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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ㆍ사건ㆍ인물

등소평 (鄧小平)ㆍ덩샤오핑ㆍ1904~1997ㆍ93세

by 당대 제일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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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덩샤오핑ㆍ鄧小平ㆍ1904~1997ㆍ93세)"의 사상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것이고, "모택동 (마오쩌둥ㆍ毛澤東ㆍ1893~1976ㆍ83세)"의 사상은 "쥐를 잡는 데는, 꼭 검은고양이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묘흑묘론)

 

1. 등소평 (덩샤오핑ㆍ鄧小平ㆍ1904~1997ㆍ향년 93세)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3대)ㆍ"저우언라이(주은래)"의 후계자1978~1983년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198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 중국 공산당 당료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1970년대~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중국 특색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출 생 : 청나라 쓰촨성 광안현 협흥향 패방촌      사 망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유 해 : 자국으로 반환된 "홍콩 땅을 밟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5개월 남짓 앞두고 사망했으며, 유해는 화장되어 홍콩 앞바다에 비행기로 뿌려졌다.

 키 : 157cm (말년에는 152cm)       학 력 : 프랑스 유학(1920)르노에서 트랙터를 만드는 금속 노동자 →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 대학교(1926년)→ 중국(1927년 )

 처 : 장 시유안 : "모스크바"에서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ㆍ첫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사망  /  진웨이잉 : 1933년 정치적인 공격을 받은 직후, 그를 떠났다. / 줘린 (탁임ㆍ卓琳ㆍ1916~2009ㆍ윈난성 실업가의 딸)

중국 공산당 차원에선 "개혁·개방"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실현한 위대한 지도자로 호평 받고 있다. 사실 그는 말년까지 "마르크스주의자"란 말을 칭찬처럼 사용하고, "부르주아"를 비판한 사회주의자였다. 그가 주창한 것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다. 사실 시장주의자들에게도 특히 그는 "일당 독재 권위주의적 방식"까지 결합되어, 사실상 "국가자본주의자·국가사회주의자·관치 경제"로 오히려 "시장 경제를 망친 자"라는 비판도 듣는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적으로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여, 중국의 개혁ㆍ개방의 출발주자가 되었다. "마오" 시기, "대약진운동ㆍ문화대혁명"의 실패 등으로 휘청거린 중국을 개혁ㆍ개방 체제로 돌려, 사회주의 실현에 필요한 생산력을 확보할 새로운 성장의 길을 이끈 지도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천안문 사태"로 대표되는 중국 내 자유ㆍ민주주의 운동과 내부 불평등ㆍ사회적 모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짓밟은 탄압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프랑스 유학" 시절,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35년 "마오"의 "대장정"에 참여했다. 공산당에 몸담고 있는 동안, 2번 실각, 2번 복권되었고, 1981년 "화궈펑 주석"을 축출하고, "군사위 주석"이 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된다. 복권 이후, "백화제방 백가쟁명(白花齊放 百家爭鳴ㆍ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발언하고 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평해 보자)"을 외치며 한동안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4인방"을 숙청하고 "화궈펑"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후에는 그 탈을 벗어던졌다.

또 "범죄소탕ㆍ부패척결"이란 명분하에 수많은 시민들을 때려잡은 1983년 "엄타(嚴打) 운동" 같은 사례처럼, "덩 통치기"는 법치주의, 인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취지는 "문혁" 이후, 흐트러진 공권력, 치안 강화였으나, 문제는 반대 의미로 너무 강하다보니 법과 처벌은 "고대 진나라" 이상으로 엄격했고, 사법적 절차는 상당히 줄여버려 억울한 피해자들이 쌓이게 된다. 또 그런 와중에도 권력층은 유유히 처벌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줘, 민심이 흔들리게 된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스스로 임기제를 확립하고, 그 임기를 지킨 후 공식 지위에서 물러나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해, "1인 지배체제"로 굴러가던 중국 공산당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이 공식 직함 없이 중국을 사실상 통치했기 때문에 말장난일 뿐이란 반론도 있다. 또 그들끼리도 서로 견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사실상 "덩샤오핑"이 공식적인 직함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2010년대 들어서 5세대 중국 지도부의 지도자가 된 "시진핑"이 "1인 독재체제"를 구성하면서, 이런 허술한 집단지도체제조차 지금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화궈펑 (화국봉ㆍ華國鋒ㆍ1921~2008ㆍ87세): 마오의 후계자ㆍ마오의 충실한 부하

본명은 "쑤주(蘇鑄)"였으나, 청년기에 딸 둘만 있던 "화(華)씨 집안"에 입양되어 "중화구국선봉대(中華救國先鋒隊)"의 이름을 따서 "화 궈펑(華國鋒)"으로 개명하였다.  1976.04.30일, 마오로 부터 "당신이 하면, 나는 안심이다"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10.06일, "문화대혁명" 주도자인 "장칭ㆍ장춘차오" 등의 "4인방"을 체포하였다. 이것은 "마오"의 사후에 격화하고 있던 당내 대립을 단번에 해결하였고, "문화대혁명"을 사실상 종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덩샤오핑"과 격렬한 권력투쟁을 전개하였고, 최종적으로 권력에서 밀려났다.

2. 1978년, 덩샤오핑 이론 (경제)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 중전회(中全會)" 이후, "사상해방ㆍ실사구시"라는 2가지 틀 속에서 20년간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해 오면서 탄생된 이론"양합 국력이론은생산력의 발전인민생활의 향상" 3가지 중 어느 하나에 유리하다면 자본주의적 요소도 과감히 도입할 수 있다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의 정신적 토대이자, 실천강령이다"이론"은 중국 보수주의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이론"은 "마오쩌둥 사상에도 모순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무조건적으로 "마오 주석"을 추종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에도 "계획 경제"가 존재하듯이, 사회주의 국가에도 "시장 경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적으로는 "시장 경제"를 도입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 공산주의의 기본 정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 민중민주주의 독재 정치 체제를 지킨다  - 공산당의 지도력을 유지한다.)

 흑묘백묘론

그의 개혁ㆍ개방 노선은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일방적인 공산주의식 평준화보다는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을 주장한다.  흰 고양이건 검은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주장하였고, 시장 경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인민들이 잘 먹고 잘사느냐가 사회주의이냐 아니냐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

선부론 : 1978년, "대약진 운동ㆍ문화대혁명" 등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덩샤오핑의 선부론"을 기본 원칙으로 한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선부론"을 앞세워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오히려 국민에게 분배되지 못하고 빈부격차의 확대로 이어졌다.

3. 프랑스ㆍ소련 유학 / 저우언라이ㆍ마오와 만남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충칭"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다 "근공검학(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해서 공부한다)" 곧 해외유학을 만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와 서구문물을 배우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500명의 중국인들이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중국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0년, "덩"도 "상하이"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에 갔다. 유학생일 때, "덩"은 "파리의 르노자동차"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웠다.

192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들어갔으며, 기관지인 "적광(赤光ㆍ붉은 태양)"을 만들었다. "저우언라이 (주은래ㆍ周恩來ㆍ1898~ 1976ㆍ향년 78세)"를 만난 때이기도 한데, "저우언라이"는 자신보다 6살 어린 "덩"을 아꼈으며, "덩"도 "저우언라이"를 큰형님으로 따랐다.  1926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탄압 때문이었다.

"소련" 유학시절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으며, 1927년 중국에 돌아왔다. "덩"은 유학을 마치고,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에 참여했다. 1933년, "중국 공산당"에서는 "소련파ㆍ마오파"의 당권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가 지면서 "덩"도 실각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은 "중국"에 맞지 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으나,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는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 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1935년 "대장정" 도중, 열린 회의에서 "마오의 이론(마오이즘)"이 인정되었다.

3. 생 애

1904년, "청나라 쓰촨성 광안현 협흥향 패방촌"에서 출생했다. 엘리트 계층이었던 아버지는 "덩"에게 신학문을 교육시키기 위해, 일찍부터 "프랑스"에 유학을 보냈고, 그는 그곳에서 "공산주의자 청년동맹"에 가입하며, 공산당원으로서의 일생을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대학생활을 한 "덩"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서 지도적인 정치·군사 조직가가 되었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1931~1934년까지 "중국 남동부 장시 성"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정부로 "마오ㆍ주더"에 의해 만들어졌다.

※ 주더 (주덕ㆍ朱德ㆍ1886~ 1976ㆍ향년 90세) 군인ㆍ정치가ㆍ개국원수(중국 10대 원수 중의 1인)

한국 전쟁에도 참전ㆍ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국가부원수(1954~1959)

"덩"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했고, "마오"의 "대장정"에 동행하기도 했다. "대장정" 이후, "중국 공산당"은 중국 서북부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덩"은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5년에는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그의 정치생활은 상승가도를 달려, 1949년 "제2야전군 정치위원", 1952년 "정무원 부총리ㆍ국가 평의회 부수상", 1954년 "당 중앙위원"을 지냈고, 마침내 1965년 "당 총서기"에 올랐다.

그러나 "덩"의 원만한 당 생활은 중국 역사의 영원한 오점인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좌절되고 만다. 그는 "류사오치" 같은 실용주의 노선의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물질적인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기술·경영면에서 숙련된 엘리트를 양성하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 점차 "마오"와 갈등을 빚게 되었고, "마오"는 "문화대혁명"의 힘을 빌어, "자본론의 효용"을 주장하던 그를 "류사오치"와 더불어 "자본주의자"로 낙인찍어 실각시켰다. 일종의 정치적인 거세로 "덩"의 정치가 인생의 첫 고배였다.

※ 류사오치 (류소기ㆍ劉少奇ㆍ1898~ 1969ㆍ향년 71세) 정치가ㆍ중국공산당 지도자

임시 부수반(1949~1954)ㆍ국가부주석(1954~1959)ㆍ제2대 국가주석(1959~1968)1959, "마오" "대약진운동"의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2대 국가주석이 되었으나, 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려던 "마오"와 수시로 갈등한 끝에, "문화대혁명"으로 1968년 실각했다.

1973년, 은둔생활을 하던 "덩"에게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손을 내밀었다. "덩"은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당 중앙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복권되었다. 그리고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위원회 총참모장"을 지내면서 정부의 주도 세력이 되었고, "저우언라이"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1976.0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나서, "마오"에 의해 정계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마오"가 사망하고, "화궈펑"이 집권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마오"의 후계자로 주석 자리에 오른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4인방"의 처단이라는 역사적 숙제를 치러내야만 했다. 그러나 "화궈펑 정권"은 출발 당시부터, "비 4인방적 문혁파 그룹ㆍ예젠잉(葉劍英)과 리센녠(李先念)을 필두로 한 반문혁ㆍ비문혁 온건파ㆍ실무관료그룹ㆍ4인방의 도시 민병정책이나 군부에 대한 개입을 반대하는 군인그룹" 등의 세력다툼 속에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문혁파 출신"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지지기반으로써 "덩"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화궈펑"은 호랑이를 둥지로 불러들인 셈이 되었다. "화궈펑"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데다, 어지럽게 난립한 세력을 근절할 힘이 없었고, 국민들의 지지 역시 돌아온 "덩"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화궈펑"은 1980년ㆍ1981년에 총리직ㆍ주석직을 내놓아야만 했고, 이 자리는 "덩" 휘하의 인물들에게 돌아갔다.

"자오쯔양(조자양ㆍ趙紫陽)" 이 정부 총리가 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ㆍ胡耀邦)"이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되었으며, "덩"은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아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인 주인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부터 "덩"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을 실행해나가기 시작했다. 

후야오방 : 호요방ㆍ胡耀邦ㆍ1915~1989ㆍ군인ㆍ정치가          자오쯔양 : 조자양ㆍ趙紫陽ㆍ1919~2005ㆍ중국공산당 총서기(1987~1989)ㆍ1989년 천안문 사태로 실각          

"덩"은 중국의 정치경제생활의 전 분야를 개혁했다. "지방 분권화"된 경제 운영정책을 시도했고,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는 장기 경제개선계획을 세워, 전 중국의 경제성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특히 그는 시장경제의 경제체제를 일부 도입했는데, 경제 부분에 있어서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고, 그에 따른 개인적인 물질 보상을 강조했다. 농민들이 자신의 생산물과 이윤을 개인적으로 관리하게 하는 그의 정책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농업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런 면은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시장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방식에 가까웠다. "덩"은 "마오"의 노선과 다른 이런 서구지향적인 정책으로 비판을 받게 되자, 앞서의 "흑묘백묘론"으로 응수했다.

그는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기술자와 경영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업체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를 억제하고자 했다. 그리고 농업 부분과 마찬가지로 기업에 있어서도 "이윤 추구"를 보장했다. 대외정책에서는 "소련"을 견제하며, "미국ㆍ일본"을 파트너로 삼았다. "중국"은 "덩" 정권하에서 연간 10%가 넘는 고속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그는 중국에게 개방과 경제발전이라는 2가지 선물을 안겨주었다.

4. "덩"의 통치 기간 중 가장 큰 실책은 "톈안먼사건 (天安門事件)"이다.

1987년,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직하는 척하며,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던 많은 연로한 당 지도자들을 함께 은퇴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덩"은 "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계속 맡고 있었으며, 실질적으로 당 내에서의 결정권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1989.04월, "베이징 대학"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소규모의 학생 시위는 차츰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번져나갔고, 곧 주변 도시까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덩"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학생 지도자들과 시위 가담자들을 대거 재판정에 세워 처형대에 올렸다. 그 후 "덩"은 "제14회 전국대표대회 제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양상쿤(楊尙昆)" 등의 고위 정치가들을 요직에서 퇴진시키고, 개혁파 "주룽지(朱鎔基)" 부총리 등을 선출하여 개혁·개방정책을 이끌 새로운 지도체제를 출범시켰다. "덩"은 1997년 "장쩌민(강택민ㆍ江澤民)"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놓은 후, 지병으로 사망했다.

양상쿤 : 양상곤ㆍ楊尙昆ㆍ1907~1998ㆍ91세ㆍ정치가ㆍ군인(지상군 준장 전역)           주룽지 : 주용기ㆍ朱鎔基ㆍ1928~ㆍ9대 국무원 총리(1998~2003)ㆍ시장경제를 시행할 수 있게 기틀 마련         장쩌민 : 강택민ㆍ江澤民ㆍ1926~2022ㆍ94세ㆍ중국 공산당 주석(1993~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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