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孫子兵法)"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兵法書)로, 춘추시대 "오왕 합려"를 섬기던 "손무(孫武ㆍ손자(孫子)ㆍBC 544?~496?ㆍ48세)의 저작으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13편이 저술되었으나 "전국시대"를 거쳐 광범위하게 유포ㆍ필사되다보니 후대 사람들이 가필ㆍ첨삭하면서 다양하게 중복ㆍ수집되어 서한 초기 "한무제ㆍ한성제" 시기에 선진시대의 대대적인 문헌의 수집ㆍ감수ㆍ목록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에 "유향"이 82편의 "오손자 병법(吳孫子兵法)"으로 정리하였다.
1. 손자 (孫子ㆍBC 544?~496?ㆍ48세ㆍ본명 : 손무 (孫武))
손자병법 (孫子兵法) 저자ㆍ군사전략가 (전국시대)ㆍ제나라 (산동성) 출신
보통 "손자(孫子)"는 "손무(孫武)ㆍ5대손인 손빈(孫臏)"에 대한 경어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략가(손자(제(齊)나라)ㆍ오기(위나라)ㆍ오자서(초나라))중 한사람ㆍ러안(樂安: 山東省) 출생 (※ 제갈공명 (와룡선생ㆍ181~234ㆍ53세ㆍ중국 삼한시대 촉한ㆍ중국 산둥성 출생)
BC 6C경 "병법 13편"을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에게 보이고, 그의 장군이 되었다. 절제ㆍ규율 있는 "육군"을 조직하게 하였다고 하며, "초(楚)ㆍ제(齊)ㆍ진(晋)"등의 나라를 굴복시켜 "합려"로 하여금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① 손자병법 (孫子兵法) : 손자ㆍ오손자 병법ㆍ손무병법
춘추시대 말, "손자(孫子)ㆍ손무(孫武)"가 저술하였다는 병서(兵書)ㆍ"춘추" 말기의 군사학설ㆍ전쟁 경험을 모두 묶은 책이며, 단순한 국지적인 "전투의 작전서"가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要旨)ㆍ승패의 기미(機微)ㆍ인사의 성패(成敗)" 등에 이르는 내용을 다룬 책이다.
"한서 예문지"에는 82편, 도록 9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13편 6,111자 만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 있는 "송본"에는 "계ㆍ작전ㆍ모공ㆍ형ㆍ세ㆍ허실ㆍ군쟁ㆍ구변ㆍ행군ㆍ지형ㆍ구지ㆍ화공ㆍ용간" 등의 13편만이 전해진다.
② 손자병법 원문 제3편 "모공 (謀攻) 편" :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는 "싸우지 아니하고도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은 착한 자의 으뜸이다ㆍ적을 알고 나를 알면 100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ㆍ우세한 병력의 집중ㆍ민첩한 기동작전 등을 가르치고 있다.
2. 손빈 (孫臏ㆍBC 382~316ㆍ66세) : 손무 (孫武)의 5대손
손빈병법 (孫臏兵法) 저자ㆍ군사전략가 (전국시대)ㆍ제나라 (산동성) 출신
전설상의 천재 병법가인 "귀곡자(鬼谷子ㆍ귀곡선생)"의 문하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수제자ㆍ "귀곡자"가 재능을 알아보고, "손무"가 지었으나 비밀리에 전수되어 세간에 알려지지 않던 "손자병법"의 전체내용을 전수해주었다고 전해진다. "귀곡자" 수하에서 "방연"과 같이 병법을 배워, "방연"은 "위나라 혜왕"의 장군이 되었으나, "방연"은 "손빈"에 대해 열등감이 있어, "손빈"을 위나라로 초대하여, 첩자로 모함하였다.
"빈형(무릎 뼈를 도려내는 형)"과 얼굴에 먹칠하는 형을 당하게 된다. 그 후 제나라의 사신이 위나라로 왔을 때 탈출하여, "제나라 위왕"의 군사가 된다. BC 367년 "위나라"군사를 "계릉"에서 대파하고, BC 353 "조나라"를 도와 "위나라"군사를 "하남"에서 격파하였다.
① 손빈병법 (孫臏兵法) : 손자병법 (孫子兵法)을 앞선다는 평가
"손빈"의 언행을 모은 것으로, BC 320년경에 만들어진 책ㆍ"한(漢)나라" 때의 묘에서 발굴된 병법서이다. "손빈"의 병법서도 "손자"가 되지만, 이 병법서는 "손자병법"과 구별하기 위해, "손빈병법"이라 했다.
3. 합려 (闔閭ㆍ공자광ㆍ재위 BC 515~496ㆍ춘추시대 오(吳)나라 제24대 왕)
"제번(諸樊)"의 아들이며, "부차(夫差)"의 아버지ㆍBC 515년 왕위계승 싸움에서 자객을 이용하여 "왕료(王僚)"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도읍인 "오(吳)"에 큰 성을 쌓고, "오자서(伍子胥)ㆍ손무(孫武)"로 하여금 군비를 정비케 한 뒤, BC 506년 "초(楚)나라"를 대거 공격하여, 도읍 "영"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월(越)나라"가 침입해오고, "진(秦)나라"도 "초"를 도왔으며, 또 동생 "부개"가 이에 편승해 자립했으므로, "합려"는 귀국해 "부개"를 패주시켰다. 얼마 뒤 "초나라"는 불가피하게 도읍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초(楚)나라"의 신하였던 "오자서(伍子胥)"를 재상(宰相)으로 삼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병서인 "손자(孫子)"의 저자인 "손무(孫武)"로 하여금 군대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초나라"를 위협, 결국 그 수도를 공략하였고, "오나라"의 세력을 중원(中原)에까지 넓혔다. BC 496년 "월"나라 왕 "윤상(允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월나라"를 토벌, "월왕 구천(勾踐)"과 싸웠으나 부상을 당한 뒤, 아들 "부차"에게 보복을 맹세케 하고 죽었다. 2년 후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4. 부차 (夫差ㆍ재위 BC 496~473ㆍ합려 아들ㆍ춘추시대 오(吳)나라 제25대 왕)
아버지인 "합려"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패하여 죽자, 유언을 받들어, BC 494년 "월(越)나라"에 복수하였다. 책사(策士) "오자서(伍子胥)"가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진언하였으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구천"을 "후이지 산(會稽山)"에서 근신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북진(北進)정책"에만 신경을 쓰는 동안에, 설욕에 여념이 없던 "구천"이 "범려(范蠡)" 등의 보좌로 공격해 와서 태자를 사로잡았다. "화의(和議)"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2~3차례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는 멸망하였다.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살했다.
① 와신상담 (臥薪嘗膽ㆍ누울 와ㆍ섶 신ㆍ맛볼 상ㆍ쓸개 담)
섶(땔감)에서 누워 자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복수나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가오는 어떠한 고난도 참고 이겨낸다는 말로, 자신의 몸을 괴롭히면서까지 원한을 잊지 않는 지독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춘추 전국"시대, "오월"이 서로 대립했을 때,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을 공격하다가 결국 "구천"에게 대패하고 전사했는데, 아들 "부차"가 이를 원통해했다. "부차"는 매일 밤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누워 잠을 청했고, 방에 드나드는 사람은 빠짐없이 "부차야! 너는 월왕구천이 아비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했으며, "부차"도 "아니오! 절대 잊지 않았소이다."라고 답하면서 이를 갈았다. 그는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긴 끝에, "월"을 침공하여 "구천"을 굴복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복수에 성공한 다음 "와신(臥薪)"은 그만뒀다.
이때 굴욕을 맛본 "구천" 또한 원통해서 "오나라"에서 겪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방 천장에 쓰디쓴 "곰 쓸개"를 매달아놓고 매일 핥으면서 "너는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라고 스스로 외치며, 복수를 다짐했다. 결국 "구천"은 "오"를 함락시키고 "부차"를 자결하게 만들어 복수에 성공했다.
② "구천이 "오나라"에서 겪은 치욕
왕이었던 "구천"은 "오나라"에서 "부차"의 하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몇 년간 치욕을 겪다가 "범려"의 공작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하여, 매일 쓰디 쓴 쓸개를 핥아먹으며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범려"의 계책에 따라 "오왕 부차"에게 재물과 "미녀"서시"를 보내서 "부차"가 국사에 전념하지 않고 쾌락에 빠지게 만들었다. "구천"의 아내가 "부차"의 첩 노릇을 하기도 한다.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차"가 병이 들자, "범려"의 간언을 듣고 "부차"의 똥을 핥았다. "구천"이 "부차"의 마부 노릇을 한 적도 있다.
5. 오자서 (伍子胥ㆍBC ?~484ㆍ자 : 자서 (子胥))
"오자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오자병법서"를 쓴 "오기"보다는 1세대 정도 이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으며, "오자서"는 B.C 484년에 죽었고, "오기"는 B.C 381년에 죽었으므로, 죽은 시기가 거의 100년 차이가 난다. "오자서"는 "초나라"에서 떠난 후 "오나라"를 섬겼으며,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와 함께 "초나라"를 쳐서 이기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① "춘추" 말기 "초(楚)나라" 대부 "오사(伍奢)"의 2째 아들이다.
선조는 원래 성이 건(乾)이고, 이름이 황(荒)이었는데, "주(周)나라"에 공을 세워 "오철공(伍哲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오(伍)"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태부(太傅)지위에 있었으나, B.C 522년 태자 옹립의 내분에 말려들어, 아버지 "오사"를 시기한 "비무기"의 음모로 "초나라 평왕"에게 아버지ㆍ장자인 "상(尙: 오자서의 형)"과 함께 "평왕"에게 처형당해서, "오나라"로 도망. 오자서는 "녕(寧: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 일대)ㆍ정(鄭: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등의 나라를 거쳐 아슬아슬하게 "오(吳: 지금의 강소성 소주)"나라로 달아나, 오나라의 힘을 빌려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였다. 요리사 "전제"를 기용하여, "오나라 왕 요"를 죽이고, "태자 광(합려)"을 왕으로 추대 • 일모도원 :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바쁘다. 그러니, 도리를 역행할 수밖에 • 굴묘편시 :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가한다. (복수 대상이었던 "초나라 평왕"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낸 뒤, 300번이나 채찍질) • 어복장검 : "전제"는 "요"가 "물고기 요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내, 몇 달 동안 최고 요리사에게 "물고기 요리"를 배워, 철통같은 방어막을 뚫고, "물고기 배" 속에 칼을 감추고, "물고기 요리"를 바치는 척하다가, 칼을 꺼내 "요 왕"을 암살
② 오자서는 "오나라"에 도착한 이후, "공자광(公子光)"을 보좌하였다.
BC 515년 "공자광"은 "오나라"의 왕위를 탈취하여, "오자서"를 재상에 임명했다. BC 506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 즉 공자광)"는 "손무(孫武: 손자병법의 저자)"를 대장, "오자서"를 부장으로 삼고, 6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손무ㆍ오자서"는 군대를 이끌고, "회수(淮水)유역"에서 "한수(漢水)"로 들어가 5전 전승을 거두고 "초나라"의 수도 "영(郢: 지금의 강릉(江陵))"을 함락시켰다. 이때 "초나라"는 "평왕"은 이미 죽고,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다. 오자서는 직접 "초나라" 왕실을 점령하여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갚았다.
③ BC 496년 "오나라 왕 합려"는 "월(越)나라 구천(勾踐)"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었다.
"합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아들 "부차(夫差)"는 "오자서"를 "상국(相國)"에, 대부 "백비(伯噽)"를 "태재(太宰)"에 임명하였다. 2년 후, "오나라 왕 부차"는 절치부심 끝에, "월나라 왕 구천"을 "부초(夫椒)"에서 격파하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오자서는 지금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 "부차"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였으나, "부차"는 그의 말을 끝내 듣지 않고 "구천"을 용서해주었다.
당시 "월나라"에서는 "구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비"에게는 많은 뇌물을 써서 "부차"를 설득하도록 하고, "부차"에게는 많은 미인들을 바쳐 그의 환심을 사두었었다. 여기에서 바로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자서는 이러한 "월나라"의 계책을 간파하고, 누차 "부차"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④ 오자서는 "부차"의 무능으로 "오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임을 예감했다.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두 아들을 "제나라"의 친척 "포목(飽牧)"과 "유명(維明)"의 집에 맡겨두고 왔다. BC 484년 "부차"는 제후의 패주(覇主)를 차지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는 그것을 반대하고, "월나라"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경고하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부차"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백비" 등이 "오자서가 제나라와 결탁하였다"고 모함하자, "부차"는 그들의 참언을 믿고, 오자서에게 "속루(屬鏤)의 검"을 주어 자결을 명했다.
⑤ 오자서는 자결하기 전에 비분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부차에게 말하였다.
"그 옛날 선왕들께는 대대손손 보좌를 해온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난제에 부닥쳐도 그 득실을 잘 헤아려서 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을 버리고, 우매한 간신배들을 가까이하여 국정을 전횡하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대왕의 뜻에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왕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부하들에게 "내 눈을 도려내어 수도 고소성(姑蘇城: 지금의 강소성 소주) 동문에 걸어두라! 월나라 군대가 입성하는 꼴을 똑똑히 봐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부차"는 크게 분노하며, 오자서의 시신을 찢어 "전당강(錢塘江)"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BC 473년 마침내 "월나라"의 공격에 크게 패한 "부차"는 자결하면서, "오자서를 만날 낯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오자서의 병서인 "오자서(伍子胥)" 10편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고 있다. 오자서의 고향 "임리현(臨利縣)"에는 "오상사(伍相祠)ㆍ오자서 묘(伍子胥廟)ㆍ오자서수부(伍子胥帥府)"등의 건물을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6. 오기 (吳起ㆍBC 440~381ㆍ59세ㆍ오자(吳子)로 통칭ㆍ76전 무패의 장수)
춘추전국시대의 병법가, 위(衛)나라 사람, 증자(曾子)에게 배우고, 노군(魯君)을 섬겼다. "손무(孫武ㆍ孫子)"와 병칭되는 병법가로서, "오자"라는 병법에 관한 책을 남겼다.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하였을 때, "노나라"는 그를 장군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는 "제나라"여자를 아내로 삼고 있었으므로 의심을 받는다고 아내를 죽여 충성을 나타낸 뒤, "노나라" 장군으로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노나라"사람들이 오기를 모질고 박정한 사람이라고 왕에 고하여, "노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위(魏)나라"로 가 "문후(文侯)"를 섬겨 장군이 되고, "진(秦)나라"를 쳐서 5성(城)을 빼앗았다. 병사들을 사랑하여 생활을 같이 하였고, "문후"의 아들 "무후(武侯)"가 "위나라" 산천이 험한 것을 자랑하자, 나라의 자랑은 군왕의 덕에 있다고 설파하여 "문후"를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나라" 공주가 그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다시 "위나라"를 떠나 "초(楚)나라"에 가서 "도왕(悼王)"의 재상이 되어, 법치적 개혁으로 "초나라"를 강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초나라" 귀족들의 질시를 받아, "도왕"이 죽은 뒤, 대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피살되었다. 손무(孫武: 孫子)와 병칭되는 병법가로서, "오자"라는 병법에 관한 책을 남겼다.
① 오자(吳子): 중국 전국시대의 병법서
"손자(孫子)"와 함께 일컬어지는 명저로, 1권 6편. 저자에 관하여는 통상 "오기(吳起, 吳子)"와 그 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도국(圖國)ㆍ과적(料敵)ㆍ치병(治兵)ㆍ논장(論將)ㆍ응변(應變)ㆍ여사(勵士)"의 6편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손자"에 비하여 그 정채(精彩)가 뒤진다 하겠으나, 지론(持論)이 곧고, 예의를 존숭하여 교훈을 밝힌 점은 "유교(儒敎)"를 곁들인 병법서라 할 수 있으며, 예로부터 널리 읽히고 있다. "명나라 유인(劉寅)"의 "오자직해(吳子直解)", "물조래(物徂徠)"의 "오자국자해(吳子國字解)"등의 주해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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