의 사상"이 곧 당의 지도 이념이기 때문이었다.

"마오"를 부정하는 것은 곧 "공산당" 자신의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분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에서 "스탈린" 사후, 일어났던 "격하운동"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에 있어 "마오ㆍ 마오 사상"의 존재는 부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건은 "마오 사상"에 근거한 "공산당의 일당독재ㆍ공산주의 건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문혁"의 총책임자인 "마오"를 옹호하기 위해, "린뱌오ㆍ사인방"을 희생양 삼아 실제보다 많은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 "중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의 사상"은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에 맞게 해석되어, 현재도 중국공산당의 이념인 "중국 특색의 공산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② "신좌파(新左派)"의 긍정적 시각

최근 "중국공산당" 내에서 "문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좌파(新左派)"가 생겨났다. 이들은 "문혁" 기간 동안,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이것이 이후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후의 역사적 노정을 볼 때, "마오"가 "문혁" 기간동안, "자본주의" 지향적인 특권관료제의 폐해를 우려한 것은 옳았다고도 주장한다. "마오"는 이들과 싸우기 위해, "문화 대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또한 "문혁" 기간 동안에 보장되었던 "언론과 결사의 자유"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개방 정책"으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자, 중국의 많은 빈농ㆍ노동자는 "문화 대혁명ㆍ마오 시대"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가오모보"와 같은 빈농 출신 작가는 "문혁"이 농촌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작품에 서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보" 등의 어떤 작가들은 "문혁"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③ 중화민국

"장제스"는 "반공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 기회를 빌려, "문혁"이 중국의 고유한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1966.11월부터 이에 맞선 "중화문명 부흥운동"을 실시하였다. "장제스"는 "타이완ㆍ홍콩" 내의 각종 매체들을 통해, "마오"는 폭력을 숭배하는 나쁜 공산주의자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중화민국은 전통 문화를 보호하고 있는 자유 국가라고 말했다.

3. 영 향

"문화 대혁명"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중국 인민들" 대부분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혁" 기간 동안, 많은 경제 활동이 "계속 혁명 활동이 우선"이라는 논리 앞에 정지되었다. "문혁" 기간 동안, 많은 "홍위병"들이 "베이징"으로 몰려왔다. 그런데 이 비용은 모두 정부가 부담했고, "홍위병"의 우선적 수송은 "철도망"을 마비시켰다. "홍위병"은 여러 역사적 건물ㆍ공예품ㆍ미술품ㆍ서적을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한편 "마오쩌둥 어록"은 "전 인민의 성서"로 우상화되어, 누구나 휴대하여야만 했다.

① 권위 해체ㆍ민주화 요구

"홍위병"에 참여했거나, 간접 체험했던 청년들과 하방 청년들은 부모 세대ㆍ교사들의 타락ㆍ부패, 비리행위를 캐냈다는 자부심이 있어, "기존 권위주의"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반성을 거부하는 "기성세대"와 심리적으로 대립하였다. 1970년대 후반, "문혁"이 종결되고, 1989년 "4ㆍ5 천안문 사건"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 직후, "베이징"의 하방 청년들은 차례차례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조금도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중국 정치와 문화의 무대에 올랐다.

청년 정치 활동가들은 "덩샤오핑"의 경제 근대화에 대해, "정치의 근대화"를 제기했고,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덩샤오핑"은 일단 "마오쩌둥"의 공ㆍ과를 인정하면서, 수용하려 하였지만, "탈권위주의적인 행보"에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문학청년들에 의해, "지하 문학"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고, 새로운 창작 활동의 열기가 넘쳐났다. 이러한 작품들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과 조롱의 성격도 강하게 나타났다.

② 문화 유적ㆍ전통 유산의 파괴ㆍ종교 탄압

"문혁" 기간 동안, 건물ㆍ공예ㆍ서적 등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 공예품들은 각 가정에서 탈취되거나, 혹은 즉석에서 파괴되었다.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산출하기 어렵다. 서양의 목격자들은 "중국 역사"의 수 천 년의 문화유산들이 "단 10년간의 문혁기간동안 파괴되었다"고 추산한다. 또한 이런 파괴는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역사가들은 "문화 대혁명"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비유하기도 한다. "문혁" 기간 동안, 중국의 전통 문화의 지위도 크게 손상되었다. 많은 전통 문화, 예를 들어 점술ㆍ종이 공예ㆍ풍수지리ㆍ중국 전통의례ㆍ음력ㆍ중국고전학(한문)ㆍ ㆍ음력 원단(1월 1일) 등의 위상이 중국에서 약화되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홍콩ㆍ타이완ㆍ한국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후에 대륙에서 복원되기도 하였다.

"종교"에 대한 탄압도 이 기간 동안 심화되었다. "종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으로, "티베트 숨첼링 사원"에서는 "홍위병"들이 몰려와, "사찰"에 불을 지르고, "라마 불교 승려들"을 쫓아내는 폭력이 일어났다.

③ 교육의 해체ㆍ변화

10년 동안 계속된 "문혁" 기간 동안, "교육"이 마비되었다. 이 당시 "대입시험"은 취소되었으며, "대학"은 문을 닫았고, 교수들은 농촌이나 공장같이 생산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하방(下放)"에 처해졌다.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퇴폐 교육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교사ㆍ대학 교수들이 재판과 정죄의 대상이 되거나, 파면ㆍ사퇴 압력을 받고 물러나기도 했다.

대학 교육은 "4인방"이 몰락하고도 한참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농촌의 노동 교화소"로 가야만 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로 중국을 떠나 망명하였다. "문혁" 기간 동안, 도시의 젊은이들은 농촌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되었고, 그곳에서 모든 정규 교육을 포기한 채, "공산당의 선전교육"만을 받는 일도 있었다. 불필요하고, 이론적인 지식을 가르쳐서, 청년층의 취직을 방해하고, 인민의 고혈을 쥐어짠다는 이유로 많은 교사ㆍ대학 교수들이 단죄되기도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진학이나, 더 이상의 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학력은 대부분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육 수준에 머물렀다.

초창기에는 학부모에게 각종 선물ㆍ뇌물ㆍ촌지를 받는 교사ㆍ대학 교수들을 색출하여 조리돌림하고 처벌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일부 "학생 홍위병ㆍ청년들"이 반감을 품은 교사ㆍ대학 교수에 대한 사사로운 원한 보복 등의 악순환도 더러 등장하였다. 많은 생존자들이나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능력이나 기술이 있는 사람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덩샤오핑" 지지자나 서방측 목격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부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세대를 산출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지역별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맹률은 측정되지 않았다. "전장 구"의 몇 개 "현"에서는 "문혁" 이후, 20년이 지난 이후에도 문맹률이 41%나 되었다.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어떠한 "문맹 문제"도 부인해왔다. 이것은 자격 있는 교사들이 "문혁" 기간 동안, 제거되어 빚어진 결과이다. 많은 지구에서는 교사가 없어서, 선발된 몇몇 학생들이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것을 책임졌다.

④ 전통 도덕ㆍ인습의 해체

"문혁"의 가장 중요한 주체 집단은 좌절을 경험한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마오쩌둥"의 사상은 전통 도덕ㆍ관습을 제치고, 중국에서 모든 것들을 이끄는 중심 논리가 되었다. 좌절한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이러한 전통을 인습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성공과 지위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생각하여, "마오쩌둥"의 사상에 적극 동의하지 않더라도, 적극 호응하게 되었다. 

중국의 전통 예술ㆍ사상은 무시되었고, 그 자리에 "마오쩌둥 사상"이 차지하게 되었다.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또는 구타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부모ㆍ교사의 부정부패ㆍ비리 행위를 자녀ㆍ청소년이 고발하는 일도 흔했다. 동시에 쉬쉬해오고 은폐되던 의문의 살인사건ㆍ각종 뇌물수수 사건ㆍ구타폭력ㆍ도박ㆍ음란 행위 등이 당의 지원을 받던 "홍위병"들의 추적과 뒷조사에 의해 드러나면서, 이들의 행동은 정당화되었다.

부모ㆍ교사ㆍ기성세대의 타락한 행동은 이들에게 더욱 명분을 주었다. "문혁 지도부"는 사람들이 문화적 전통들을 비판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것은 "비림비공" 운동 때, 더욱 강조되었다. < "비림비공" 운동 당시, 슬로건 중의 하나 >  "부모는 아마도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오 주석만큼은 아니다."

⑤ 당파적 전쟁

"문혁"은 또한 "공산당" 내에서 여러 당파의 "내부 권력투쟁"을 야기하였다. 이중 많은 것들은 "당지도자의 권력투쟁"과는 상관없이, 지역 당파주의와 사소한 경쟁심이 "혁명"에 관계없이 빚어낸 것이다. 정치적 혼란 때문에, "지방 정부"는 존재하더라도, 집행력과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서로 다른 당파에 속한 이들은 "백주의 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농촌지역에서는 정치적 암살이 흔히 일어났다.

대중은 자발적으로 이러한 "당파"에 가담했고, 다른 "당파"에 대한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런 "당파 투쟁"을 야기한 사상적 차이는 사실 모호하거나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지역적 권한을 장악하는 것이 대중이 참여한 "당파 투쟁"의 유일한 동기였다.

4. 정치적 배경

① "사상 정화" 운동

1949년,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공산당"이 실시한 여러 개혁정책은 중국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전 지배층들은 "반동분자" 낙인이 찍혀, 재산ㆍ모든 기득권을 잃는 것은 물론,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이런 와중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무산계급독재 혁명" 투쟁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공산당" 집권 후, 사상개조를 받고 "관리ㆍ학자ㆍ지배"층에 계속 머무르고 있던 이들이 꽤 많았다.

"중국공산당"은 이렇게 사회 변화로 인해, 새롭게 지배계급이 된 "무산계급"의 불만과 권력욕을 해결하고 "당" 내의 불순요소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대규모의 "사상정화 운동"을 주기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문혁"이전에도 "공산당"이 지도한 "사상정화운동"이 있었으며, 그 방법론은 집권하기도 전인 1930년대 말에 벌인 "연안(延安)"에서의 "정풍운동"에서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즉 이런 군중 운동들에서 초기에는 "무산계급 독재"를 위한 "올바른 사상의 함양"을 외치던 것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당내 투쟁"으로 번졌고, "반혁명세력ㆍ우파"를 숙청하는 것으로 확대되는 식이었다.

②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ㆍ중소 분열

1953년, 소련의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쇼프"는 전임 지도자였던 "스탈린"을 경제를 망친 독재자로 규정하고, 국가적으로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 또한 "평화공존 정책"을 부르짖으며, 서방과 화해를 모색했다. 전 세계 공산주의 최고지도자로 여겼던 "스탈린"이 격하되는 모습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에게 충격이었고,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은 "서방 제국주의 세력"을 "제3세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강한 혁명이 필요하며, "핵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평화공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956년, 발생한 "헝가리 반소 봉기ㆍ폴란드 반소 봉기"로 인해, "소련"의 공산주의권의 지도력에 대해 중국은 의구심을 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소련"을 추종해왔던 중국의 외교방침을 회의적으로 보게 되었고, 또한 "소련"은 1962년에 벌어진 "중인 국경분쟁"에서 "인도"를 지지하였으며, 이는 중국 측을 크게 실망시켰다.

중국은 1950년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MiG-15 제트전투기"와 같은 최신 무기를 "소련"에서 구매했는데, 소련이 공산주의 우방국의 혜택을 주지 않고, 중국에 거액을 청구하여 중국 측을 격분시켰다. 또한 소련은 중국에 약속한 "군사ㆍ경제"원조를 취소했으며, 이 때문에 "인민해방군"의 현대화와 중국의 산업화는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두고, 중국의 지도자들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 격하 운동"은 중국 공산당 수뇌부들에게도 경각심과 긴장감을 주었다. 당 간부들은 언제든 자신도 격하되거나 비판받을 수 있다며 술렁였고, "마오"는 "소련"이 공산주의 노선에서 어긋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마오"는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규정하였고, 소련은 "공산전체주의 국가(공산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 또는 "좌파를 빙자한 파시즘 국가"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또한 "소련"과 같은 "인민"이 소외된 관료제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리하여 "마오"는 중국이 관료의 영향력 하에서, 소련이 "잘못된 길"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대중적 사상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③ "마오쩌둥ㆍ류샤오치"의 갈등

1959년, "마오"는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사임했다. 이어 "류샤오치"가 국가주석,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를 맡게 되었고, 다만 "저우언라이 총리"는 계속 유임되었다. "류사오치ㆍ덩샤오핑"의 개혁은 "마오"가 실시한 "집단화 정책"에서 부분적인 후퇴였지만,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였다. "류샤오치"는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는 대여가 더 좋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기며, 새로운 경제 정책을 실시하려고 했는데,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관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류샤오치"는 "마오"가 실시했던 여러 "도약 정책"을 종식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인민공사"와 같은 집단화를 해체하고, "대약진"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마오"는 당시 실권에서 먼 상징적인 "당 주석" 직만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정책 때문에, "마오"와 "류샤오치" 간에 점점 갈등이 심화되었다. "류샤오치"의 개혁은 성공을 거두어서 "대기근"은 사라졌고, "류"는 인민들뿐만 아니라, 고급 당원들 사이에서도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류"는 "덩샤오핑"과 함께, "마오"를 점진적으로 정계로부터 끌어내리고, 자신이 확고하게 "최고 실권자"로 올라서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1963년부터 "공산주의 교육 운동"을 개시했다.

"공산주의 교육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을 목표로 한 것으로서, "마오"의 강력한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이 운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목표로 한 것이어서, 현행 정치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몇 년 후, "마오"의 주된 지지 세력, 즉 "홍위병"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1963년, "마오"는 "계급투쟁의 이상은 항상 이해되고,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1964년까지, 공산주의 교육운동은 "사청운동(四淸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정치ㆍ경제ㆍ조직ㆍ이념"에서 불순한 것들을 청산해야한다는 것이었고, "마르크스 수정주의 파 류샤오치"를 직접적으로 겨눈 운동이었다.

5. 사회적 배경

① 대약진 운동

1957년, 중국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난 후, "중국공산주의"의 1번째 단계는 "자급자족의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니만큼, "마오"는 "공산주의 이행 속도를 증진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오"는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의 목표는 "식량과 철강 생산을 증산하여, 단번에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계획이었다.

산업발달의 척도가 되는 "철강 생산"을 위해, 전국적으로 각 마을마다 "재래식 고로"를 세우도록 하였다. 또 다른 목표인 "식량증산"을 위해서, 농촌에 존재하던 소규모 협업조직인 "호조조(互助組)"를 해체하고, 이를 대규모로 만들어 집단농업ㆍ집단동원을 위한 "인민공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재앙으로 밝혀졌다. 농민들은 농사보다는 질 낮은 "철"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전 산업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철"들은 목표량 달성에 급급한 관리들이 농민들을 몰아붙여, 농가의 마당에 설치된 "구식 화로"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산업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동시에 "한국전쟁" 참전을 위해, 중국 각지에서 "철"을 조달하여, "농기구 조달 난"에 시달렸고, 이는 농업 생산성 감소로 이어졌다. 1959년, "루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 원수"는 개인적 서한을 보내, "대약진 운동"을 개시한 "마오"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펑더화이"는 "대약진 운동"의 파국은 미숙한 행정도 한몫 했지만, "대약진 운동" 자체가 "소 부르조아 환상주의"라고 규정했다. "마오"는 "대약진 운동"에 관해 자신의 과오를 거듭 인정했지만, "대약진 운동"은 전체로 봐서는 "70%는 옳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방어하였다.

"마오는 "류샤오치ㆍ덩샤오핑"과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일시적인 "국가운영권"을 내 주고 그 반대급부로 "펑더화이"를 고립시켜, "우익 기회주의자"로 규탄하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펑더화이"는 "국방부장"에서 해임되어, 실각하였다.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으로 "마오"는 "국가주석"을 사임하였고, 국가 행정은 새 "국가주석인 류샤오치ㆍ총리 저우언라이ㆍ당 총서기 덩샤오핑" 등이 운영하였다. "마오"는 "당 주석" 자리만 유지하고 있었다.

생산량의 감소와 대기근

1950~1953년 무렵, "한국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대량의 ""이 조달되었다대량의 농기구들이 "화로"에서 "철 생산"을 위해 녹여졌기 때문에, "한국전쟁" 종료 이후 농업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설상가상으로, 지역담당자는 처벌을 면하기 위해, "허위생산량"을 보고하여 문제가 커졌다수십 년간 계속된 내전중일전쟁한국전쟁으로 타격을 입었던 중국경제는 회복되는 듯 하다가, 다시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철강 생산량"은 연간 520ton에서 1,400ton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처음의 목표는 비현실적으로 연간 3,000ton의 철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후에 더 현실적인 2,000ton으로 조정되었다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은 대부분 ""이 떨어졌고, 처음에 목표한 산업발전을 위한 "기자재"로 쓰기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그동안 "식량생산"에서도 문제가 불거졌는데, 농민들이 "" 생산에 메달린데다, 이런 ""생산을 위한 연료로 쓰기 위해 목재를 남벌한 결과, 1958년부터 여름마다 홍수가 나서, 농경지는 침수되었다.

또한 "대약진 운동"과 함께 벌어진 "제사해 운동"에서는 참새를 "유해조"로 지정해서 대대적 퇴치운동을 벌였는데, 이 때문에 생태계의 균형이 깨져, 여름에 병충해가 창궐하게 되었다여기에다가 "집단화된 농업"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고, 더욱이 검증이 안 된 "새로운 작황 법"을 도입해, 종자를 밀집되게 심었다가, 도리어 생육에 지장만 주었다그리하여 건국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의 "기근"이 발생했다더욱이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하였는데도, "중국 정부""소련"의 기술 도입료와 차관 상환을 곡물로 하여 해외 수출을 계속하였다기근은 매우 심각했고, 이때 기근으로 사망한 이들은 2,000~ 3,000만 명으로 추산된다이 기근은 1961년까지 계속되었다.

노동자 불만 확산

1957. "반 우파투쟁" 때부터 도시에서부터 서서히 "혁명 사조"가 전국적으로 범람하기 시작했다1950년대 중반부터, 식량 생산이 감소함에 따라, 생계 난을 겪던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노동계층 중 대다수는 "청나라"가 몰락하기 이전부터 하층민이었거나, 노비에서 석방된 이들이 도시로 흘러들어와 형성한 계층이었다이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자본가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더욱 증폭시켰다시골에서 재산을 쌓아두고 풀어두지 않는 지역 유지들과 당내의 "부르주아들"에 대한 불만이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특히 "상하이의 극좌 문화"1958년에 이미 달아오르기 시작하여, "문혁"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상하이"에서는 1958년부터 노동자들 사이에서 먼저 "마오쩌둥 사상" 학습 운동이 퍼져나갔다15,000개에 이르는 "학습 소조(모임)"이 등장했고, 연인원 20만 명이 여기에 참여했다그와 동시에 전 시민의 "혁명 시가(詩歌)" 운동도 진행되었다.

예술작품은 모두 "혁명의 구호"여야 마땅하다고 주장되었다노동계층의 불만은 퇴폐타락한 사회문화 전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야오원위안"은 신문 지상에서 예술 시를 비판하고,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모두 혁명의 구호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스스로 지은 "혁명 시"를 발표했다자구책이 없이 불만을 품던 노동계층은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에 열렬히 호응하였다 "우리 노동자의 뼈는 단단하다. 총검 아래에 강산을 굴복시켰다 백기를 뽑아내고 적기를 꽂으니, 혁명의 기백이 천지를 뒤엎을 듯하다 쇳물은 붉은 빛을 번뜩이며 콸콸 흐르니, 영국과 미국은 놀라 자빠지리라!"

1950년대 후반, "상하이"의 프롤레타리아 문예 창작자들은 어떤 도시보다도 많은 극좌 문화의 작품을 만들었다예를 들면, 후일 "문혁" 10년 간 "장칭"의 지도 아래 창작된 "혁명 모범극"은 당시 중국인이 관람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극이었는데, "문혁" , 유일하게 상영이 권장되었던 그 8편의 "모범극" 가운데, 6편은 "상하이" 작가의 원작을 수정한 것이었다현실에서의 불만을 해소할 방법이 없던 노동자 계층은 이들의 작품을 탐독하며, 울분을 해소하였다.

"문혁" 속에서 "상하이""극좌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당시 중국 유일의 문학 월간지 "조하(朝霞)""상하이"에서 창간되어, 수많은 혁명 문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등장했다. "야오원위안"은 그들의 선배이자, 전범이었다.

좌절한 공산주의 지식인과 청년들

195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의 "공산주의 사회"가 조금씩 안정되면서 청년층의 성공출세의 수단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일부 "공산당" 고위층의 아들들에게 그대로 상속되었고, 기회의 평등을 외치며,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지만, 그 대상은 주로 "공산당" 간부들의 딸들이었다한편 "홍군"이나 "국공내전" 등에 참여하지 않던 시골 지역의 유지들은 "청나라" 또는 그 이전부터 세습되던 토지와 건물로 어느 정도 자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공산당"에 충성하거나,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어오던 "좌익"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좌절하기 시작하였다이들은 일부 "공산당" 고위층의 반 혁명성반당 행위혁명에 참여하지도 않고, 기존의 자산을 보유하면서도 "당 간부직"을 유지하는 지역 유지들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털어놓기 시작하고, 그들보다 훨씬 "극좌적인 방법"을 택해 보복하고자 하였다.

1966.05,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학술적으로 권위 있는 부르주아 반동 입장들을 철저하게 폭로하고, 학술계교육계언론계문예계와 출판계의 부르주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여, 이러한 문화영역에서 영도권을 탈취하자""516 통지(通知)"가 제출되면서부터, 1976"마오"가 사망할 때까지, 중국을 무정부적 상태로 몰아넣게 되었다좌절한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좋은 학력자당 고위직을 세습하는 간부 자녀들시골의 지역유지들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처단을 실시하였다.

한편 대학을 졸업하거나, 기술을 익히고도 주임서기 급에서 올라가기 힘들었던 실무자 층의 좌절 역시 분노로 변해갔다"문혁"의 발동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 집단은 좌절을 경험했던 젊은 지식인들이었다이러한 분노는 "예학상장제례" 등을 강조하던 "유교사상"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분노로도 이어졌다"청대"의 고위 관료들의 무덤사당은 퇴폐한 반동으로 몰려 파괴되고, 부관 참시되었다"유교 사상"은 비록 철저히 부서졌지만, 신분제도계급체계를 여전히 정당화하고, 여성피지배층을 학대하는 등 인간의 평등을 억압하는 "악질 제도"라고 비판받아, "유교"와 관련된 사상가들, 학자들의 묘소석물저서 등은 모두 파괴소각되었다이러한 청년들의 분노파괴는 "문혁"이후의 권위 해체 분위기로 이어졌다.

"문혁"이 공식 종식되면서, 찾아든 "덩샤오핑"에 의한 사상해방운동은 한동안 "개성의 해방인성과 인권의 존중인간의 심리성과 잠재 능력의 발휘"를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여 예술의 비예술적 요소의 침입을 막고, 예술로 하여금 예술로 환원하도록 만들었다이는 "문혁" 기간 탄압받던 "우파 지식인"들이 복권되고, "극좌 사상"에 대한 사회적 반성 사조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 한 것이다.

직접적인 계기 : 해서파관(海瑞罷官)조반유리(造反有理)

 해서파관 : 해서가 파면되다명나라 청백리 "해서""암군 가정제"에게 파면된다는 것

 조반유리 : 사회와 정치와 문화를 뒤집어엎고, 대량숙청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

1959년 말, "우한(베이징 부시장역사가)" 역사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해서가 파면되다)" 발표하였는데, 이 극은 "명나라" 때의 실존 청백리인 "해서(1515~1587)""암군 가정제"에게 파면된다는 내용이었다. "마오"는 처음에 이 극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그러나 1965"장칭(마오 4번째 부인)"과 그녀의 피후견인인 "야오원위안(당시 상하이의 신문인 "문회보(文匯報)"의 편집장이었으며, 그때까지 무명 인사였다)"은 이 희곡을 비판한 논평을 썼다그들은 이 희곡이 "독초"이며, "마오"를 폄하하기 위한 것이고, "황제""마오", "해서""펑더화이" 은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이 논평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많은 신문들은 이것이 "언론탄압의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여,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였다한편 "펑전(베이징 시장)""우한"을 지지하여, 이 비판이 지나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그리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문화혁명 오인소조(5人小組)"를 구성하였고, 이 소조는 "현재 학술적 문제에 관한 제강" 또는 "2월 제강(二月提綱)"을 발표하여, "해서파관"에 관한 논란을 정치문제가 아닌 순수한 학술문제로 한정하려고 하였다그러나 "장칭""상하이"에서 활동하면서, "문예계가 일부 반당, 반공산주의의 불순세력의 음모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여기에 국방 부장이었던 "린뱌오"가 합세하고, 세를 불리기 시작하였다.

1966.05, "장칭야오원위안"은 다시 "우한펑전"을 비판하는 논평을 발표하였다05.16, "마오" 주재 하에서 당 정치국은 "문혁"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 혹은 "516 통지(通知)"를 발표하였다이 통지에서 "펑전"은 날카롭게 비판되었고, "5인 소조"는 해체되었다이 통지는 "펑전5인 소조""표리부동한 자세로 마오쩌둥 동지의 우한에 관한 교시와 마오 주석이 이룩한 위대한 문화혁명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하였다1년 후, 1967.05.18., "인민일보"는 이 고시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하에 작성된 위대한 역사적 문서"라고 칭송하였다

1966년 이후, "정치국 회의"에서 새로운 "문혁 소조(小組)"가 구성되었다05.18, "문혁 소조""린뱌오"는 한 연설에서 "마오 주석은 천재이고, 마오 주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다. 마오 주석의 한마디는 다른 정치인의 만 마디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하며, "마오"에 대한 숭배를 학생들이 나서도록 지시했다이때 "장칭린뱌오"는 이미 실질적인 권력을 잡기 시작하였다.

05.25, "녜위안쯔(베이징 대학 경제학과철학과 교수여성 당서기)"는 대학 당국다른 교수들이 우파또는 반당(反黨)분자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서 붙이고, 대학생들이 기존의 체제 내 탄압을 받으며, 어렵게 연구해 온 "온건파 학자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데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며칠 후, "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적으로 회람해 반영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것을 "이번 문화 대혁명의 1번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이다"라고 추켜 세웠다05.29, "칭화 대학부속 중학교"에서 "마오"1번째 "중학생 홍위병"을 결성시켰으며, 이들은 "칭화 대학"을 무더기로 찾아가 교문을 무너뜨렸다이러한 것들은 모두 "마오"가 적지식분자를 응징하고, 무력화시키려는 수단으로 치밀하게 결성된 것이었다.

1966.06.01., "인민일보(공식적인 중국공산당 기관지)""자본주의자들과 그의 앞잡이, 그리고 자본주의적 지식인들"을 반드시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곧 대학 총장다른 온건파 지식인을 겨냥한 대대적인 "마오 운동"이 시작되었다1966.07.27, "홍위병 대표단""마오"에게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 "조반유리(造反有理)사회와 정치와 문화를 뒤집어엎고, 대량숙청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마오"는 이에 대해 전적인 지지동의를 표하였다.

08.08, "인민일보""마오"의 짧은 논평 "사령부를 폭격하라- 나의 대자보"가 실렸다여기에서 "마오"는 반혁명우파(실질적으로 류샤오치덩샤오핑)에 대한 투쟁을 전 인민에게 부르짖었다이로써 "문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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