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 (太平天國之亂)"은 1850~1864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다. "태평천국(기독교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과 "청나라(만주족 황실) 조정"의 전쟁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명ㆍ청 전쟁" 이래로 중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 전쟁이었으며, 인류 전체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유혈 낭자한 "내전" 중 하나로 손꼽힌다.
1. 태평천국의 난 (太平天國之亂)
주요 무대는 "강소성ㆍ절강성ㆍ안휘성ㆍ호북성"이었으나, 14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북서쪽 끝의 "감숙성"을 제외한 모든 중국의 "성"을 최소 1번 이상 "태평천국 군"이 지나갔다. 19C 최대 군사 분쟁이었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난민 신세가 된 사람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 일 시 : 1850.12~ 1864.08 (14년 간) • 장 소 : 중국 강남 일대 • 결 과 : 청나라의 승리
• 교 전 : 청- 팔기군ㆍ녹영군ㆍ회군ㆍ상군(민병대ㆍ증국번 지휘)ㆍ양창대(용병) / 지원국- 프랑스ㆍ영국ㆍ미국
• 지 휘 : 태평천국 - 천왕(홍수전)ㆍ동왕(양수청)ㆍ서왕(소조귀)ㆍ남왕(풍운산)ㆍ북왕(위창휘)ㆍ익왕(석달개)ㆍ충왕(이수성)ㆍ이세현ㆍ진옥성 / 청- 함풍제ㆍ서태후ㆍ증국번ㆍ마신이ㆍ보르지기트 셍게린첸ㆍ관문ㆍ이홍장ㆍ좌종당ㆍ장국량
• 병 력 : 태평천국- 50만 명ㆍ청나라- 110만 명 이상 / 사 망 : 태평천국- 243,000ㆍ청나라- 145,000 (총 사망자: 최대 2,000만~ 7,000만 명)
※ 이홍장 (리훙장ㆍ李鴻章ㆍ1823~1901ㆍ78세): 청 말기의 한족계 거물급 중신 정치가ㆍ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ㆍ"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1851.01.01일, "청나라"의 정규군인 "녹영군"이 "광서성 금전현(현, 계평시)"의 기독교계 신흥종교인 "배상제회"를 타격했다. "배상제회 교주 홍수전"은 "자신이 야훼의 둘째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했다. "녹영군"의 "배상제회" 공격은 "금전 봉기"로 이어졌다. "홍수전"은 자신을 "태평천국의 천왕"이라고 선포했다. "청군"이 "광서성"으로 출동하자, "태평천국 군"은 1851.09월 북쪽으로 도망갔다. 1853.03.19일, "태평천국 군"은 "남경"을 점령, "남경"을 "천경(천국의 수도)"라고 명명했다.
10여 년에 걸쳐, "태평천국"은 "양쯔 강" 유역 중류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으며, 이곳은 "청나라"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비옥한 땅이었기에, "태평천국"은 급격히 불어났다. 1853.06월, "태평천국 군"은 북진하여, "북경(청나라 수도)"를 거의 점령할 뻔 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서쪽으로도 진군하여, "안휘ㆍ강소ㆍ호북"의 여러 군현을 손에 넣었다. "청나라 정규군"은 "태평천국 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대신 교착상태에 빠진 "남경 공성"에 집중했다. 그리고 "호남성"에서 "증국번"이 이끄는 "민병대 상군"이 궐기하여, "청나라 조정" 측에 가담해, "태평천국"과 싸웠는데, "상군(증국번의 민병대)"는 "태평천국 군"을 성공적으로 토벌했고, 내전의 서부전선에서 "태평천국"의 팽창은 중단된다.
1856년, "태평천국 동왕(東王) 양수청"이 "쿠데타(천경사변)"을 시도하여, "태평천국"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태평천국"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동안 "상군"은 "호북성ㆍ강소성"의 대부분을 재 회복했다. 1860.05월, "태평천국 군"은 1853년부터 "남경"을 공격하여 "청군"을 무찔렀고(제2차 강남대영 공략), 이때 "청나라 정규군"이 거의 전멸함으로써, "태평천국 군"은 "청나라"에서 가장 부강한 지역이었던 남쪽의 "강소성ㆍ절강성"을 침략할 수 있는 길이 트이게 되었다. "태평천국 군"이 "강소성"을 재탈환하는 동안, "상군(증국번의 민병대)"는 "양쯔 강"을 따라 내려가며 진군, 1861.09.05일 "안경"을 점령했다.
1862.05월, 친정부 "민병대"는 이제 "남경"을 직접 포위하고 공성하기 시작했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태평천국 군"이 수차례에 걸쳐, 포위망을 뚫으려 했음에도 전선을 유지했다. "태평천국 천왕 홍수전"은 1864.06.01일 사망하고, 직후인 07.19일 "남경"은 함락되었다(천경 공방전). "남경"이 무너진 뒤, "증국번ㆍ그 제자들ㆍ이홍장ㆍ좌종당" 등은 "제국의 구원자"로 추앙되었고, 19C 말 중국 정치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절강성" 북부에서 "태평천국"의 잔당이 "홍천귀복(홍수전의 어린 아들)"을 앞세워 항전했으나, "홍천귀복"은 1864.10.25일 사로잡히고, 그 이후 "태평천국" 잔당은 "강소ㆍ절강ㆍ복건"의 산악지대로 밀려났고, 중국 대륙 최남단인 "광동성"까지 쫓겨났다. 그리고 "광동"에서 최후의 "태평천국" 잔당 지도자인 "왕해양"이 1866.01.29일 토벌되어, "태평천국의 난"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2. 홍수전 (洪秀全ㆍ훙슈취안ㆍ1814~1864.06.01ㆍ50세) "광둥 성" 태생ㆍ하카계 출신
태평천국 천왕ㆍ태평천국(太平天國) 종교국가 건국자ㆍ청대 종교가ㆍ혁명가ㆍ"청조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 국가인 "태평천국"을 세워, "청조"에 반기를 들어 투쟁했다.
• 지 위 : 태평천왕(太平天王) • 재 위 : 1851.01~ 1864.06 • 종 교 : 배상제회 • 배우자 : 정실 "뇌석영(赖惜英)"외 첩 86명 • 사 망 : 자결ㆍ태평천국 천경 (천국의 수도ㆍ남경)
"홍수전"의 최후ㆍ서거를 놓고, 불확실하나, 여러 일설이 있다. "천경(난징)"이 함락된 후, "증국번(상군 민병대 대장)"은, "수만 명이 최후까지 저항하였고, 홍수전은 힘이 다하여, 자살했다"고 공술하지만, 체포되어 처형당한 부하들이 한 공술이나, 당시 목격담에 의하면, "부족한 식량을 구하고자, "천로(하늘의 이슬ㆍ성서의 만나)"가 내린 풀을 떡으로 먹던 "홍수전"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고도 한다. "증국번"은 "홍수전이 자살(혹은 병사)한 무덤을 파헤쳐, 홍수전의 시체를 검시하고, 현장에서 소각했다"고 한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과거에 응시하면서, 평범하게 살던 어느 날,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믿은 이후, "기독교 신자"가 되어, "양수청(동왕)"과 함께 "상제회"를 만들어 포교하였다. 종교 형식을 취한 "상제회"는 점점 세력을 넓혔고, "교주 홍수전"은 지방 유력자에 맞먹는 권력을 행사하여, 마침내 1851년에 "태평천국"을 건국하고, "천왕(天王)"이 되었다. 자신을 따르던 주요 간부들을 "왕"으로 세우고(동왕(양수청)ㆍ서왕(소조귀)ㆍ남왕(풍운산)ㆍ북왕(위창휘)ㆍ익왕(석달개)), 정식 국가 체계를 갖추었다.
초창기 "청군"에 쫓겨 다니던 "홍수전"은 1853년에 "난징"을 마침내 점령하고, "장강" 이남에 자신의 세력을 떨쳤는데, 그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청조"에 대항하였으므로, "태평천국"은 당시 중국 민중에게 열렬히 지지받았다. 하지만, 잦은 "내부 권력투쟁" 끝에, "홍수전"의 실질적인 세력은 크게 감소한데다가, "양수천(동왕)은 "천부 하범"(여호와의 혼이 육신에 내림)ㆍ"소조귀(서왕)"은 "천형 하범"(예수의 혼이 육신에 내림)이라 하여, "홍수전"을 능멸하였다.
"석달개(익왕)"을 제외한 "왕 4인"은 서로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려고 싸웠고, 이런 상황은 "홍수전"이 "석달개(익왕)"을 불러들여, "왕 4인" 중 마지막으로 권력을 휘두른 "위창휘(북왕)"의 잔당을 제거한 (186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홍수전"은 친형제인 "홍인발ㆍ홍인달"을 "왕"으로 세워,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였다. "석달개(익왕)"은 "홍수전" 측근들과 벌인 권력투쟁에 실망하여, "난징"에서 물러나, "쓰촨 성" 지방에 근거를 잡았다.
1862년, "청"은 "상군(증국번의 민병대)"을 필두로 하는 "태평천국 토벌군"을 파견하고, "영국계 외인부대"도 이에 호응하였다. "태평천국"의 서방을 방어하던 "석달개(익왕)"는 1863년 "청군"에게 공격당해, "청두"에서 "책형"으로 죽었고, 1864.06.01일 "홍수전"도 토벌군에게 패하리라 예감하고, "난징"에서 자결했다.
이후 1863.07.19일 "난징"이 완벽한 함락당하여, "태평천국"은 멸망하고 만다. "난징 성"에 있던 노약자ㆍ부녀자들은 식량ㆍ식수가 고갈되어,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고, 결국 "정부군"에게 학살당하기에 이르렀다.
3. 원도성세훈 (原道醒世訓)
"홍수전"이 저작한 "상제신앙(上帝信仰)"의 포교문서(布敎文書)이다. 이 문서는 그가 "우인(友人) 이동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광시성 귀현"에서 "상제 신앙"의 포교에 종사한 후, "광둥성 화현"의 향리로서 귀환한 그 다음해, 즉 1845년에 집에서 작성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해에 제작된 "원도구세가"와 이듬해 제작된 "원도각세훈"과 함께, 1852년 "태평천국"의 "태평조서(太平詔書)"로 집성ㆍ간행되었다. 이 문서 속에서 그는 "천하의 모든 인간들이 상제를 아버지로 하는 형제자매"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1개의 가족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재화는 개인의 사유가 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분배ㆍ소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장년(長年)과 강자는 노유와 약자를 부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을 게시하고, 그 이상은 약탈하고, 서로 죽이는 세상을 변혁하여, 공평 정직한 세상으로 만듦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에 입각한 "원시공산제적(原始共産制的)"인 사고방식이며, 동시에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 논술된 "대동(大同)의 세계"를 의미하거니와, 이 사상은 후에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에서 완결되었다. 이 문서는 "태평천국"의 초기 혁명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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