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불 전쟁 (淸佛戰爭)"은 프랑스가 "통킹 (베트남 북부)"를 차지하기 위하여 벌인 전쟁이다.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ㆍ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 → 톈진 협약ㆍ통킹 협약 (淸佛戰爭)
• 일 시 : 1884.08~1885.04월 • 장 소 : 베트남 북부의 화남ㆍ타이완 • 결 과 : 프랑스의 승리ㆍ청군의 미미한 육전 승리→ 톈진 협약ㆍ통킹 협약
• 교전국 : 프랑스 제3공화국 / 청나라ㆍ흑기군(태평천국의 잔존 세력)ㆍ응우옌 왕조 • 지 휘 : 프랑스- 쥘 그레비ㆍ아메디 코르베 / 청나라 광서제ㆍ혁흔 / 응우옌 왕조 함응이제
• 병 력 : 프- 15,000~ 20,000명ㆍ청- 25,000~ 35,000명 • 피 해 : 2,100명 사상 10,000명 사상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19C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프랑스군"이 "하노이"를 점령하고, 1874년 "베트남에 대한 보호권을 가진다."는 내용의 "제2차 사이공 조약(후에 조약)"을 체결, "베트남 남부 6성"을 할양 받음과 동시에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제1차 사이공 조약 : 1862년, "응우옌 왕조의 월남"과 프랑스 간에 체결된 조약)
이에 대해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한편, "베트남 북부"에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 청나라 무장 세력인 "흑기군(黑旗軍ㆍ의용군인ㆍ태평천국의 잔존 세력)"과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자 "프랑스 함대"는 "타이완ㆍ푸저우"의 항구를 포격하고, "청 군함(복건 함대)"을 패퇴시키고, "청나라 상선"들을 격침시키는 등 "청국 해군"을 압도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며, 점차 열세에 처한 "청나라"는 1885.06월, "프랑스"에게 화의를 요청했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프랑스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의 "톈진 조약"을 맺고, "청불전쟁" 종결에 합의했다. "톈진 조약"은 "베트남의 보호국"으로서 "프랑스"의 지위를 인정하고, "청나라ㆍ베트남" 양국의 변경에 개항을 두고 통상할 것ㆍ관세 특혜 인정ㆍ청나라 남부에 철도 부설 시, 프랑스와 협상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한 시대(BC 111에 복속)"부터 유지해 온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청불전쟁"은 종결됐으나, "청나라"는 "베트남 종주권"을 상실함과 동시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고, 위신까지 잃게 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과 함께, "청나라"가 잃은 또 다른 것은 경제적 손실과 위신이었다. 분명 "청나라"는 패전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청불전쟁" 비용으로 "은 10억 냥 이상"을 지출했고, 부채도 "약 2억 냥"에 이르렀다. 이는 전쟁 당시, 외채를 빌려 전쟁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는 "장지동"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편 "청불전쟁"은 이전 서양과의 전쟁에서 드러난 "청나라의 연약함"을 다시 한 번 부각시켰다. 따라서 "영국ㆍ러시아ㆍ프랑스" 등은 "청나라"와 그 주변의 나라에 야욕을 품게 되었으며, 특히 "청나라"가 가진 "조선 종주권"에 야심을 품은 "일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역대 왕조와 마찬가지로 "청나라" 역시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중화질서"를 유지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세상에는 "청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는 "조선ㆍ베트남ㆍ류큐(류큐 제도ㆍ일본 오키나와 현에 속하는 섬들)" 등과 같은 나라와 무역을 위해 방문하는 "서양ㆍ일본" 같은 나라가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중화질서" 속에서 "조공국ㆍ서양ㆍ일본" 등은 절대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2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불평등한 조약 체제로 편입되자, "중화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화질서" 붕괴를 향해, 제일 먼저 출발한 것은 "일본"이었다.
"류큐"는 "청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에게도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런데 1874년, "대만의 토착민"이 표류하던 "류큐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때마침 "베이징"에는 몇 해 전에 맺은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의 비준을 위해 "일본 관리"가 방문해 있었다. "일본 관리"는 "청 조정"에 살인죄를 저지른 "대만 사람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청 조정"은 책임을 회피하고자, "대만 사람들"의 처벌은 "청 조정 권한 밖의 일"이라고 했다.
이에 "일본"은 직접 "대만의 토착민을 징벌하겠다."며, "대만"에 군대를 보냈다. 당시 "일본"에 비해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청나라"는 "일본의 대만 출병"을 인정하고, 살해된 "류큐 인에 대한 보상금 지불"과 함께, "대만의 일본군 주둔 비용"까지 지불했다. 이는 "청나라"가 "류큐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류큐"를 일본의 속국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것은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의 시작일 뿐이었다. "청나라"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함으로써, 또다시 중요한 "속국 베트남"을 내놓아야 했다.
2. 제1차 사이공 조약 : 1862년, "응우옌 왕조의 월남"과 프랑스 간에 체결된 조약
18C 중엽, "베트남"은 "북쪽 하노이의 여씨ㆍ남쪽 후에의 응우옌씨(阮氏)", 두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하노이의 여씨"가 또 다른 "응우옌씨"에게 정복당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후에의 응우옌씨"를 후원하여, "베트남"을 통일하고 "응우옌 왕조"를 세울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응우옌 왕조"의 2대 왕은 "프랑스 선교사"를 박해했고, "프랑스"는 이를 구실 삼아 1858년에 "다낭"을, 1859년에는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리하여 1862년, "프랑스"는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동부 3성"을 할양받는 조건의 "제1차 사이공 조약"을 맺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고, "청나라 윈난 성"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3. 제2차 사이공 조약 (후에 조약): 1874년
"윈난"에 이르는 진로로 "베트남 북부의 송코이(紅河) 수로가 적절하다는 것"을 안 "프랑스"는 "베트남"에게 "송코이 수로 항해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베트남"이 이를 거절하자,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하노이"를 점령했다.
"베트남"은 "청나라"의 토벌을 피해 남하해 있던, "흑기군(黑旗軍ㆍ태평천국의 잔존 세력)"의 힘을 빌려 "프랑스"에 대항하려 했다. "흑기군"과의 교전이 예상외로 격렬해지자, "프랑스"는 교전을 피해 남진하여 "베트남"의 수도를 점령했다. 1874년, "베트남"은 "프랑스"와 "제2차 사이공 조약"을 맺고 화친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베트남의 자주독립국 인정ㆍ양국의 대외 정책 상호 일치ㆍ천주교의 자유로운 포교ㆍ하노이 개항ㆍ송코이 수로 항해권 허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청나라"는 이 조약에 대한 거부 의사를 확실히 하고, "베트남이 청나라의 종속국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중국ㆍ베트남"의 종주 관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한(前漢)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111년, "베트남"은 "전한"에 복속된 이후로 약 1,000년간 "중국"의 통치를 받았다. "당나라"는 "베트남"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는데, 이때부터 "중국"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 중의 하나였던 "남한(南漢)"에게 크게 승리를 거두고,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베트남의 종주국"인 양 행세했고, 이는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880년, "베트남"이 조공과 함께 원조를 요청하자. "청나라"는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 먼저 "증기택"은 "베트남"으로 하여금, "베이징"에 관리를 파견하게 하고, "프랑스"에도 "청나라 공사관"의 수행원 자격으로 관리를 파견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청나라" 통제 아래, "송코이 수로를 개방할 것"을 건의했다. 한편 "유곤일ㆍ유장우ㆍ장지동"은 "흑기군을 이용하여, 프랑스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청 조정"의 실력자였던 "이홍장"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 이홍장 (리훙장ㆍ李鴻章ㆍ1823~1901ㆍ78세): 청 말기의 한족계 거물급 중신 정치가ㆍ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ㆍ "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그리하여 1882년, "톈진"에서 "프랑스"와 회담을 갖고, 화친을 도모했다. 그런데 "청나라ㆍ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지위권"을 놓고 교섭하던 중, "흑기군"이 "베트남 북부"를 순시하던 "프랑스군"과 무력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프랑스"는 곧 "하노이"를 점령해 버렸다. 이어서 1883년, "베트남 수도 후에"를 함락하고, "베트남"과 "후에 조약"을 체결했다.
"후에 조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 1째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보호권을 가지며, • 2째 통킹에 접한 비엔투안 성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 3째 프랑스가 송코이 강 유역에 군사 보급지를 설치하고, 흑기군을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후에 조약"이 알려지자, "청나라"에서는 "공친왕ㆍ이홍장"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프랑스"와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다.
"청나라ㆍ프랑스"의 "1차 무력 충돌"이 "송코이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여기서 "청나라"가 패하자, "프랑스와 화의를 맺자"는 "이홍장"의 주장이 다시 힘을 얻었다. 1884년, "청나라"는 "프랑스"와 담판을 가졌고, 그 결과 "청나라"는 1883년에 "후에 조약"을 승인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베트남"에 주둔하던 군을 철수시켰고, "프랑스"는 "청나라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이홍장 - 포르니에르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이렇게 "청나라ㆍ프랑스"의 전쟁이 종결되는가 싶었으나, 다시 양국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이홍장 - 포르니에르 협정"을 전달받지 못한 "베트남 주둔 청나라 군대"가 "송코이 강" 유역을 순시하던 "프랑스 군대"와 충돌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양국은 전쟁을 재개했다. "청나라"는 "흑기군" 대신 "장지동"을 "양광 총독"에 임명하고, 정식으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청나라 해군"은 "프랑스 해군"과의 전투에서 패전을 면치 못했다. "프랑스 해군"은 "대만의 기륭"을 공격함과 동시에, "복곤의 마미(馬尾)"를 공격하여, "청나라 장패륜"이 이끄는 "복건 함대"를 크게 물리쳤다. 반면 "청나라 육군"은 "프랑스 육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코 전세를 자국에 유리하게 만들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청나라" 내에서는 다시 "화친을 주장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청불전쟁"의 조정자로 "영국ㆍ미국ㆍ독일" 등이 나섰다. "영국"은 "이홍장 - 포르니에르 협정이 유효하다"는 전제 아래, 양국의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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