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義和團) 운동ㆍ의화단의 난"으로, 청나라 몰락 가속화ㆍ러일전쟁의 배경이 된다. "의화단 (義和團)"이 "산둥 지방ㆍ화베이 지역"에서 일으킨 "외세배척" 운동으로, "제국주의"에 맞서게 된다. "산둥지역"에서는 일찍이 "의화권 (義和拳)"이라는 민간 결사가 생겨나 반외세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1897년, "독일"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자, "의화권"의 "반외세ㆍ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됐다.
1. 의화단 (義和團) 운동ㆍ의화단의 난 → 청나라 몰락 가속화ㆍ러일전쟁의 배경
"신축조약" 체결된 이후 1901.10.06일, "서태후와 광서제"는 "시안"을 출발하여, "동관(潼關)"을 나와 "뤄양"을 경유하여, 다음해인 1902.01.07일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태후"는 "의화단"을 "적"으로 선포하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의화단 진압"을 명함으로써 "의화단 사건"은 수습되었다.
• 일 시 : 1899.11.02.~ 1901.09.07 • 장 소 : 청나라 화북 지방 (산둥 지방ㆍ화베이 지역) • 내 용 : "서태후ㆍ단친왕(端親王)"은 본래 "반청 단체"였던 "의화단"을 구슬려, 열강 8국과 대항하도록 하였다.
• 결 과 : 8개국 연합군의 승리 (러시아ㆍ일본ㆍ영국ㆍ프랑스ㆍ미국ㆍ독일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헝가리) →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ㆍ1901.09.07) 불평등 조약 체결→ 청나라 몰락 가속화ㆍ총리아문 폐지ㆍ열강의 압력으로 외무부 신설ㆍ러일 전쟁의 배경 제공
• 병 력 : 의화단 (100,000~ 300,000명)ㆍ청나라 관군 (70,000명ㆍ동복상의 감군(甘軍ㆍ회족출신 군인 10,000명 포함)ㆍ8개 국 연합군 (50,255명)ㆍ러시아 군 만주 점유 (100,000명)
• 피 해 : 대부분 의화단 (100,000~ 300,000명)ㆍ청나라 관군 (20,000명)ㆍ8개 국 연합군 ( 2,500명)ㆍ외국인 (526명)ㆍ중국인 기독교 신자 (수천 명)
"의화단 운동"은 "청 조정의 보수파ㆍ보수적인 관료ㆍ신사들ㆍ무지몽매하고 미신을 믿는 민중"의 힘이 결합해 전개된 것이었다. 이 운동은 "열강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ㆍ반감이, 완전히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폭발한 것으로, 내재적으로는 애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으나, "자국민 기독교도들"에 대한 학살 자행과 수많은 해악을 끼친 점, 외국 열강으로부터 개입을 허용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부청"이란 사상적 속박 안에서의 운동이어서, 오히려 "청 정부"에게 이용되고 매도되어 버렸다.
1900년(경자년(庚子年))에 일어난 "교난"이라는 의미로, "경자교난"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의화단"을 "주먹을 쓰는 비적들"이라는 의미의 "권비(拳匪)ㆍ단비(團匪)"로 지칭하였는데, 따라서 "의화단 운동"을 "권비의 난ㆍ단비의 난ㆍ의화단의 난"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 "의화권"은 다른 민간 자위 조직에 침투해, 통합을 이루고는 스스로 "의화단"이라고 칭했다.
"의화단"은 "백련교"를 모태로 한 수 많은 무술단체 가운데, "대도회(大刀會)"를 비롯한 "권법 무술단체의 무리"로 "의화권(義和拳)"이라고 불렸다. 서양에서는 "의화단"을 "복서"(Boxer)라고 불렀는데, 당시에 서양 선교사들이 "의화단"이 무술ㆍ체조를 중요시하는 걸 보고 "권투 선수(Boxer)들 같다"고 평 한데서, 나왔다고 한다.
"백련교(白蓮敎)"는 "불교"에서 기원한 중국 민간종교로, 특히 여성ㆍ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유행했는데, 그 교리는 한 여인이 있어, 그녀의 자식을 천년왕국이 도래할 때, 하나의 가족으로 모은다는 것으로 불교의 "미륵사상과 민간신앙"이 혼합된 사상이다. 보통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서, "비밀결사" 형태로 존재했다.
중국인은 나라가 기울어지고, 삶이 고된 이유가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비밀결사 의화단"이 "성당ㆍ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들을 마구 죽여, "베이징"까지 진격하자 "반기독교 운동"은 점점 악화되었다. 이에 "8개 연합군"은 "베이징"을 함락하고, 중국인을 향해 무자비한 보복 행위를 저질렀으며, "서태후ㆍ청 조정"을 압박해, "신축조약"을 맺었다. 이는 중국에게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중국은 열강들에게 "분할 통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건, 본격적인 "의화단 운동"은 "독일 로마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이 왕성했던 "산둥 성의 북부"지역에서 1898.04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해 여름부터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어, 가뭄 피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유민이 발생했는데 이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입했다. 1899.12월, 새로 부임한 "산둥 순무(巡撫) 위안스카이"는 열강의 요구에 따라, "의화단"을 강력히 탄압했는데, 이것이 "의화단 세력"이 "허베이 성"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면서, "의화단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의화단"은 철도ㆍ교회ㆍ전선 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학살하기도 했다.
1900.01월, "서태후"가 황제인 "광서제"를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열강이 "서태후"의 의도를 간파하고 공동으로 압력을 가해, 그 의도를 좌절시켰다. 이 때문에 "청나라 정부 수구파"는 "의화단의 배외 운동"을 고무해서, 열강에 압력을 가하고자 했다. 1900.06월, "의화단"이 "베이징"에 있는 "외국 공관"을 포위 공격하자, "서태후"는 그들을 "의민(義民)"으로 규정하고, 열강에 선전 포고했다.
이에 8개국(러시아ㆍ일본ㆍ영국ㆍ프랑스ㆍ미국ㆍ독일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헝가리)이 파병해서 "베이징"을 비롯해, "양쯔 강 이북" 지역을 대부분 점령했다. 열강은 "중국"을 분할하지 않는 대신 보존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청나라 왕조"와의 협상을 거쳐 1901.09.07일, "강화 조약인 신축 조약(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했다. 그 내용은 "청나라"가 "제국주의 열강"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열강의 "중국 내 군대 주둔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반식민지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2. 사건 진행
"제1ㆍ2차 아편전쟁" 이후, "기독교"는 중국 사회에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제1차 아편전쟁"이 종결된 후, "기독교"는 포교의 자유를 얻었고,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난 뒤에는 선교사들이 "중국 내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으며, "치외 법권"을 획득했다. 또한 "교회"는 토지를 구매하거나, 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특혜"가 확대되는 것과 비례해, "기독교도"와 중국인의 마찰도 빈번해졌다.
우선 "기독교"와 "신사층"이 부딪혔다. "지방 신사층"은 승전의 대가로 얻은 "선교사들"의 지위ㆍ특권이 자신들의 지위ㆍ권리ㆍ의무를 침해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선교사"의 자선사업ㆍ학교 설립 등은 "지도층의 역할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반 백성도 "기독교"에 거부감을 가졌다. "교회"가 토지를 구매하거나, 빌릴 수 있게 되면서, "교회"는 하층 농민들을 고용해 토지를 경작했고, 고용된 하층 농민들을 포교해, "기독교 신자"로 만들었다.
"기독교 신자"가 증가하자, "교도ㆍ비교도" 사이에서 분쟁이 잦아졌다. 이때마다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교도들"만 비호하여, "비교도들"이 불이익을 당했다. 또한 "기독교"의 제사 금지 관습과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 등은 중국인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에서는 "반기독교" 기운이 팽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인은 "기독교"의 세력 확장을 단순한 포교의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과 동일시했다.
"청나라"가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할 때마다, 체결하는 조약들에 굴욕감을 느꼈고, 영토를 빼앗기고 수많은 "전쟁 배상금"을 물며, 생활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의 분열ㆍ망국의 조짐ㆍ민생 파탄의 이유"를 서구 열강의 침략에서 찾은 중국인들은 "기독교"가 그 선봉에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중국인의 "기독교"에 대한 분노ㆍ불만은 커져만 갔으며, 서구 열강들의 침략이 계속됨에 따라 중국인의 "기독교"에 대한 저항 역시 거세졌다. 당시 중국인의 "반기독교 운동"은 주로 각지에서 조직된 "민간 비밀결사들"이 주도했다.
1897년, "독일 선교사" 2명이 "반기독교 비밀결사"에게 살해당했다. "독일"은 이 사건을 빌미로 "산둥성"을 강제로 점령한 후, "청나라"에게 "자오저우만"을 "조차지"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독일의 자오저우만 획득"을 표본 삼아, 열강들의 경제 침탈이 강화되자, "산둥성"에서는 "반기독교 운동"이 고조되었다. 여기에 "의화단"이 끼어들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의화단"은 "대도회"에서 발전한 "비밀결사"로, "백련교"를 뿌리로 한다. "의화단"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병"이라 믿었으며, 권법ㆍ봉술을 익히고, 주술로 총탄을 물리칠 수 있다고 공언했다. 특히 이들은 "서양인ㆍ선교사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의화단"은 "청일전쟁" 이후, 열강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투쟁 목표ㆍ규모를 확대ㆍ변화ㆍ발전시켜,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세웠다.
1899년, "의화단의 반기독교 운동"이 "산둥성" 서쪽까지 확산되자, "청 조정"은 "위안스카이"를 "산둥 순무"로 임명하고 진압하도록 했다. "위안스카이"가 "의화단"을 잔인하게 탄압하자, "의화단"은 "직예"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직예의 의화단"과 결집했다. 이들은 교회ㆍ철도ㆍ전신 시설을 파괴하고, 열강의 주재 기관들을 파괴하는 등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며,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이에 "영국ㆍ미국ㆍ독일ㆍ프랑스" 등은 "청 조정"에 2달의 기한을 주고, "의화단"을 소탕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기한 동안 소탕하지 못할 경우, "연합군"을 파견해 "의화단"을 진압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연합군"은 군함을 속속 "대고"에 집결시켰다.
1900년, 드디어 "의화단"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그럼에도 "청 조정"은 "의화단 진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심지어 세가 확장돼 진압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하고, 쌀ㆍ은전을 지급하며, 달래기도 했다. "베이징"에 입성한 "의화단"은 "베이징"에 주재한 열강들의 공사관ㆍ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8개국 연합국"은 자국의 "공사관"을 지키기 위해, "베이징에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통고했다. "서태후"는 하는 수 없이, 열강의 "베이징 주둔군을 소수로 제한한다"는 조건을 들어 허락했다. 그리하여 400여 명의 군대가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의화단"에 의해,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ㆍ독일 공사"가 "베이징 거리"에서 피살되고, 열강의 "공사관ㆍ군대"가 포위되었다. 이에 연합군은 "청 조정"의 반대에도 2,0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해, "베이징"을 향해 진격했다.
마침내 "톈진"을 점령한 연합군은 "청 조정"의 강화 제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베이징"을 목표로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서태후"는 "의화단 진압"을 유보한 채, 열강에 선전포고하고, "의화단"에게 각국 "공사관ㆍ톈진"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사실 이즈음 "청 조정"에서는 "주전파ㆍ주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양쪽을 저울질하던 "서태후"가 "주전파"를 지지했던 것이다. "서태후"가 전쟁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열강이 "광서제"를 복귀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던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을 이용해 이를 막고자 했다. 또한 그녀에게는 "선전포고"를 하고 나면, "의화단"과 함께, "양광총독 이홍장ㆍ호광총독 장지동ㆍ 양강총독 유곤일" 등이 참전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이후 "의화단"은 철도ㆍ전선의 파괴는 물론이고, 성당ㆍ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들을 마구 죽였다. 특히 각국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던 "동교민항(同交民巷)"을 포위하고, 집중 공격했다. "의화단"은 연합군과 거의 2달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동교민항"을 끝내 함락하지 못했다. 병력이 연합군을 훨씬 웃돌았음에도, 조직이 느슨해, 명령 전달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연합군을 상대로 선전했던 "직례도독 섭사성"도 "팔리대 전투"에서 총을 맞고 전사했다.
"서태후"가 "의화단"과 동맹을 맺고, 연합군에게 선전포고를 했지만, 사실 그녀는 연합군과 대립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선전포고가 있은 후, "서태후"는 "영국이 서태후의 정권을 광서제에게 넘겨주려 했다는 것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홍장ㆍ장지동ㆍ유곤일" 등이 전쟁을 반대하고, 그녀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의화단"을 물리치고, "베이징"으로 진격해 오는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자, 그녀는 열강들에게 "선전포고는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고, 연합군과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1900.08월, "청 조정"의 정전 협상에도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청 조정"은 열강과 강화를 맺고자, "의화단"을 배신하고, 연합군과 결탁해 "의화단"을 와해시켰다.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한 날, 서둘러 "서안"으로 도망치며,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해 뒷일을 수습하게 했다. "서태후"가 없는 "베이징"은 연합군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연합군의 무법천지가 되었다. 연합군은 중국인에게 약탈ㆍ강간ㆍ살해 등 무자비한 보복행위를 자행했다.
열강과의 강화는 강화시기에 대해, 연합군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1년 이상 허비되었다. 결국" 중국의 영토ㆍ주권 보장ㆍ서태후의 통치 체제 인정" 등으로 "청 조정"을 압박해, 1901.09.07일 "신축조약"(辛丑條約)이 체결되었다. "신축조약"은 중국에게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이로써 중국은 열강에게 "무장해제" 당했으며, 열강이 "중국을 분할 통치"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3. 평 가
"의화단 운동"은 "가난한 농민"이 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이었으나 반봉건적이거나, 혁명적인 성격은 없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의의는 상당히 컸다. "당덕강(역사학자)"은 의화단 운동을 "문화대혁명의 홍위병(紅衛兵)"에 비유하기도 한다.
① "의화단 운동"의 결과, "중국의 민족주의"가 탄생하였다.
이들이 도처에 붙인 "게첩(揭帖)"에는 "중국의 당면한 문제"를 지적하고, "반제국주의"적인 내용이 충만히 있었으며, "행동으로 투쟁하자"는 것으로 가득 찼다.
② "제국주의"에 대하여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 내부의 대립으로 "중국"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무기는 열악하였으나, "의화단의 저항"은 "8개국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알프레트 폰 발더제(독일 사령관)"은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중국을 넘겨준다는 것은 절대 실현할 수 없으며, 중국인들은 무한한 생기를 갖고 있다."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열강들에게 중국을 넘겨줄 수 없다"고 인식시켰다.
③ 폭력ㆍ살상 행위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의화단"의 "폭력ㆍ살상 행위"는 전통 중국의 도덕관념과도 어긋나는 것으로서, 사실상의 야만 잔혹행위(野蠻殘暴)였다. "타이완" 및 수많은 해외 중국인들이 "의화단"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미신(迷信)ㆍ폭력(暴力)"의 상징으로 보아, 사람을 모욕하는 단어로 "의화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8국 연합군"의 작전 수요에 대항하여, 교통ㆍ통신을 단절한 것에 대해서는 "청 정부"도 "청군"에게 "철로(铁路)의 훼손"을 명령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④ 민족의식 각성
"중화인민공화국"의 당국의 관점에서는 "의화단 운동"은 근대의 의미 있는 표지로서. 중국의 민족의식을 각성하고, 중국의 "근대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본다.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서"에는 "의화단은 제국주의 침략의 실패를 증명하고, 정확한 지도 사상이 없이는 인민 혁명의 승리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중국학계의 일반적 인식은, "중화민국(民國)의 5ㆍ4운동(五四運動), 5ㆍ30ㆍ사건(五三十事件)"과 함께, 근대이래, 중국이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한 "3대 군중성(群衆性) 민족주의 운동"이라 한다. 그 중 "5ㆍ4운동"은 주로 "제국주의의 정치 주권 침략에 반대" 한 것이라면, "의화단 운동ㆍ5ㆍ30ㆍ사건"은 "제국주의의 정치ㆍ경제ㆍ문화 침략에 반대"한 운동으로, 지속된 시간이 더 길며, 끼친 영향은 더욱 심원(深遠)하다고 본다.
⑤ 종교 전쟁
"의화단 운동"에서, "중국 한교(中國 漢教)ㆍ외래 기독교"의 모순이 충돌한 측면에서, "한교를 보호하고, 양교에 반대(保漢教ㆍ反洋教)"하는 것을 "의화단 운동"의 중요 목적의 하나로 본다. "당군의(철학가)"는 의화단 운동을 "중국 민간 도교와 서방 기독교 사이의 종교전쟁"으로 생각했다.
⑥ 권력 투쟁
"당덕강(역사학가)"는 의화단 운동의 또 다른 원인은 "청 정부의 권력투쟁"이라고 생각한다. "무술정변(戊戌政變)" 후, "서태후ㆍ광서제" 등이 황제 자리를 두고, 서방 열강의 반대를 접하게 되어, 한이 되었고, 여러 차례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파들은 "광서제"를 모욕하였다. "청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의화단"을 이용해 승진ㆍ재물 취득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였다.
4. 비판ㆍ한계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나, "의화단 조직"이 미약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도 보잘 것 없는 것인데 비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힘은 너무 컸기 때문에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의화단"이 외쳤던 "멸양" 구호는 "반제국주의"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대립을 이해하거나, 이용하지 못하여서,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지역의 농민들을 주축으로 하였기 때문에, "의화단 구성원"은 조직적인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고 명확한 정치의식도 없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된 조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의화단 운동"은 낙후된 종교ㆍ미신의 조직ㆍ형식을 갖고, 이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혁명"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부청"이란 사상적 속박 안에서의 운동이어서, 오히려 "청 정부"에게 이용되고 매도되어 버렸다.
5. "신축 조약(1901.09.07.)" 주요 내용
8개국 연합군이 "중국 베이징"을 점령한 다음, "청 정부"를 압박하여 체결한 불평등조약
• 중국은 배상금을 연리 4%의 이자로 6,750만 파운드, 즉 45억 냥을 39년 내(1940년까지)에 지불하며 관세, 염세 등을 저당으로 잡는다. • 대고포대를 해체하고, 베이징에 공사관 구역을 설정하며, 베이징과 산해관 사이, 철도연변에 열강 군대가 주둔한다. • 중국인의 배외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여야 하며, 만일 지방관이 진압하지 못하면, 즉시 파면하고 영구히 등용하지 말아야 한다. • 총리아문 대신, 외교부를 설치해, 6부의 위에 둔다. • 기왕의 통상조약에 대해 열강이 요구하면, 청나라가 이에 협상해 수정할 수 있다. • 청은 왕, 대신을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에 파견하여 독일 공사와 일본 서기관의 피살에 대하여 사죄한다.
"신축조약"에 비록 "할지(割地) 문제"는 없었으나, 열강이 "톈진"을 점령하고 있던 기간에 "러시아 제국"은 강제적으로 "톈진"에 "조계"를 설정하였고, "이탈리아 왕국ㆍ벨기에ㆍ네덜란드"에서도 뒤따라 "조계지"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이전에 "5개국의 조계지"가 있던 "톈진"은 "9개국"으로 늘어났다. 한편, "독일 외교공사관인 케텔러" 사망에 대한 사과 사절로, "순친왕"이 "독일"로 갔는데, 외교관 자격이 아닌, 사과사절이어서, 용서를 빌러 온 죄인 신분의 치욕적인 대우로 받았으나, "순친왕"의 로비 결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수모는 겨우 모면했다.
"신축조약"은 "배상금 채무" 문제에서 "관세ㆍ염세"를 담보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청나라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엄청난 "배상금"과 철도 연변의 외국군 주둔 등 조약의 내용은 사실상 "청나라"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킨 격이며, 발가벗고 손발이 꽁꽁 묶인 "청나라"는 열강들의 침략 앞에 무방비로 던져진 셈이었다. 열강의 "국가별 배상금 배분"은 "러시아(29%)ㆍ독일(20%)ㆍ프랑스(16%)ㆍ영국(11%)ㆍ미국(7%)ㆍ일본(7%)" 였는데, "배상금 지불(45억 냥)"은 1901~1938년까지 30년으로, "청나라" 말기까지 11년, 중화민국 시기 27년으로 되었다.
그러나 "지불정지ㆍ조건의 완화" 등으로 되돌려 받게 된 것이 약 "5억 여 냥"이었다. 즉 뒷날 "제1차 세계대전"에 "중국"이 참전하여, "독일제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줄 "배상금"을 지불 정지하였고, "참전국"은 5년 동안 유예, "러시아 제국"은 "혁명"으로 포기하여, 약 5억 여 냥을 되돌려 받은 셈이 된다.
6. 영 향
① 중국에서의 영향
"의화단 운동ㆍ신축조약 체결"은 몇가지 중요한 결과ㆍ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의화단 활동" 영향으로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ㆍ러시아의 만주 진군"은 국제 경쟁을 격화시키게 되었고, 열강들로 하여금 상호 충돌에 따라, "청나라"에서 누구나 동등한 경제적 기회를 가졌던 상황이 종식되는 사태가 야기되는 것을 우려하게 만들었다.
"신축조약"은 "청나라 주권"을 매우 심각하게 침해했다. "무기 수입금지ㆍ다구 포대"를 비롯한 여러 포대 폐쇄, "공사관 구역"에서의 외국 군대 주둔, "베이징"에서 해안까지 외국 군대를 배치할 수 있는 권리 등 모든 것이 "청의 자위권 역량"을 손상시켰다. 여러 지역에서의 "과거 시험 중단"은 "청나라 내정"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까지 미치게 된다.
막대한 "배상금 지불" 문제도 커다란 타격을 미쳤다. "배상금"은 1940년 만기 지불 때까지의 이자를 합산하면, 원래 "배상금"의 2배가 넘는 액수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배상금"은 모두 외화로 지불되어야 했는데, 환전 과정에서 "청나라"는 특히 "은 가격"이 급락한 시기에 추가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막대한 양의 "자본 유출"은 "청나라 경제" 성장을 매우 크게 억제시켰다.
"의화단"의 활동ㆍ행동으로 당시 국제 사회에서 "청나라는 미개한 국가"로 인식하게 만드는데, 한몫했다. 동시에 해외 열강들의 잔인한 세력 과시는 "그들이 난공불락이며, 우월하다"는 이미지를 심어놓았으며, 청나라의 자신감ㆍ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1860년대 이래, "반 기독교운동"에서 시작해, "의화단" 단계에서 절정에 이른 "반 외세운동"은 결과적으로 "청나라 조정"의 대외의존을 심화시켰다. 또 "청조"의 통치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 "반청 혁명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도 더 이상 개혁을 늦출 수 없게 되어, "서태후ㆍ보수파들" 중심으로 "신정"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② 대한제국에 미친 영향ㆍ러일전쟁의 배경
"의화단 운동"은 곧 "대한제국"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의화단 운동"으로 발생한 "청나라 난민"이 한국으로 밀입하여 들어왔다. 1900.06.21일, "청 정부"가 열강에 선전포고하기 직전만 해도 12,000명이 "대한제국" 영내로 들어왔다. 그 후에는 더욱 많아져,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은 수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한 "청나라 공사"인 "서수붕"의 동생 가족도 들어왔다. 1900.06.25일, "대한제국 고종"은 "한성부" 주재 각국 공사들을 불러, "의화단의 난"과 이에 관한 서구 열강의 대책을 물었다. 이때 "대한제국"은 "청나라"에 공사ㆍ영사를 파견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정부 차원의 공식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한편, "러시아군"은 "만주의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대병력을 파견하여, "만주 북부"에서 남하했다. "러시아"는 수십만 병력을 동원하여, "만주 전역" 점령에 나섰다. 1900.06월 하순부터, 국경지대를 넘은 "러시아군"은 7월 중순, "훈춘ㆍ하얼빈"을 점령한 후, 계속 남진했다. 8월, "훈춘"에서는 "러시아군"이 한국인 2,000명을 사살하는 일도 있었다. "의화단ㆍ러시아군"의 횡포에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도 대략 10,000여 명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러시아ㆍ일본"은 한국의 말ㆍ소를 구매하여 전쟁물자로 사용했다.
"러시아군"의 토벌을 피해, "의화단"의 일부는 "대한제국"의 국경을 침범했다. 1900년 하반기~ 1901년 상반기에 이르는 동안, "의화단ㆍ러시아군"이 빈번히 월경하여, 방화ㆍ살인ㆍ약탈을 자행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한국" 내로 파병을 추진했다. 1900.07.24일, "러시아 주한 공사"가 "고종"에게 "러시아 군대의 국경 진입ㆍ조ㆍ러 양국군의 의화단 공동 진압ㆍ러ㆍ일의 서울 파병"등을 제의했는데, "고종"은 거절했다. 한편 "한국의 지방군"은 월경한 "의화단"을 격퇴시키지 못했다.
"의화단 운동"을 계기로 "러시아"의 남진ㆍ만주 점령ㆍ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자, "러시아ㆍ일본"의 대립이 첨예해졌다. "러시아ㆍ일본"은 "만주ㆍ한반도"를 놓고, 지루한 협상을 벌였고, 그러다가 결국 "일본"이 "영일동맹"을 기반으로, 1904.02월 "러시아"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섬으로써, "의화단 운동"은 훗날 "러일전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7. 의화단의 기원ㆍ발전
① 의화단 (의화권ㆍ의화문)의 기원
전신은 "의화권(義和拳)" 혹은 "의화문(義和門)"으로, 1778년의 "관방 문서"에 처음으로 보이고 있다. 그들은 본래 통일된 조직이 없어서, 연합행동을 할 때에 비교적 세력이 있는 "촌"이 주축이 되어 인근의 무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부자들을 위협하여 재물을 내도록 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해왔다.
1808년, "청나라" 조정은 "의화권"을 "건전하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종교"로 보아 이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권술(拳術)"을 배우면서 점점 복잡해졌고, 종교적 성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이들과 "백련교"가 결합한 결과 때문이었다. 군중들이 받아들이기 쉬웠던 "불교ㆍ도교ㆍ유교" 등과 민간신앙을 "의화권"이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종교적인 내용은 대단히 복잡해졌다.
이들은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반기독교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조직적인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대규모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청일전쟁" 이후, 열강의 침략이 격화되어 가면서, "의화권"의 명칭도 "의화단"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1900년 봄ㆍ여름 사이에, "즈리ㆍ산둥" 등지의 "의화권"이 "의화단"이란 명칭을 보편적으로 사용하여, "의화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명칭이 바뀌면서, 그들은 사회 기반을 분명히 하게 되었고, 투쟁 목표ㆍ규모는 더욱 확대ㆍ변화ㆍ발전되었고, 그중 가장 큰 변화는 "항청(抗淸)ㆍ반청(反淸)"에서 "반제(反帝)ㆍ애국"으로, 혹은 비밀활동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② 조직ㆍ구성원ㆍ구호
일반적으로 "8괘"에 따라, 8개의 큰 계통으로 조직되었는데, "즈리 성의 톈진ㆍ베이징" 지역에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 반드시 8개가 다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8개의 계통이 모두 다 같은 규모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의화단" 전체가 통일된 조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엄격한 "지도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공인된 "지도자"도 없었다.
평시에 "의화단"은 전신인 "의화권(義和拳)"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연 촌락을 단위로 각자가 "단구(壇口)ㆍ권창(拳廠)"을 설치하여 무술을 배운다든지, 권술을 연습하는 곳으로 삼아, "대사형(大師兄)ㆍ이사형(二師兄)" 등이 이끌어 나갔다. 어떤 지방에서는 "단구(壇口)" 위에 다시 "총단구(總壇口)"를 설치하여, 그 우두머리를 "노조사(老祖師)나 노사(老師)"라고 불렀다. 일이 있을 때에는 인근의 몇 촌장에 있는 "창(廠)"을 모아, 임시적으로 "단(壇)"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구성원은 가난한 사람들로 대부분이 "농민"이었으며, 그밖에 "선원ㆍ철도 노동자ㆍ어민ㆍ소금을 굽는 사람ㆍ기술자ㆍ소상인ㆍ점원" 등이 참여하여, 그 성분이 대단히 복잡하였다. 물론 이밖에도 "유민ㆍ궁정의 태감ㆍ군대 안의 사병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이로 보면, 대부분이 10여 세의 "청소년"을 중심으로, 그 이하도 있었으며, 30세 이상은 적었다. 부녀자들도 많이 참가하여, "소녀들로 조직된 홍등조(紅燈照)ㆍ중년 부녀들로 조직된 남등조(藍燈照)ㆍ과부들로 조직된 사과조(砂鍋照)"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홍등조(紅燈照)"는 "홍색"의 옷을 입고 "홍등"을 들고 있어, 자신들을 구별하였으며, 부녀 중의 "첨병"이었다.
비록 통일된 조직이 없었지만, 기율은 엄격하였다. 그들은 일률적으로 "단규(壇規)"를 지켜야 하였으며, "단" 밖에서 활동할 때에는 스스로 식량을 준비하여야 하였고, 밤이면 거적을 깔고 누워 자는 고생을 할지라도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규칙은 전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대"를 내세웠을 뿐, "향리"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반 민중은 정부의 군대를 무서워하여도, "의화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투쟁의 정의로움과 엄격한 규율로 민심을 얻게 되어, 대단히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갔다.
"의화단의 신앙"은 일치되어 있지 않았다. 즉 각 "단"과 "단"은 통일되었으나, 고정적인 신앙은 없었다. 단지 신령이 몸에 붙어있어 총알이나 칼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미신 사상만이 서로 비슷할 뿐이었다. 그들이 신봉하는 "신령"도 가지각색이었는데, "봉신방ㆍ삼국연의ㆍ서유기ㆍ삼협오의"등과 같은 소설에 나오는 인물에서 따왔다. 그리고 그 내용도 천진스럽고 유치한 성숙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입는 옷도 각 "단"마다 어떤 단은 붉은 색을, 또 어떤 "단"은 노란색을 좋아하여 그 색으로 머리 수건을 통일하던지, 요대를 통일하였다.
"의화단 구호"는 "의화권"으로 있을 때에 "반청복명 (反淸復明)"에 두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에 열강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부청멸양 (扶淸滅洋)"의 구호로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구호가 바뀌게 된 것은 1898.07월, "쓰촨 성"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 때의 격문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순청멸양(順淸滅洋ㆍ부청멸양과 같은 의미)"이란 구호였다. 그리고 이 해 가을, "산둥 성"의 유명한 "의화권 수령 조삼다(趙三多)" 등이 관현(冠縣)에서 3,000명을 모아 각지의 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ㆍ교민을 살해한 "관현교안" 때, 이와 비슷한 "조청멸양(助淸滅洋)ㆍ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세우면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전자는 연속성이 없었으나, 후자는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 이 구호를 사용하면서부터, "청나라 관리"는 물론 사대부ㆍ장군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동정을 받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으로 반제ㆍ애국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의화단 운동"을 전개하는데, 하나의 특징은 "대량의 전단"을 인쇄하여, 붙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게첩(揭帖)ㆍ고백(告白)ㆍ단유(壇諭)ㆍ첩어(貼語)ㆍ비문(碑文)" 등등으로 "황색ㆍ홍색ㆍ 백색" 종이에 인쇄하거나, 손으로 쓴 것인데, "의화단"이 군중을 선동하기 위한 선전이나, 교회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내용은 대체로 그들이 "청조"에 대한 태도를 표명한 것과 서양 열강과 교회를 반대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청"에 대한 태도에서 "황제ㆍ탐관"에 대하여 명확하게 반대한 것이 있는가 하면, "의화단"은 충신이라며, "청조"를 옹호하는 그 반대의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열강ㆍ교회"에 대한 태도는 거의 배외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전단의 작성은 위로는 "공경(公卿)", 아래로는 일반 "신사(紳士)", 문인들이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대량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③ 운동의 발전
"산둥 성"은 "의화단" 활동 주요지였다. 운동의 발원지는 "산둥 성ㆍ즈리 성"의 경계지로, 이 지역으로부터 "청일 전쟁" 이후에 자발적으로 "반기독교 움직임"이 계속적으로 일어나, "산둥 성" 전체로 파급되고 있었다. 따라서 10여 년 전에 일어난 "교안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미루어져 온 사건도 있었다. 예를 들면, 1894년, "이병형(李秉衡)"이 "산둥 성 순무"로 부임하였을 때, 1886년에 일어난 선교사와 교민들의 횡포에 분노한 민중들이 교회당을 불태운 "연주교안(州敎案)"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태 였는데,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돌려받고, "독일인"의 입김이 커지면서, "교안"도 피동적으로 해결되었다.
뒤이어 "조현(曹縣)"에서 "유사단(劉士端)"이 "보위신가(保衛身家)"를 내세워, 1894년에 "대도회(大刀會)"를 조직하고, 1896년에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청 조정"에서는 "양강총동 유곤일ㆍ산둥 성 순무 이병형"을 파견하여, 이들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산발적인 "반기독교 운동"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1897.11월, "조주부(曹州府) 거야현(鉅野縣)"에서 "독일 선교사" 2명이 살해되는 "거야교안(鉅野敎案)"이 일어났다. 즉, "거야현"에서 "조언학(曹言學)의 대도회 무리들"이 큰 비를 무릅쓰고, "현(縣)"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마반장(磨盤張)의 독일 천주교 성당"으로 들어가 선교사를 살해하였다. 이후 "제녕(濟寧)ㆍ수장(壽張)ㆍ성무(成武)ㆍ단현(單縣)" 등지에서도 "대도회ㆍ민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반기독교의 공기가 흉흉하였다.
"독일"은 이를 기회로, "산둥 성 교주만(膠州灣)"을 그들의 세력 범위로 삼았고, "독일 공사 헤이킹"은 "산둥 성 순무 이병형"을 파직, 영구히 임용하지 못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청조"는 그를 "쓰촨 성 총독"으로 이동시켰다. 뒤이어 1897.09월, "장여매(張汝梅)"가 순무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의화단"에 대하여 완화정책을 펴다가, 열강의 요구로 다음해 1898.03월에 사직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의화단 운동"은 발전하기 시작하여, 신권 수령인 "주홍등(朱紅燈)"이 "치평현(顯)" 일대에서 "창(廠)"을 설치하고, 권술을 가르쳤는데, 마을 전체 960여 장 가운데 800여 곳에 "단(壇)"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898.05월에 "신권"을 "의화권"으로 고쳐 지역을 넓히고, "대도회"도 "의화권"으로 이름을 고쳐, "의화권"의 활동이 "산둥 성"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의화권"의 이름으로 처음 반기독교 투쟁을 전개한 것은 1898.10.24일에 "조삼다(趙三多)ㆍ염서근(閻書勤)" 등 18명의 "18괴(魁)"라 칭하는 이들이 이끈 "호묘(護廟)투쟁의 관현교안(冠顯敎案)"이다. "호묘"란, "이원둔(梨園屯) 장가장 마장(蔣家莊 馬場)"에 있던 "옥황묘(玉皇廟)"를 헐고, 그 자리에 "천주교 성당"을 지으려는 것에 반대한 것으로, 이때부터 "의화권"의 이름으로 "부청멸양"의 구호를 공개적으로 사용하였다. 내용적으로 "서양인을 쫓아내, 죽이자"는 것이었고, "기독교ㆍ서양의 침략"을 연계시켰으며, 또한 부자를 털어, 가난한 사람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7. 의화단 운동의 사회적 배경
"청나라" 말, 열강 세력들의 이권침탈과 더불어, 국내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산둥 성ㆍ즈리 성ㆍ허난 성" 지방에 나타난 사회구조의 변화는 "의화단 운동"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 지역은 "자급자족의 자연경제"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 지역에는 일찍이 "면화ㆍ토포(土布)" 상품의 중요 생산지여서, "면화ㆍ토포"의 교역량이 제일 많았다.
각지의 상인들은 이를 구입, "산서 성ㆍ내몽고ㆍ요동" 등지에 판매하였다. 그런데 "톈진ㆍ연태(煙台)"가 개항된 후, "양사ㆍ양포"의 수입량이 나날이 증가되면서, 농촌의 토사ㆍ토포 시장을 장악하여, "가내 방직업"은 완전히 파산되고, 농민들에게 경제적인 고통을 가중시켰다. 결국 "의화단"의 기층을 이루고 있던 농민들은 그 불만의 화살을 "열강 제국주의"를 향하여 돌리게 되어, 이들은 "양화배척"을 외치게 되었다.
1894~1895년까지 일어난 "청일 전쟁" 패배 이후, "독일"은 "3국간섭" 이후에 중국에 대한, 특히 "산둥 성" 지방의 이권 쟁취에 열을 올렸다. "독일"은 1870년대에 중국 무역이 서양 열강 가운데 제5위에 불과했으나, 1890년대에 제2위로 올랐다. 1897.11월, "거야교안(鋸野敎案)"을 기화로, "교주만" 쪽으로 진출하려던 꿈을 이루고 "칭다오"를 "독일 철도의 기점"으로 삼아, 중국 내지까지 진출하려고, "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그리고 철도 부설을 위한 토지구입 문제를 둘러싸고, 그 지역 중국인들과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철도부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철도가 경유하는 지역마다, 분모를 파헤치고 민가를 철거해야 하였기에, 전통적으로 조상을 받드는 중국인들의 감정을 크게 해쳤다. 이에 "산둥 성" 지역인들은 "철도 부설반대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때가 "의화단"의 활동 시기여서 그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고 철도부설이 끝나면서, 많은 중국인 운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어, 이들도 여기게 가세하여 "의화단 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뿐만 아니라 "산둥 성" 지역에는 "반 기독교 운동"이 활발해져갔다. "청일전쟁" 이후, "산둥 성" 전체 108개 주현 가운데, 72개 주현에 교회의 거점이 마련되고, 크고 작은 교회는 1,300여개, 150여 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만 하더라도 80,000명에 달했다. 교회 세력은 열강의 힘을 배경으로, 불법을 일삼고, 일반 민중에 압력을 가하여, 도처에서 교안이 일어났다. "교안"이 일어나면, 관청을 압박하여, 민중을 진압하고, 배상금을 요구하여, "산동 인들ㆍ지방관들"도 교회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높았다. 그리고 1898.05월, "영국군"이 강제로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점령하고 조차한 것도 "산동인들"의 위기의식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밖에 자연재해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도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자연재해는 19C 후반부터, "화북 지역"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었는데, "산둥 성" 지역은 "황하 강"의 하류에 있기 때문에, "즈리 성ㆍ허난 성"과 함께 그 피해는 더욱 컸다. 특히 1898년에 더욱 심하여, 아사자만 16~17만 명이나 되었으며, 가옥을 비롯한 농경지 피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다. 같은 "산둥 성"이라 하더라도, 서부는 작물생산이 불리한 조건이나, 동부 반도지역은 관개가 잘되고 재해도 적어 경제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자연재해 환경ㆍ열강의 이권침탈ㆍ기독교의 활동은 "의화단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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