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韓非子ㆍBC 280?~233ㆍ47세)"는 "한(韓)의 왕족"으로, "진(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에게 배워, 뒷날 "법가(法家)"의 사상을 대성했다.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자"는 타고난 말더듬이였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미칠 바 못되었다.
1. 법가 (法家): 관자 (管子, 관중)ㆍ신불해(申不害)ㆍ상앙(商鞅)ㆍ한비자 = 부국강병
① 한비자 (韓非子ㆍBC 280?~233ㆍ47세) 생애
"진"의 "시황제"는 한비의 "고분(孤憤)ㆍ오두(五蠹)"의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까지 감탄하였다 한다. "한"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누누이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진"의 공격을 받자, 화평의 사신으로서 "진"나라로 갔다.
"시황제"는 한비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에 머물게 하려 하였으나, "이사"는 내심 이를 못 마땅히 여겨, "시황제"에게 참언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② 한비자 : 한비 (韓非)와 그 일파의 논저 (論著)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大著)ㆍ"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를 주창한 "한비(韓非)"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ㆍ원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을 후에 "당나라"의 "한유(韓愈)"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중기(B.C 2세기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오두ㆍ현학(顯學)ㆍ고분(孤憤)"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나 "묵가"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군주는 "측근ㆍ중신ㆍ유세가(遊說家)ㆍ학자ㆍ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ㆍ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난(難)ㆍ난일(難一)ㆍ난사(難四)ㆍ난세(難勢)ㆍ문변(問辨)ㆍ문전(問田)ㆍ정법(定法)"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난세"와 "정법"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에 속하는 "신자(愼子)ㆍ신자(申子)ㆍ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설림(說林)ㆍ내외저설(內外儲說)ㆍ십과(十過)"등의 제편(諸編)ㆍ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ㆍ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유도(有度)ㆍ이병(二柄)ㆍ팔간(八姦)" 등은 오래된 것이고, "심도(心度)ㆍ제분(制分)"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 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 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주도(主道)ㆍ양각(揚)ㆍ해로(解老)ㆍ유로(喩老)" 등의 4편ㆍ"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육반(六反)ㆍ충효"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편은 정론(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 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초견진(初見秦)ㆍ존한(存韓)"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ㆍ법가ㆍ명가(名家)ㆍ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ㆍ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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