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묵자는 원래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던 유학자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교"는 부담스러운 "의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종교적 가르침을 너무 소홀히 한다고 확신하게 되어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보편적 사랑, 즉 "겸애(兼愛)"를 기본이념으로 삼는 그의 철학은 수백 년 동안 유학과 맞섰고, "묵가(墨家)"라고 부르는 종교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1. 묵자 (墨子ㆍBC 480~390ㆍ90세ㆍ본명 : 묵적(墨翟))
① 생애
공자가 죽은 지, 몇 년 뒤에 태어남ㆍ 공자는 모든 점에서 볼 때, 귀족적인 기질과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화려하고 웅장한 "주나라" 초기의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반면에 묵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끌렸고, "주나라"보다 훨씬 오래된 "원시시대"의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과 솔직한 인간관계를 꿈꾸었다.
그러나 묵자의 인생은 중요한 부분에서는 대부분 "공자"의 인생과 비슷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고, 중국 고전의 전통에 따라 시를 잘 지었다. 또한 잠시 벼슬에 나섰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군주를 만나기 위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돌아다니며 대부분의 인생을 보냈다. 그러나 각국을 돌아다녀도 그가 찾는 군주는 없었기 때문에, 학교를 운영하면서 제자들을 관직에 추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고, 자신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스승이었기에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공격적인 전쟁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곤 했다
② 사상
사상가로서 "방법론"을 강조한 점이 독특하다.(묵변) 판단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판단기준은 3가지 검증(三表)과 4가지 기준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말한 "3가지 검증"이란, 사상가들이 어떤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반드시 "그 명제의 근거(本之)ㆍ 입증 가능성(原之)ㆍ적용 가능성(用之)"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4가지 기준"은 사상가들이 어떤 명제를 제시할 때에는 반드시 그 명제가 나라와 백성에게 가져올 수 있는 이익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익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는 것(富)ㆍ인구를 늘리는 것(象)ㆍ위험을 제거하는 것(安)ㆍ혼란을 통제하는 것(治)"이었다. 그에게 있어 이런 검증과 기준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었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무엇을 좋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것이 무엇에 좋은가를 분명히 입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묵자의 철학체계를 지탱하고 있는 토대는 "보편적 사랑"이다.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편애" 때문이고, 따라서 이런 혼란을 없앨 수 있는 치료법은 "편파성을 보편성으로 바꾸는 것"(이것은 그리스도의 박애사상과 놀랄 만큼 비슷함)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남의 나라와 도시를 자신의 나라와 도시로 생각하면 아무도 남의 나라를 공격하거나, 남의 도시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개인의 행복에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세계 평화와 인간의 행복은 보편적 사랑의 실천에 달려 있다.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실현 불가능하다거나 부모의 특수한 권리를 무시한다는 등의 수많은 반론이 제기되었지만, 그는 보편적 사랑의 원리가 실용적인 정당성과 신성한 구속력을 내포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는 "보편적 사랑과 상호이익"을 함께 이야기했으며, 이 원칙이야말로 "인간의 길"인 동시에 "신(神)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③ 묵가 (墨家ㆍMohismㆍMoism)
BC 5C에 "묵자(墨子)"가 창시한 중국의 철학 유파로, 이 철학은 B.C 3세기경까지 당시 지배적이던 "유교이념"에 도전했다. 묵자는 "겸애(兼愛: 박애주의)"를 주장했고, 하늘 또는 "상제(上帝)"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유교"가 형식적인 의식이나 예식을 중시하는 것은 국고를 낭비하는 짓이라고 개탄했다.
"유교"의 도덕관념인 "인(仁)"은 부모나 가족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을 구별한 반면, 묵가는 "보편적인 사랑", 즉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사랑"이라는 "묵가"의 개념은 "유교 국가"가 사회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실제적 바탕이자 이론적 토대인 가족의 화합에 근본적으로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교 사상가들, 특히 "맹자(孟子)"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④ 종교관
묵자의 종교관은 다른 중국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것이다. 그는 "선조"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가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세상에는 하늘이 있고 하늘에는 뜻(天意)이 있으며, 인간은 이 하늘의 뜻에 복종해야 하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평가하는 통일된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묵자는 생각했다.
"우리가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하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은 정의를 원하고 불의를 싫어할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상이나 벌을 준다.
묵자의 철학체계는 그가 자신의 삶에서 모범을 보였듯이, 보편적 사랑과 금욕을 신조로 삼았으며, 그가 죽은 후 "거자(鉅子ㆍ묵가 집단의 총 우두머리)"들의 지도 하에 상당히 많은 신자를 거느린 체계적인 종교로 구현되었다. 이 종교는 여러 세대에 걸쳐 번창하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묵자의 가르침은 수백 년 동안 계속 많은 존경을 받았다. B.C 2세기 초까지 학자들은 "유교"와 "묵가"를 2개의 주요한 사상 학파로 함께 언급했다. 그러나 B.C 2세기 초부터 "묵가"는 지식인의 무대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그의 고귀한 인격은 존경하면서도, 그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엄격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묵자가 재발견되고. 그의 가르침이 재평가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⑤ 묵자
"묵자"는 묵자와 그의 제자들이 남긴 주요저술을 집대성한 것으로, 묵자의 "정치ㆍ윤리ㆍ종교적인 가르침"의 핵심을 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묵자"는 총 53편인데, 다시 5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에서 "10가지 주요덕목"을 개괄하고 있는 2번째 부분이 바로 "묵자"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그 10가지 덕목은, 상현(尙賢ㆍ어진 사람을 존경함)ㆍ상동(尙同ㆍ윗사람의 뜻에 동조함)ㆍ겸애(兼愛ㆍ보편적 인류애)ㆍ비공(非攻ㆍ침략 전쟁에 대한 비난)ㆍ절용(節用ㆍ근검절약), 절장(節葬, 장례의 간소화)ㆍ천지(天志ㆍ하늘의 뜻과 그에 따른 상벌)ㆍ명귀(明鬼ㆍ상벌을 내리는 귀신을 섬김)ㆍ비악(非樂ㆍ낭비적 활동인 음악에 대한 비난)ㆍ비명(非命ㆍ숙명론에 대한 반대)등을 말한다.
"겸애"란 사람은 "자신(自身)ㆍ자가(自家)ㆍ자국(自國)"을 사랑하듯이 "타인(他人)ㆍ타가(他家)ㆍ타국(他國)"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儒家)"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愛)"을 주의(主意)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兼愛交利)"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節葬論)"과 "음악(音樂)"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非樂論)"으로 전개된다. 한편, 정치에 대해서는 "상동론(尙同論)"이 있으며, 그 기초로서 "천지론(天志論)"이 있다. "천지론"은 "절대적ㆍ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天意)"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상동"이란 "아랫사람(下)은 윗사람(上)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인일의(一人一義) 십인십의(十人十義)이므로, 방치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락민은 이장에게, 이장은 면장에게, 점차 아래에서 위로 상동(尙同)하여, 그 정점에는 최고의 현자(賢者)로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天子)가 있다"는 것이다.
"명귀론(明鬼論)"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비명론(非命論)"은 이른바 운명을 부정하지만, 그 참뜻은 명(命: 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묵자"는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10론" 이외에 일종의 논리학을 풀이하는 "편(編)"과 "비공론(非攻論)"에서 출발한 "방어술(防禦術)", "축성술(築城術)"에 관한 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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