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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사건- BC 213~206? : 분서갱유 (焚書坑儒)ㆍ시황제

by 당대 제일 2022.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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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 (焚書坑儒)"는 "진나라 시황제"가 "사상 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농서" 등을 제외한 각종 서적들을 불태우고 수백 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언론ㆍ문화에 대한 탄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당시 불태운 서적들은 현대와 달리 대나무로 만든 기록수단인 "죽간"을 말한다. "분서 정책"에 대하여, 유생들은 크게 불만을 품고, "시황제"를 비판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시황제"는 이들 비판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보다 강경한 탄압 정책을 취했고, 마침내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 분서갱유 (焚書坑儒)진화 (秦火)

① 분 서 (焚書) : 일시 : BC 213(시황제 34년)~ 206? (7년간)

"진나라"는 "군현제도"를 채용했으나, 유학자 가운데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찬미하고 황제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다.  황제는 "이설(異說)"을 탄압하기 위하여, BC 213년 "박사관(博士官) 소장"의 서적과 "의(醫)ㆍ약(藥)ㆍ복서(卜筮)ㆍ농업" 서적 이외의 민간 소장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웠다.

노벽 (魯壁) :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벽에 책을 숨겨 놓았다.  후에 "공자 집" 벽이 허물어지면서, 숨겨 놓은 책들이 발견되었다.

② 갱 유 (坑儒)

"분서"가 있은 다음 해에는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 460여 명을 구덩이에 묻었다"고 하는데,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아,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③ 결과

사상적 통일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 문화를 파괴, 소멸하는 문화 말살 정책에 불과하였으며, "갱유 사건" 또한 정견이 다른 유생들을 육체적으로는 말살하였으나, 정신적으로는 도리어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켜, "진왕조"의 강화는커녕 통치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④ 연구

"후난 성(湖南省)"의 "장사마왕퇴(長沙馬王堆) 3호묘(三號墓)"에서 백서(帛書)인 "노자(老子)ㆍ전국책(戰國策)"외에 "천문(天文)ㆍ역법(曆法)ㆍ오행(五行)ㆍ잡점(雜占)" 관계의 다수의 서적이 발견되고, 또한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懸) 인차오산(銀雀山)"에서 죽간(竹簡)인 "손자병법(孫子兵法)ㆍ손빈병법(孫子兵法)"등의 병법서가 발견되었다.

모두 "한(漢)의 문제(文帝)"로부터 "무제(武帝)" 초년까지의 것인데, 이와 같은 서적이 정리되어 남아 있어, "분서(焚書)"가 엄중히 실행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다만, 이러한 서적 중에 "유교 관계"의 서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유가"에 대한 탄압이 특히 철저했다는 것만은 추측되었다.

2. 사건 개요

① 시황제 (始皇帝ㆍBC 259~210ㆍ49세ㆍ재위 BC 246~210ㆍ36년)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인 "진(秦)나라"를 건설한 전제군주ㆍ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상방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BC 246~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BC 246~ 241년까지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고, BC 241~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ㆍ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② 내 용

"시황제 34년(BC 213)", 때마침 "함양궁"에서는 천하통일을 경축하는 잔치가 푸짐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잔치에서 오랫동안 곪아온 정치 투쟁이 폭발하고 말았다. "시황제"의 측근인 "박사ㆍ복야(僕射)의 주청신(周靑臣)"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시황"의 공덕을 칭송하며, 축배를 올렸다. 

이때 "순우월(淳于越)"이 앞에 나아가 "경전"을 인용하여, 옛것을 찬미하고 현재를 풍자하는 발언을 하였다. "승상 이사"는 "순우월"의 발언에 반론을 제기하여, 옛것을 빙자하여 현세를 비판하고, 인심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순우월"의 발언은 국가의 통일과 "진왕조"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주장이었으나, "이사"는 이에 반대하여, 더욱 극단적인 탄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장의 내용은,    "진나라" 역사 이외의 다른 서적은 모두 불살라 없앨 것      • 다시 옛 시서(詩書)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 옛 것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그 일족을 멸할 것 등이었다"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의견을 채용하여, 많은 서적을 불살라버리고, 다만 "의약ㆍ복서(卜筮)ㆍ 농사"에 관한 서적만 남기도록 하였다.

③ "진시황"은 사람들을 보내, "불사약"을 캐오도록 했다.

"갱유(坑儒) 사건"을 간추려 보면, 만년의 "시황제"는 미신을 좋아하여, 오직 자신의 "불로장생(不老長生)"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로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오래 살기 위하여, 여러 차례 해외에 사람을 보내어, 불사(不死)의 영약(靈藥)을 구해오도록 하였으나, 그런 약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일찍이 "시황제"는 "방술"을 좋아하는 "서복(徐福)"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선단(船團)"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하였으나,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불사의 영약"을 구하는 일에 골몰했던 "시황제"는 이번에는 "후생(候生)ㆍ노생(盧生)"이라는 "방사"에게 영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으나, 결국은 그들로부터 우롱만 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방사"라도 효험이 없으면,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는 것이 "시황제"의 성품이었다. 후환을 두려워한 "후생ㆍ노생"도 결국은 도망치고 말았다. 이들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에 "후생ㆍ노생"이 도망하면서, 황제인 자기를 비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자기를 비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함양"의 학자들을 철저히 조사토록 하였다. 조사 결과, 자기를 비방한 자는 주로 "유생들"이고, 그들이 비방한 내용은 "시황제는 유생을 우습게 알고 법에만 의존하고 있다. 권세욕의 권화(權化), 잔학한 폭군"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비방에 관련된 "유생 460명"을 체포하여,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였다. 이것이 "시황제 35년(BC 212)"의 일로 역사상 유명한 "분서갱유 사건"이다.

④ 서복과지 (徐福過之) : 서복이 여기에 다녀갔다

 "서복"이 불사약을 구하러, 동쪽으로 와서, "한라산 정방폭포"에 들러, "서복이 이곳에 왔다가다"라는 글귀를 바위에 새기고 갔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서복"은 "불사약"은 구할 수가 없고, 그대로 돌아가면 죽임을 당할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에, 그 길로 "동남동녀"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일설에는 "서복"이 "시황제"의 곁에서 떠나기 위하여, "동해에 가서 불사약을 구해오겠다"고 속여 많은 젊은 남녀와 재물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는 설도 있다. 지금 "일본" 각지에는 "서복의 묘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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