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국공합작"은 "코민테른"의 요청을 받아들인 "쑨원 (손문(孫文)ㆍ중산ㆍSun Wenㆍ1866~1925ㆍ59세)"의 주도로, 소련 원조ㆍ혁명의 대중적 기초마련을 하려는 "쑨원"과 "중국 공산당 (코민테른 대표의 지시에 따른)"과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1924.01월 합작 후, "공산당"은 "5ㆍ30사건ㆍ사지사건" 등에서 당세를 팽창시켰고, "국민당"은 "광둥 성" 지배권을 얻고, 대중의 조직화에도 진전을 보았지만, "쑨원" 사망 후, "국민당"의 반공ㆍ우파세력의 반발로 합작이 결렬되었다.
1. 국공 합작 (國共合作) : 중국 국민당 (장제스)ㆍ공산당 (모택동) 사이의 연합 전선
• 제1차 : 1924.01~1927.07월 : 군벌타도를 위해 협력 → "공산당"이 독자적인 군대가 없이,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합작을 결정하고,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는 것
• 제2차 : 1937.09~ 1945.08월 : 일본과 싸우자 → 자신의 무력을 갖추게 된 "공산당"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국민당"과 대등하게 합작했다는 것
• 제3차 : 제의 → 1981년,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 국민정부"를 향해, 평화적 통일을 위한 "3차 합작"을 제의한 바 있다.
① 제1차 국공 합작 (1924.01~ 1927.07)
1924년부터 "통일전선 전술"의 일환으로 "중국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국민당 개조"를 꾀하는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1927년, "상하이"에서 "4ㆍ12 사건"이 발생하여, 결렬되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회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세력이 미약한 동안, 일시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제휴하여, "제국주의를 몰아낸다."는 방침이 마련되었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 대표 마링"의 지시 하에 "중국 국민당"과의 합작을 결의했다. 한편 "국민당"에서는 "소련의 원조ㆍ혁명의 대중적 기초 마련"을 위해, "쑨원"이 "공산당"과의 합작을 결정했다.
1924.01월, "국민당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산당원은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기"로 했다. 합작 후, "공산당"은 "5ㆍ30사건ㆍ사지(沙基)사건ㆍ북벌(北伐)" 등을 통해 당세를 급속히 팽창시켰다. 또한 "국민당"은 합작 후, "소련의 경제ㆍ군사적 원조"를 얻어, "광둥 성(廣東省)"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 "대중의 조직화"에도 진전을 보았다. 그러나 합작 후, "공산당"의 세력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자, "쑨원" 사망 후, "국민당"의 반공 우파세력의 반발로 합작이 결렬되었다.
"북벌"의 진행과정에서, "국민당"은 "4ㆍ12정변(1927)"을 계기로, "장제스(蔣介石)"의 반공적인 "난징(南京)정부와 "국공합작"을 견지하려던 "왕징웨이(汪精衛ㆍ왕정위)의 "우한(武漢)"정부로 갈라졌다. 결국 "우한 정부"에서도 1927.07월 "공산당원"을 축출하여 합작은 결렬되었다.
② 제2차 국공 합작 (1937.09~ 1945.08)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당ㆍ국민당"이 "일본 제국"에 대한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연합한 것으로,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1945년까지 지속되다가, "일본군 점령지"의 배분 문제를 놓고 결렬되었고, "제2차 국공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 정지ㆍ공동 항일"의 공동목표를 위한 것으로, "2차 합작"으로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했고, 전투 구역과 "일본군" 후방에서 활약하여 세력을 크게 신장했다. 이에 "국민당"은 "반공작전"을 전개했고, "1941년 신사군 사건ㆍ1943년 국민정부군의 공산당 근거지 포위"로 양당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종전 후 공동 목표가 사라지자, "합작"이 결렬되었다. "1차 합작"의 결렬 후, "공산당"은 농촌에 "소비에트 건설"을 추진했고, "국민당"은 몇 차례에 걸쳐 "소비에트 지역"을 포위ㆍ공격했다. "제5차 공격"을 견디지 못한 "공산당 홍군(紅軍)"이 "대장정(大長征, 1934.10~ 1935.11)" 끝에 "산시(陜西)" 북부지역으로 옮겨가자, "국민당 정부군"은 "제6차 공격"을 준비했다.
한편 이 시기, "일본군"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거국적인 항일여론이 일고 있었다. "공산당"은 일찍이 "대장정" 도중에, "거국적인 항일"을 호소하는 "8ㆍ1선언(1935)"을 발표하고, "국민당"에 제휴를 제안했다(1936).
"내전 정지ㆍ공동항일"을 요구하는 "시안(西安)사건(1936)"을 계기로 "국공 내전"이 정지되었고, 양당의 담판 끝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합작"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공산당 홍군(紅軍)"은 "국민정부군 팔로군(八路軍)ㆍ신사군(新四軍)"으로 편성되었다. 합작을 통해, "공산당"은 기반을 공고히 하여, 궁극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2. 국공 내전 (國共内戰): 공산당ㆍ국민당 사이 내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해방전쟁)
• 제1차 : 1927.07~ 1936 ㆍ중국 공산당 공농홍군 (약 8만6천명) : 지휘관 - 모택동ㆍ중국 국민당 국민혁명군 (약 70만 명) : 지휘관 - 장개석 • 결과 : "제5차 공격"을 견디지 못한 "공산당 홍군(紅軍)"이 "대장정(大長征, 1934.10~ 1935.11)" 15,000 km에 달하는 중국 공산군(홍군(紅軍))의 역사적 대 행군 (1934.10.15 ~ 1935.11)ㆍ10만 명 이상 (생존율은 고작 10 %)→ 홍군의 옌안 정착 성공
• 제2차 : 1946~ 1949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 섬으로 옮긴 시기) → 결과 :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ㆍ"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은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
① 배 경
1911년, "청조"가 무너진 이후, 중국은 "위안스카이"로 대표되는 "군벌의 시대"로 본격 돌입하게 된다. "쑨원"은 "군벌"이 지배하는 중국 각 지역에서 "군벌 지배"를 종식시키고,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서방 국가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쑨원"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한 "소련"에 눈을 돌려, 1921년 도움을 요청하였다.
"레닌"은 이에 응하여, 1923년 대표단을 "상하이"에 파견하였고, "쑨원ㆍ레닌"이 교류하면서, "중국 국민당ㆍ중국 공산당"은 "군벌 세력"으로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하고, 외세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표 아래,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게 되었다.
"쑨원"은 "군벌"과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제스"를 비롯한 장교들을 "소련"으로 파견하여, 군사기술을 습득하도록 하는 한편, "광저우" 교외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워, 자체적으로 현대적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는 "공산주의자"도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국민당" 내에 "공산당"의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이즈음 "저우언라이"는 "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교관이었고, "마오쩌둥"도 "국민당"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요컨대,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정당 안의 또 다른 정당"으로 활동하고 세력을 키워 나갔다.
② 북벌 (北伐ㆍ1926~1927)ㆍ국민- 공산당 분열
1925년, "쑨원"이 죽고, "장제스"가 "국민당"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장제스"는 "군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국 북부"에서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였다. 당시 "국민당"은 "우파ㆍ좌파"로 분열되었고, "공산당"이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926.0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혁명군" 내의 "공산당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국민당 내 우파(장제스 계열)와 좌파(공산당 계열)"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민중의 지지로, "후난 성ㆍ후베이 성ㆍ푸젠 성ㆍ저장 성ㆍ장시 성ㆍ안후이 성"의 "6성"을 "국민당 세력" 안에 편입시키며, "우페이푸(오패부)ㆍ쑨추안팡(손전방)" 등의 "군벌"을 격파하였고, "장쭤린(만주 군벌)"과 대치하였다.
1927.03월, "상하이"의 노동자들이 무장봉기하여, "장제스 군대"를 맞아들였다. "장제스"는 이를 자신에 대한 "민중의 지지"로 확신했고,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상공인ㆍ부유층이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부추기자, 1927.04.12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ㆍ처형을 벌여(4ㆍ12 사건), "중국 공산당"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이로써 "제1차 국공 합작"이 결렬되고, "국민당ㆍ공산당"이 분열되어, "1번째 국공 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③ 제1차 국공내전 (1927.07~ 1936)
"장제스"는 농촌 지역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키우고, "중화 소비에트공화국"을 구성하는 "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를 "토공전(討共戰)"이라 한다. "공산당"의 군사 조직인 "홍군(紅軍)"은 종종 "홍비(紅匪)" 또는 "공비(共匪)"로 불렸다.
이러한 대규모 "토벌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홍군"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력ㆍ물자가 부족한 "홍군"이 철저한 "게릴라식 유격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규모 토벌전"에서 "국민혁명군"은 종전의 토벌 방식을 바꾸어, "대규모 진지ㆍ토치카"를 짓고, 지구전적인 "진지전"을 펼쳤는데, "홍군"은 이 전술에 말려들어, 수도인 "장시 성"을 잃게 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 전술"을 택해, 중국 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대장정"을 감행하고, "국민혁명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를 찾게 된다. "홍군"의 주력은 무사히 "즈단 현"에 도착하고, 그곳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군벌" 출신의 "장쉐량(張學良ㆍ장학량)"과 대치했는데, "장쉐량"은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정신에 경도되었다. 마침내 1936.12월, "장쉐량"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설득,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 전선"이 성립하게 된다.
④ 중일 전쟁 (1937.07~ 1945.09) 만주사변→ 진주만→ 항복
1937년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공산당ㆍ국민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홍군"은 "제8로군ㆍ신사군"으로 개편되어,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지만, 사실상 "장제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일전"을 벌였다. 이 항일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일본군"에 패하여,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갔고, "홍군(제8로군ㆍ신사군)"은 세력이 점차 커졌다.
⑤ 제2차 국공내전 (1946~ 1949)
"일본"이 패망한 직후,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공산당ㆍ국민당" 사이에는 "일본군의 무장 해제ㆍ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공산당ㆍ국민당"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1945.08월부터 약 1달 반 동안 "충칭"에서 "장제스ㆍ마오쩌둥"이 만나 회담을 가졌고, 1945.10월 "내전"을 피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에 관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의 갈등이 더욱 커지자, "미국의 마샬 장군"이 중재에 나서, 내전을 피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이 1946.01월부터 시작되었고, 어느 정도 합의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이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고, "공산당"이 이에 항의하면서 결국 "공동 정부" 구성에 실패하였다.
1946.06월, "국민혁명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초기에 "국민혁명군"은 "병력ㆍ장비ㆍ보급" 등 모든 면에서 "중국 인민해방군(홍군)"보다 우세했고,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다. 특히 1947.03월, "후쫑난(胡宗南ㆍ호종남)"이 지휘한 20만의 병력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인 "옌안(산시 성ㆍ중국 공산군 대장정의 종착지ㆍ혁명의 성지)"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혁명군(→1947.12월ㆍ중화민국 국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ㆍ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ㆍ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 가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1948.11월, "린뱌오"가 지휘한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중화민국 국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요심 전역)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졌다. "인민해방군"은 1949.01.31일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 "창 강(양쯔강)"을 건너, 04.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고, 05.27일 중국대륙 최대도시 "상하이"까지 손에 넣었다.
1949.10.0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인민해방군"은 10.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30일에는 "중화민국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重慶)"마저 함락시켰다. 12.10일, "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청두(成都)"에서 "타이완(臺灣ㆍ대만)"으로 탈출했고, 12. 27일 "인민해방군"이 "청두"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후, "진먼 섬ㆍ타이완 섬"에 대한 "중화민국 정부"의 지배가 공고해졌고, 대륙에서 패한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길 수 있었다. (200만의 군인ㆍ중앙은행의 금괴ㆍ고궁박물원 (베이징)의 보물을 가져감)
1949.10월, "인민해방군"은 "진먼 섬(金門島ㆍ중국 대륙~ 타이완 섬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를 공격하여 "고령두 전투(1949.10.25.~10.27)"를 벌였으나, "중화민국 국군"에 대패하였다. 1950년, "하이난 섬(海南島)" 전투(1950.03.05~04.30)와 "홍콩" 근해의 "완샨 군도(萬山群島) 전투(1950.05.25~06.27)에서 "중화민국 국군"이 "인민해방군"에 잇따라 패퇴하였고, "상하이" 근해의 "저우산(舟山)군도(1950.05.16.)ㆍ다천 섬(大陳島ㆍ1955.02.11)"에서 "중화민국 국군"이 철수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경계가 만들어졌다.
1958년, "인민해방군"은 무려 47만 발에 이르는 포탄을 "진먼 섬"에 쏟아 부었으나, 점령하지 못하였고(진먼 포격전), 1979.01.01일 "미국"과 수교하기 전까지 20년간 이 섬에 대한 간헐적인 포격을 계속하였다.
※ 린뱌오 (임표ㆍ林彪ㆍ1907~ 1971ㆍ64세) 중화인민공화국 군인ㆍ정치가ㆍ팽덕회보다 9살 아래
홍위병 책임자ㆍ1968~ 1971년까지, 부총리 겸 총리 권한대행ㆍ국방부 부장과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역임ㆍ"임표"는 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지명한 "모택동"에 속아,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었는데, 그는 "모택동"에게 아부하기 위해, 선배 "팽덕회"를 매장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홍위병 난동"이 끝난 뒤, 필요 없게 된 "임표"는 "모택동"에게 버림을 받게 되자,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소련"으로 비행기로 도주 중, "내몽골"에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
※ 병력 변동 추이
중화민국군 : 430만 명 (1946년)→ 365만 명 (1948년)→ 149만 명 (1949년)
인민 해방군 : 120만 명 (1945년)→ 280만 명 (1948년)→ 400만 명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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