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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사건- 1600~1874 : 동인도 회사 (East India Companyㆍ영국)

by 당대 제일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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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동인도 회사 (East India Company잉글랜드 동인도 무역상 연합회사)"는 1600년, "영국"이 "인도ㆍ극동지역"과 무역 촉진을 위해 설립한 회사이다.

 

1. 영국 동인도회사 (잉글랜드 동인도 무역상 연합회사)

 1595년, "네덜란드" "인도 항로"로 진출

1595, "네덜란드"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설립되었다 "엘리자베스 1"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 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 "합자(合資) 기업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00~1874 : 합자회사그레이트브리튼 왕국본사 : 잉글랜드 런던

 1600~ 1708 : 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   /   1708~ 1873 : 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

1600, 국왕의 특허를 받아 조직되었으며, 독점적인 무역기구로 발족해, 나중에는 정치적 성격까지 띠게 되었고 18C ~ 19C 중엽까지 "인도"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동인도의 향료 무역"에 참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동인도의 향료 무역" "스페인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었으나, 1588 "영국"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향료 무역"에 종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612년까지 이 회사는 투자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개별 무역 업무를 했다 이 회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인"들과 대립했으며, "포르투갈인"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③ 1612년, "인도"에서 "포르투갈" 격퇴

1612, "인도"에서 "포르투갈인"들을 격퇴함으로써, "무굴 제국"으로부터 무역 특혜를 얻어냈다 "남부 인도"를 상대로, "향료"를 사들이고, "견직물 염료초석" 등을 판매해 기반을 잡아나갔으며, 활동 범위도 "페르시아만동남아시아동아시아"까지 확장되었다.

 18C 중엽 이후, "면제품 무역"이 쇠퇴하고, "중국 차() 수입"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중국" "차 무역"에 소요되는 자본금은 "아편 수출"로 충당되었으며 이는 결국 "아편전쟁(1839~1942)"으로 이어졌다.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에 대한 반발이 대두되자, 경쟁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708년 이들 회사는 "통합 동인도회사"라는 이름으로 합쳐졌다.

⑤ 통합 동인도회사

"통합 동인도회사"의 이사회는 위원회를 통해 활동하는 24명의 임원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임원들은 매년 주주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1757, "벵골 통제권"을 손에 넣자, "인도"에 대한 정책은 당분간(1757~1773) 주주회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주주회의에서는 주식 매입을 통해 투표권이 확보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은 정부의 개입을 초래했으며, "규제법(1773)총리 피트의 인도법(1784)"은 의회에 책임을 지던 "통제위원회"를 통해, 정부가 "동인도회사"의 정치적 방침에 대해 통제를 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이후 이 회사는 점차로 "통상부문정치적 영역"에서의 통제권을 상실해갔다 "통상부문"에서의 독점은 1813년에 끝이 났으며, 1834년부터는 "인도"에서 "영국 정부"의 단순한 경영대리인 수준에 머물렀다. 1857 "세포이 항쟁" 이후에는 "영국 정부"의 대리인 역할마저 상실했으며, 1873년에는 "법인체"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2.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1602, "네덜란드" "인도양 무역"을 보호하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을 돕기 위해 세운 무역회사로, 17C 전반에 걸쳐, "동인도제도"에서 강력한 "네덜란드 상업제국"의 수단으로 번창하다가, 1799 해체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 회사에 "희망봉- 마젤란 해협" 사이의 바다에서 무역을 독점하고, 원주민 토후들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또한, 요새를 짓고, 군대를 지닐 수 있는 권한과 "네덜란드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관리들을 통해 행정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얀 피터스존 쿤(1618~23)안톤 반 디멘(1636~45)" 등 강력한 총독의 통치 아래, 이 회사는 "영국 함대"를 물리쳤으며, "포르투갈"을 제치고 "동인도제도"를 장악했다.

1619년 이 회사는 "자카트라"의 이름을 "바타비아(, 자카르타)"로 바꾸고, 그곳을 "자바"와 그 주변 섬들을 정복하기 위한 거점으로 이용했다 17C 말부터는 주요교역과 해상세력으로서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대신 "자바" 일에 더욱 몰두했다. "강제 인도(引渡)공출제도"를 도입해 원주민 토후들을 더욱 엄격히 감독했다.

18C에 들어와, 상업에 집중해 있던 해운기업의 형태에서, 농산물 생산에 주력하는 느슨한 지역 기구로 변했다 18C말 경, 부패와 막대한 부채에 휩싸이자, "네덜란드 정부"는 마침내 1799 "회사의 특허장"을 취소하고, 부채와 재산을 넘겨받았다.

3. 프랑스 동인도회사 (French East India Company)

1664~1719, "프랑스" "인도동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무역을 관리하기 위해서, "루이 14"세의 재정장관이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설립한 무역회사

"프랑스 상인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얻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콜베르"는 많은 상인들에게 가입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프랑수아 샤르팡티에"를 설득하여, "프랑스인"들이 "후추계피목면"을 외국 상인들로부터 사들여야 하는 이유를 들어, 이 회사에 참여할 경우, 가져올 이득에 관한 강력한 선전문을 쓰도록 했다.

" 14" 119개 시()에 편지를 써서, 상인들에게 이 회사에 기부하는 문제를 토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대부분 상인들은 이를 "얄팍하게 은폐된 세금징수 조치"라고 여기고, 가입 권유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1668년경 "동인도회사"의 가장 많은 액수를 투자한 사람은 "왕 자신"이었고 회사는 왕의 통제를 받았다.

이미 설립된 네덜란드동인도회사와의 끊임없는 경쟁속에서 프랑스동인도회사는 번번히 네덜란드인들에게 시달리고 물품을 몰수당하기까지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시장개척에 나섰다. 이 회사는 1670~75년의 짧은 기간 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1680년경에 이르자 수익을 거의 올리지 못하고 많은 선박들은 수리를 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1719년 프랑스동인도회사는 짧은 기간밖에 존속하지 못한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에 흡수되었다.

이 회사는 심각한 재정적 파탄을 가져온 "재정장관 존 로"의 재정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뒤이어 1720년에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붕괴했을 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뒤 이 회사는 "프랑스 인도회사"라는 명칭으로 재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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