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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진 시황제 ① 절대자 (秦 始皇帝)ㆍBC 259~210ㆍ49세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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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시황제 (秦 始皇帝BC 259~210)"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괴물(怪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괴물"이 아니었다면이러한 대사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1. 진 시황제 (秦 始皇帝): BC 259~210ㆍ49세ㆍ재위 BC 246~ 210 (36년간)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인 "진(秦)나라"를 건설한 전제군주ㆍ"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中國)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대륙 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인해 "삼국(三國)분립"시대나 "남북조((南北)분열"시대의 중국인들은 "이것은 이상사태(異常事態)다. 언젠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①  풍모 :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진나라 시황제"는 "메부리 코"에 실눈을 하고, "비둘기 가슴"에 "물소"의 목소리를 지녔으며, 남에게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늑대 같은 마음"을 소유한 자라고 하였다.  "시황제"는 이러한 신체적 결함이 있었기에, 어릴 적에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보복 심리가 강해지고, 자기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진시황의 폭압적인 통치는 그런 장애의 결과가 아닐까?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② "여불위 (呂不韋ㆍ조(趙)나라 대상)"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 13세에 즉위하였다.

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일 때인 기원전 259년에 태어난 그는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왕"에 즉위하였으나, 친정(親政)에 들어가 본격적인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한 것은 23세 때였다. 겨우 13살의 나이에 왕이 된 "진시황제"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건설하였다.

진시황은 자신의 크나큰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롭게 바꾸길 원했다.  따라서 신하들과의 논의 끝에 "태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皇帝)"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자신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라고 부르기도 하고, 후대에는 2세, 3세 등으로 하여 이를 천만세까지 이어 나가도록 하자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만,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당해 15년의 짧은 왕조로 끝나버렸다.

③ 출생의 비밀 의혹ㆍ모친의 애정사 : 사기 (사마천)

"자초(진시황제 아버지)"는 "진나라 왕자"였지만 적장자는 아니었고, "조나라 인질"로 갔다가 "여불위"를 만났다. "여불위"는 장사꾼으로 여러 수완을 갖고 있었고, 물건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 "자초"를 알아봤다.  "자초"의 아버지가 총애하던 "정비"는 아들이 없었고, "여불위"는 "자초"를 "태자"로 삼게끔 한다.  또 "여불위"는 "자초"가 애첩인 "조희"에게 반하자, "조희"도 내준다.

"사기(사마천)" 중 "여불위열전"에 따르면, "여불위"가 "자초"에게 숨겼던 "조희"의 비밀이 있다고 하는데, "조희"는 "자초"와 잠자리하기 전에 이미 임신 중이었고, "진시황제"의 부친이 "자초냐 여불위냐" 의혹이 있었다고 한다.  이어 "자초"의 아버지가 즉위 1년 만에 죽고, "자초"가 왕이 되자, 킹메이커 "여불위"는 최고 관직에 올랐고, 10만 호의 땅도 하사받았다. 

하지만 "자초"도 왕위에 앉고 3년 만에 죽고, "진시황"이 13살에 왕위에 오른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진시황"이 가장 믿은 사람은 모친이었고, 그 모친이 가장 믿은 "여불위"는 큰 권력을 휘둘렀다.  "진시황"이 성장할수록 위협을 느낀 "여불위"는 태후와 관계 정리를 위해, "노애"라는 남자를 소개했다.  "태후"는 "노애"의 아이 2명을 낳았고, "노애"는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결국 "진시황"은 두 이부동생을 살해하고, "노애"는 사지를 찢어 죽였다.  "여불위"는 유배를 보냈지만 자결했다. "진시황제"는 이로써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됐다

④ 38살에 중국통일, "워커홀릭일벌레"

시찰을 많이 했다. 1번 떠나면, 1년 정도 걸릴 정도였으며, 5번 정도 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인재 등용ㆍ군대와 전략ㆍ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을 이뤘던 당시 39살로 1번째 "시황제"에서 "만만세"까지 "진나라"를 이어가려 했다.  그것을 위해 "진시황제"는 중국 내에서 따로 사용했던 글자들과 화폐도 통일했다.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진시황제" 때 만든 길을 "치도"라고 한다.  "치도"를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간다.  이것은 황제의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지방 반란도 빠르게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⑤ "진시황제" 사후 3년 후, "진나라"는 멸망했다. 패망의 원인으로 꼽히는 하나는 "만리장성"

"진시황제"는 전국을 통일했지만, "흉노족"은 못 당했고, "만리"에 달하는 거대한 장성을 세웠다. 새로 쌓은 것도 있고 보수한 것도 있다. 나라를 보호하려던 "만리장성" 사업이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됐고 눈이 와도 멈출 수 없었다. 잠은 길거리에서 잤다.  산이라 변변한 숙소가 없었다고. 먹는 것도 부실했다. 무엇보다 비용도 컸다.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많이 걷었고, 감당 못한 백성들이 뛰쳐나갔다.  10가구 중 5가구가 반란에 참가했다. 민심도 돌아서고 국가재정도 고갈됐다.

⑥ "진시황제"의 시대 역시 기울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분서갱유"였다.

"분서 (焚書)"는 책을 태우는 것이고, "갱유 (坑儒)"는 유생들을 땅에 산채로 파묻은 것이다.  통일을 이루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 "전체주의", "통일"에 반대하는 학설이 떠돌고 있었다.  "진시황제"는 백성들이 선동 당할까봐 걱정해,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건 태워버리라고 했고,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면 얼굴에 낙인을 찍고, 3족(친족ㆍ외족ㆍ처족)을 멸했다.

"분서갱유 (焚書坑儒)ㆍ진화(秦火)" 시기에, 당시 불태운 서적들은 현대와 달리 대나무로 만든 기록수단인 "죽간"을 말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벽에 책을 숨겨 놓았다. 후에 "공자 집" 벽이 허물어지면서, 숨겨 놓은 책들이 발견되었다. "분서 정책"에 대하여, 유생들은 크게 불만을 품고, "시황제"를 비판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시황제"는 이들 비판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보다 강경한 탄압 정책을 취했고, 마침내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⑦  49세에 사망, "썩은 생선 냄새"로 위장한 "처참한 최후"

원하던 바를 다 이루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불로불사의 꿈"까지 꿨던 "진시황제"는 하지만 50세의 나이에 시찰 중, 건강이 악화돼 죽음을 맞는다. 어려서부터 허약했다는 설과, "수은"을 불로불사를 위한 명약으로 알고 섭취해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게 "진시황제"가 죽음을 맞자, 간신배들이 유언장을 조작해 1째 아들 "호해"도 자결하게 한다.  게다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신하들은 "썩은 생선 냄새"로 시신의 악취를 숨겼다.

BC 210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얼마 못되어 "진 제국"의 장수(長壽)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⑧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ㆍ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尉繚)"와 "이사(李斯)"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221년에 "한(韓)ㆍ위(魏)ㆍ초(楚)ㆍ연(燕)ㆍ조(趙)ㆍ제(齊)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BC 8C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다.

⑨  통일 후,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

 "법령의 정비ㆍ전국적인 군현제 실시ㆍ문자/도랑형/화폐의 통일ㆍ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ㆍ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등을 강행하였다.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군현(郡縣)제도"를 실시했다.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분서갱유 (焚書坑儒)"야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천상"을 본떠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咸陽)"으로 전국의 부호 12만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모두 4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 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일은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로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겼고 있다.

 무리한 토목공사 : 아방궁 (阿房宮)리산산 (驪山)기슭의 "수릉 (壽陵)"

그러나 "아방궁(阿房宮)"과 "리산산(驪山)"기슭의 "수릉(壽陵)"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 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만리장성 (2,700km) 건설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匈奴族)"을 격파.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甘肅省)남부ㆍ민현(岷縣)"에 이르는 "만리장성(2,700km)"을 건설하였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ㆍ해남도"까지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  "사마천 사기"에는 "진시황"이 340만 명 인부를 동원하여, BC 246년에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아방궁(동서= 690Mㆍ남북= 114M)",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일명 여산릉ㆍ동서= 600Mㆍ남북= 200MㆍH= 70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2. 여불위 (呂不韋) : ?~ BC 235ㆍ진시황제 부친ㆍ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 정치가

① "진시황"의 출생

조나라" 출신의 대상인이었던 "여불위"는 교묘한 정치공작을 펴서, "진나라"의 "서출공자 자초"의 후원자가 된다. 결국 BC 249년 "자초"를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렇듯 "진" 왕조는 "여불위"와 "자초"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어느 날 "자초"가 "여불위"의 집에 초대되었는데, "여불위"의 애첩을 보고 반해서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큰일을 앞두고 작은 일을 양보하자는 심정으로 "자초"에게 재가시킨다.  후에 그녀는 "자초"사이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정(政)"이며, 이 "정"이 6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었던 것이다.

②  "조나라" 출신인 여불위

일찍이 "거상"으로서의 명성을 대륙에 떨치고 있었던 상태였으며, 그의 재물은 웬만한 나라를 경영하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 있었다.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도왔다.  여불위는 중국을 떠돌던 "자초(장양왕)"을 보고, 그를 "진나라"의 황제로 만들어, 천만금보다 더욱 큰일을 벌이겠노라고 다짐하고는 "진나라 화양부인"과 "자초"를 연결시켜, "화양부인"의 양자로 "자초"를 들여온 후에, "안국공"이 죽은 후, "자초"가 왕위에 올라 "장양왕"이라 칭하고, "화양부인"을 "화양태후"로 승격시키는 일대 감동의 파노라마를 연출시킨다.

③ 여불위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가첩"을 "자초"에게 바친다.

"자초"는 후에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가지는데, 이가 "진시황"이다.  당시 "자초"와 관계를 맺은 지, 단 100일 정도 만에 애가 태어났으니, 상식적으로는 여불위가 미리 무슨 짓을 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가 있다.  허나 당시에는 이와 같은 경우를 "상서로울 징조다~"하는 정도로 취급했었고, 여불위는 이를 통해 절대 권력까지 추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④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 (莊襄王)"이 된다. 

그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죽은 뒤,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 시황제(始皇帝))"가 왕위에 올랐다.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인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그가 식객들을 시켜 편찬한 것이다.  그가 "진시황"을 만들고 나서 결과적으로 "승상" 즉, 왕 다음의 자리인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다.  후에 "진시황"이 황제가 되고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데, 이는 여불위가 가지고 있던 재물과도 연관이 있었다.

⑤ "태후 (太后: 진시황의 모후)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마침내 자살하였다.

그가 가진 재물을 통해서 누린 "절대 권력"도 여기가 한계였다 자신의 아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황제"는 왕권에 위협이 된답시고, 여불위를 축출하기로 한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여불위는 자신이 "자초"에게 바친 "여자(태후)"와 관계를 통해 "후사"를 만들고, 그를 통해 "진시황"을 축출하려 한다.  결국 "태후"의 음탕함과 "진시황"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배후로 "여불위"가 지목되자, 여불위는 자신의 절대 권력은 여기가 끝임을 직감하고,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3. 죽 음

사실 "진시황"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강력한 추진력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진시황"의 왕성했던 정력은 대단해서, 하루에 1석(약 30kg)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시찰만 해도 통일 후 5번이나 강행군하였다. 교통편도 변변치 못했던 그 시대에 중국 대륙을 "5번 시찰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할 것이다. 

"시황제 37.10월"  "시황제"는 5번째 지방 시찰에 나서, "회계산"에 다녀오는 길에 해안을 끼고 북상하고 있었다. "시황제"의 시찰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수행하였으며, "조고"가 옥새를 관리하는 일을 겸임하고 있었다. "시황제"에게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맏아들 "부소(扶蘇)"는 황제가 하는 일에 여러 번 반대한 적이 있어, 멀리 북쪽의 "상군 지방"으로 쫓겨나, 변방 지방의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다. 당시 "상군 지방"의 군사를 지휘했던 사람은 "명장 몽염"이었다. 한편 "시황제"는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귀여워하여 이번 시찰에도 아들 중 유일하게 동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황제"가 "사구 지방"에 이르자, 갑자기 병이 깊어져 위독하게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그래도 믿을 건 장남 뿐이었든지, "황제"는 "조고"를 시켜 맏아들 "부소"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는 봉해졌으나, "사자"를 보내기도 전에 황제는 죽고 말았다. "시황제"의 편지는 "옥새"와 함께 "조고"가 쥐게 되었다. "시황제"의 죽음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며, 오직 "호해ㆍ이사ㆍ조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는 여행 중에 "시황제"가 죽었고, 또 "태자"도 정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죽음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밀에 부치게 했던 것이다. "유해"를 수레에 안치한 채 시찰이 계속되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신하가 "정사"를 아뢰고, "시황제"의 수라상도 올려졌다. 결재도 수레 안에 있는 환관이 수행하였다.

4. 평 가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써, "군현제도"를 확립한 절대적 왕권 중심의 통치자였다. "진나라" 멸망이후에도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모두 채택한 탁월한 행정제도였다. 후대의 관점에서 "진시황"을 보는 시각은 다분히 여러 면이 부각되지만, 가장 많이 얘기 되어지는 면은 "불로장생"을 꿈꾸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방궁"과 "시황릉"을 세우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유례없는 독재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진시황의 진면목이 많이 가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시황"은 중국 전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ㆍ화폐ㆍ거궤ㆍ문자"를 통일하는 등 "사회ㆍ경제ㆍ 문화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도 탁월한 "합리주의자"이자 "가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 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아주 꼼꼼하게 정무에 힘쓰는 반면에, 거대 건축을 세우거나 신약 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극과 극의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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