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辛亥革命)ㆍ제1차 혁명ㆍ공화혁명"은 1911.10월, "신해 년(辛亥年)"에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혁명이며, "쑨원"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쌍십절"로 기념한다.
1. 중국 혁명 진행
사천폭동 (1911)→ 우창 봉기ㆍ신해혁명 (1911)→ 베이징(北京) 정부 (1912)ㆍ국민당 창립ㆍ위안스카이 "대총통"취임→ 제2혁명 (1913)→ 제3혁명 (1915) → 5ㆍ4 운동 (1919)
※ 국경절 (國慶節): 매년 10.01일 (1주일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 1949.10.01일,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이 중화민국을 몰아내면서,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① 1911.05 : 사천 폭동 (四川暴動ㆍ쓰촨봉기)
1911.05월, "청나라"는 "철도국유령"을 발표하여, 그때까지 민영(民營)인 "철도"를 담보로, 열강의 금융자본 연합체인 "4국 차관단"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빌려,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대해, "후난(湖南)ㆍ후베이(湖北)ㆍ광둥(廣東)" 등에서 광범위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쓰촨(四川)"에서는 대규모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② 1911.10 : 우창 봉기 (武昌蜂起)
1911.10월 초, "청나라"가 "쓰촨 폭동"을 토벌하기 위하여, "후베이신군(湖北新軍ㆍ호북신군)"을 동원하자, "우한(武漢)지구"에서 "문학사(文學社)ㆍ공진회(共進會)"등을 조직하여, "신군(新軍)공작"을 전개해온 "혁명파"는, 10.10일 "우창"에서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 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신해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되어,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省)"에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1912.01.01,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南京)정부"가 수립되어,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지도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이 발족하였다.(삼민주의 : 민족주의ㆍ민권주의ㆍ민생주의) 이보다 앞서, "청나라"는 "베이양(北洋ㆍ북양)군벌"의 "위안스카이(袁世凱ㆍ원세개)"를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하였으나, "영국"의 중재로 화평이 진행되었다. 열강측이 압력을 가하고, 많은 지방에서 실권을 장악한 "혁명정부"의 내부에 숨어들어간 "입헌파"의 책동도 있었으며, 또한 "혁명파" 내부의 대립도 있어서, "혁명군"은 "북벌"을 중지하고, 남북화의(南北和議)가 진행되었다.
③ 1912.03 : "위안스카이"의 "베이징(北京)" 정부ㆍ국민당 창립ㆍ"반 혁명파"로 진화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황제(선통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이양 받았고, 3월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北京)정부"를 조직하였다. 이 때부터, "혁명"은 급속하게 "반혁명"으로 전화(轉化)되었다. "정당"이 난립하는 중에, "혁명파"는 "혁명동맹회"를 개조하고, "소당파(小黨派)"를 합쳐서, "국민당(國民黨)"을 창립, 의회정치의 실현을 희구하였으나, 열강과 입헌파의 지지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에게 무력탄압을 가하여, "제2혁명"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④ 1913.07 : 제2혁명ㆍ1915.12 : 제3혁명
"혁명파"는 "제2혁명(1913.07)ㆍ제3혁명(1915.12월)"을 일으켜, "위안스카이 정권"과 대결하였으나, "반제(反帝)ㆍ반봉건"의 과제는 해결되지 않고, "5ㆍ4 운동" 이후의 혁명으로 미루어졌다.
⑤ 1919.05 : 5ㆍ4 운동 (五四運動)
1919.05.04. 중국 베이징(北京)의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ㆍ중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이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지만,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사건으로 평가한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열강이 중국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 조항"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일본"은 "원세개"와 타협하여, "중국"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중국" 내에서 군사적 행동과 군사기지 설치 등의 승인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ㆍ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격분한 "베이징" 학생은 05.04일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들어 반대집회를 벌였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 반대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베이징 대학"을 중심으로 한 "문학혁명(文學革命, 1917)" 이후의 "신문화운동"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5ㆍ4 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ㆍ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 군벌 정부"는 즉시 탄압에 나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학생들은 산발적으로 저항하였는데, "톈진(天津)ㆍ상하이(上海)ㆍ난징(南京)ㆍ우한(武漢)"에까지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의 불매(不買) 등을 외쳤다. 06.03일, "군벌 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06.03일의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06.05일부터 "상하이"와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전선조직"이 성립되었다. 그러자 "군벌 정부"도 "파리평화회의의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지식인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조선의 3ㆍ1운동"에 고무되었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도 있었다. 그 후 "공산주의 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코민테른"은 "보이틴스키(G.Voitinsky)"를 밀사로 중국에 파견하여, 당시 중국의 공산주의 중심인물이었던 "이대교ㆍ진독수"를 종용하여 "공산당"이 결성되도록 하였다. 이에 "5ㆍ4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학생을 대상으로, 조직적인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 "쑨원"의 사임과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취임
1900년, "의화단(義和團)사건" 이후, 열강들의 침략이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청나라 조정"은 정치개혁을 꾀하는 소위 "신정 운동(新政運動ㆍ중앙집권 체제의 운동)"을 일으켰으나, "납세 거부ㆍ기독교 배척"을 위시한 "대중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 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정세 하에서, "쑨원"은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혁명파"를 지휘, "반청(反淸)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11년, "청조"는 "철도국유령"을 내려, "민영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사천 봉기"로 결국 발전했다. 10.10일, 이를 계기로 "혁명파"가 공작으로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1달 만에 "14성(省)"이 호응하여 궐기했고, 12월 말에는 "17성(省)"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1912.01월,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조"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선통제"의 퇴위로, "청조"를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
※ 쑨원과 군벌의 관계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조직"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직위를 살펴보면, 1912.01월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臨時 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1917년 "광주"에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었다.
1921년, "비상 (임시)대총통"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가 된다.
2. 1911.10 : 신해혁명(辛亥革命)ㆍ제1차 혁명ㆍ공화혁명
("제1혁명"이라고도 하고,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이라고도 불린다.)
1911년, "신해 년(辛亥年)"에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혁명이며, "쑨원"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신해혁명"은 20세기 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쌍십절"로 기념한다.
이 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함으로써, 2000년간 계속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끝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여, 새로운 정치체제인 "공화정치"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사건" 이후, "청나라"의 유럽 열강에 대한 굴종적 태도는 한층 더 심해졌으며, 이에 따라 국민의 생활은 더욱 고통이 가중되었다. 즉, 중국은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 위기가 심화되었으므로, 1905년 각 지역의 반정부 세력은 중국 최초 정당인 "중국 혁명동맹회(革命同盟會)"를 결성하였다.
"청나라"도 이에 대항하여, "중앙집권 체제의 운동(新政運動)"을 도모하였으나, 사회적 모순은 격화되고, "신정반대ㆍ세금거부ㆍ그리스도교 배격" 등의 대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향신(鄕紳ㆍ지방 유력자)"와 "입헌파(立憲派ㆍ상공업계를 기반으로 하는 자)"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여, "국회 속개(速開)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화교(華僑)" 외에 "재일본 유학생ㆍ국내 지식 청년층"을 참가시킨 "혁명파"는 "중국동맹회"를 결성하여 비밀결사인 "회당(會黨)"과 손잡고, "민주공화제"를 지향하는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곧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제제(帝制)"의 야심을 품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3. 1913.07 : 제2차 혁명 실패ㆍ"위안스카이"를 타도 혁명→ 1915.12 : 제3차 혁명 실패
1913.07월, "국민당"에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려는 운동하면서, 혁명을 호소하여, 봉기했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고 하며,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21개조" 요구 수락을 위시해 매판성을 드러내어, 이런 "위안스카이"의 독재 정치에 민중은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고 부르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내전ㆍ군벌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4. 영 향
① 국외 영향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1911.12월 말, 그동안 "청"에 복속하던 "외몽고ㆍ티베트"가 혁명에 영향 받아 독립을 선언했다. "외몽고"가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ㆍ일본"은 "외몽고"를 제외한 "북중국"에서 양국 간 동서분계가 필요하여, 1912.07.08일 "러시아ㆍ일본" 간에 체결한 "제3차 러일협약"에서 양국은 "베이징"을 지나는 경도선을 경계로 "동서"를 각각 "특수 이익지역"으로 규정했다.
반면, "티베트"는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티베트인"들이 각지에 봉기해, "중국군"을 축출하고, 13대 달라이라마(아왕 로상 툽텐 갸초)의 지도 아래, 1917년에 티베트 영토의 거의 전부를 수복했다. 이어 "달라이라마"는 "영국"의 원조를 받아, 국왕 겸 교주로서, "정교일치"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티베트"에 겉으로는 회유책을 구사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분쟁을 일으켰다.
"청조" 발상지였던 "만주"도 "청조" 몰락과 함께, 열강이 쟁탈하는 대상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중앙정부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지방 군벌"이 "만주"를 차지하자 열강은 이 지역에 명목상으로는 "중국 영토"로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무주공산" 일종이라고 인식했다. "일본"은 만주에서 정치상ㆍ경제상 기반을 꾸준히 확충해 나아갔다. 이 밖에 "신강 지역"에는 "신해혁명" 발발 당시, "양증신"이 도독이 되어 "신강"을 지배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② 국내 영향
"중화민국 성립"으로 "황제 체제"가 무너지면서, "혁명"의 영향은 "자유와 민주주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집권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 통치ㆍ복고 풍조ㆍ존공(尊孔) 운동"이 위세를 떨쳤고, "위안스카이"의 사후, "베이징 군벌 행정부"를 장악하려는 여러 "군벌" 세력 간 혼전이 만성화하였다.
중국 정치중심지는 "군벌 세력 간 혼전"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 하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국내 문제와 대외 문제는 모두 불안정한 상황이 끓어오르다가 넘쳐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시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신해혁명"을 계기로 국내에서 사상과 문화는 대변한다."천두슈"를 위시한 지식인들은 "신문화 운동"을 주도하여, "기존 유교 비판ㆍ문화혁명ㆍ서구 과학과 민주주의 숭배"를 주창해, 특히 학생ㆍ청년층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사상계ㆍ문화계"에서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5. 평 가
"쑨원"을 중심으로 한 "중국동맹회"가 주축이 되어, "신해혁명"을 일으켰으나, 혁명 성공은 오직 "혁명당"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입헌파"를 중심으로, "신군ㆍ화교ㆍ회당"을 비롯하여, "구 관료"의 참여가 있어서, 성공하였으므로, 처음부터 철저한 혁명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혁명당" 목표였던 "삼민주의 이념" 중, "민족주의"를 보더라도,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는데, 혁명 후 "만주족 청 조정"을 타도하기는 하였으나, 곧 "5족(族) 평등"을 내세워, 그 뜻이 약화됐고, "제국주의의 반식민지" 하에 있는 중국 위상을 바꾸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쑨원"은 혁명 성공을 목적하여, "제국주의"와 손잡고 "청조" 당시에 한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인정하여야 했다.
그리고 "민권주의"는 우선 "중국사" 이래 "전제군주"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간주할 수 있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첫 번째이면서 평화스럽게 황제를 물러나게 하였던 점은 큰 의의가 있으나, 마지막 황제를 향한 예우를 비롯해, 소위 "황실 우대조건"은 혁명 의의를 반감시켰다. 또한, "민생주의"가 내세우는 자본의 절제와 지권의 평균 문제는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이를 강령으로 제정할 당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해서, 혁명 후 "삼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란 더욱 어려웠다.
혁명 후, 새로운 "공화국"의 "임시 대총통"이었던 "쑨원"은 무엇보다도 평화스럽게 "청 황제"를 퇴위시키면서 중국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스스로 그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 결과,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구 관료"가 그대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주었고, "혁명 세력" 약화를 초래해 "반쪽짜리 혁명"으로 전락하여, "신해혁명"이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도"를 이룩하였다 하여도 중국 사회와 경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은 한계가 있다.
즉, "신해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 통치"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어, 아시아 각국 민족 해방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실상은 반식민지ㆍ반봉건 사회성을 근본으로 바꾸지 못했다.
6. 논 쟁
오늘날 분단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와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중국 공산당"의 견해는 "자산계급 부르주아에 의하여, 이루어진 혁명"이라고 하여, 이를 "구(舊) 민주주의 혁명"으로 성격을 규정짓고 있으며, 나아가 최근에는 "신해혁명은 신사 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에 불과하다"고, 혁명의 의의를 낮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공산당", 즉 무산계급 주도아래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을 내세울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민국 학계ㆍ중국 국민당"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신해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폄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론을 내세우고 있다. 즉, 혁명의 중심이었던 "쑨원"만 하더라도, "부르주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확실히 "쑨원"은 부르주아 출신이 아닌, "농민 출신"이며, 그것도 "중농" 이하의 가정 출신이었다. 그리고 혁명에 참여한 계층은 "회당(會黨)"을 비롯하여, "신지식인ㆍ화교ㆍ신군(新軍)" 등 중국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기 때문에,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을 이른 바 "전민혁명(全民革命)"으로 규정하였다. 이렇듯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중국 공산당"에서 주장하는 "구민주주의, 자산계급 부르주아 혁명"이란 설에 대한 반론으로 "전민혁명"을 내세우고 있다.
7. 배경 : 쓰러져 가는 청나라ㆍ양무운동 (洋務運動)
① 양무운동 : 19C 후반, 중국 청나라의 "증국번ㆍ이홍장" 등이 벌인 근대화 운동
"제2차 아편전쟁ㆍ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서구의 무기를 주목하게 된 "청"의 관리들이 1860년대 중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수산업"을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차츰 "민수 부문"으로 확산되어, 근대 특징이 될 만한 경향이 있는 "광공업의 발전ㆍ전신선과 철도 부설ㆍ해군 양성ㆍ유학생 파견ㆍ신식 교육기관 설립"까지 광범위하게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다.
"양무운동" 초기에는 청조가 반란 진압에 성공하여 "同治中興 (동치중흥)"이라고까지 회자됐지만, 부국강병의 결과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양무운동" 기간에 있었던 대외 전쟁(1884년 청불전쟁ㆍ1894년 청일전쟁)에서 군사상으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양무 기업" 대다수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할 무렵에는 "부국강병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양무운동" 실패 요인과 한계는 관리의 기업 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에 속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점이 주류였다. 특히 개혁을 지향하는 관리들이 지방에 분산된 채, 통일하는 계획 없이 사업을 추진했으므로, 급변하는 정세 변화에 효율로 대처하지 못한 점이 커다란 문제였다.
② 변법자강 운동 (變法自強 運動)ㆍ무술변법ㆍ1898년- 변법자강책 (變法自強策)
잇따른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무운동"의 모순이 드러나자, 더 근본적인 개혁을 부르짖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캉 유웨이ㆍ량ㆍ치차오" 등이다. "캉 유웨이" 등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입헌 군주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의 도입, 상공업의 장려 등으로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이른바 "변법자강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황제인 "광서제"는 1898년에 이들을 등용하여, 개혁에 착수했으나, "서태후" 등 보수파의 반발로 100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캉 유웨이"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보수파"가 다시 정권을 차지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자, 그동안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상 개혁을 주장해 온 "변법론"이 힘을 얻었다.
"변법"을 주장하는 하급관리 "캉 유웨이"의 개혁 주장이 "광서제"에게 알려지면서, "광서제"가 주도하여 1898.04월 하순에 약 100일에 거쳐, 소위 "무술변법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캉 유웨이"는 본래 부강하려면,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우선 개혁을 추진할 새로운 기구(제도국) 마련에 착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구 마련과 개혁을 지향하는 하급관리 임용,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 등 개혁 구상조차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려는 관리들과 "서태후"에게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였다.
특히 "자신의 개혁이야 말로, 공자의 정신을 계승한 것(공자개제론)"이라는 "캉 유웨이"의 주장은 수구파의 공격을 불러왔다. 결국 "변법파"가 영국ㆍ일본과 연합하는 외교 방침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을 방문해 "광서제"를 만나자, "서태후ㆍ수구파" 측은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서태후"가 훈정(訓政)을 재개하여 "변법자강 운동"은 실패하였다.
③ 의화단 운동 :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외세 배척 운동→ "식민지화" 촉진하는 결과
1899~ 1900년 기간, "산둥성"에서 반기독교 폭동을 계기로, "화북" 일대에 퍼진 "반제국주의 농민 투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의화단 운동"이라 한다. 중심 세력인 "의화단"은 "백련교 일파"로 불리는 종교 비밀결사로서, 당시 사회 모순ㆍ기독교 전파ㆍ독일 진출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을 부르짖으면서, 무력으로써 "배외 운동"을 전개했다.
1899년, "산둥성" 서부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를 박해했고, "청조"에서도 이를 선동해, 폭동이 확대되었다. 1900년에는 "베이징"에까지 들어와, "관군"과 함께, "11개국 공사관"을 공격했으나, "영국ㆍ러시아ㆍ독일ㆍ미국ㆍ프랑스ㆍ일본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8개국 연합군에게 격파되었다. 1901.09월, "베이징 의정서"의 성립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으나,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 조약 내용은 "청"의 면모를 크게 실추시키면서, "식민지화"를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④ 청조의 개혁
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와 수구파 탓에 실패했으나, 의화단 운동의 참혹한 결과로 국내상으로는 막대한 세금 징수로 민심의 동요와 불만, 국외상으로는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가 증폭하여 청 조정은 내정과 외교 총체가 위기에 처하였다. 특히, 상층도 청조에 불만이어서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위기였다.
1901.01월 청의 실권자 서태후는 "외국의 장점을 취하고 중국의 단점을 버려 부강을 꾀한다"는 방침하에 고위 관료들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상신(上申)하라고 명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청 정부는 생존하려는 "新政(신정)"을 개시했는데, 이를 서태후의 존호인 자희(慈禧)를 따 "慈禧新政(자희신정)"이라고 한다.
"직예 총독 위안스카이ㆍ양강총독 유곤일ㆍ호광총독 장지동"이 추진한 "신정"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 36개 사단의 신군(新軍) 건설을 중심으로 한 군대 근대화 • 상부(商部)신설, 회사 설립 장려, 상법 제정을 이용한 실업 진흥 • 과거제도 폐지, 교육 개혁, 외국 특히 일본으로 유학생 대거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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