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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나폴레옹 (1769) ③ 로제타 석 (Rosetta Stone)

by 당대 제일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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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석 (Rosetta Stone)"은 BC 196년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5세"(BC 204~181)의 즉위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비문"으로, 북부 이집트의 중심도시였던 "사이스"의 한 궁전 광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이 비문의 내용은 대부분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들과 신전에 베푼 여러 가지 혜택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양한다는 것이다.

 

1. 로제타 석 (Rosetta Stone)

1799.07.15일, "나일강 하구"의 "로제타 마을 (아랍어: 아르 라쉬드(ar-Rashid))"에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장교인 "피에르 부샤르"가 발견한 비석조각으로 핑크빛이 도는 어두운 회색이다. 돌의 무게는 대략 760kg이고,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114.4cm이며, 너비는 72.3cm, 두께는 27.9cm이다. 원래는 "화강암" 혹은 "현무암"일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화강섬록암"으로 여겨진다.

같은 내용의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ㆍ이집트 민중문자ㆍ고대 그리스어" 등 3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쓰여 있는 화강암이다. "고대 이집트어"가 2개의 이집트 문자로, "고대 그리스어"가 그리스 문자로 새겨져 있어서, 모두 2종류의 언어가 3종류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돌이 있어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과 "토머스 영"은 잘 알려진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로제타석"은 BC 196년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5세"(BC 204~181)의 즉위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비문"으로, 북부 이집트의 중심도시였던 "사이스"의 한 궁전 광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이 비문의 내용은 대부분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들과 신전에 베푼 여러 가지 혜택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양한다는 것이다.

2. 소유권 : 이집트 → 프랑스→ 영국

1798년부터 약 3년간 "이집트"를 점령하여 지배했던 "프랑스"는 3년만인 1801년 결국 "영국ㆍ오스트리아ㆍ오스만 군"에게 항복을 하게 된다. 영국에 항복하는 문서에 조인한 프랑스는 그동안 수집한 많은 이집트 유물들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다. "로제타석" 또한 이때 다른 유물들과 함께 영국의 소유가 되어, 1802년부터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현재 "영국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물이 바로 "로제타 석"이라고 한다.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군의 "로제타석"의 발견

나일강 하류에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인 "이집트의 라쉬드(ar-Rashid)"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할 만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진 곳으로, "라쉬드"의 옛 이름은 바로 "로제타"였다. "로제타"에서 남서쪽으로 60k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왕의 이름이 붙어진 곳으로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있었던 곳이다. "로제타ㆍ알렉산드리아" 이 두 지역은 모두 세계 문명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성지가 된다. 

1799.07.15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장교인 "피에르 부샤르"가 요새를 건설하기 위하여, "로제타"에 위치한 오래된 석조건물을 헐던 중에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로제타석(Rosetta Stone)"으로 알려진 비문이다.

 나폴레옹과 이집트

당시 영국과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는 "지중해ㆍ홍해"를 잇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영국 본토에서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로 가는 길을 끊기 위하여, 1798년 나폴레옹 군대를 이집트로 파견한다. 이집트는 300여 년간 "이슬람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은 점차 쇠퇴하던 시기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이 원정이 이집트 연구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향해 떠나면서 이집트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180여 명의 과학자ㆍ건축기술자ㆍ고고학자ㆍ언어학자ㆍ지리학자ㆍ물리학자ㆍ수학자ㆍ화가ㆍ시인ㆍ음악가 등으로 구성된 학술조사단을 대동하였다. 마치 소규모의 대학이 이집트로 옮겨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패전 후,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이집트 탐사 성과"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집대성했으며, 1809년부터 20여년에 걸쳐 총 24권에 이르는 "이집트지(誌)"(Description de l’Egypte)를 출간하도록 했다. 이 책은 이집트에 관한 "백과사전"으로서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뿐만 아니라 지질ㆍ동식물ㆍ주민들의 풍습ㆍ종교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에 관한 방대한 분량의 지식이 담겨져 있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이집트 학"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게 되었으며, 아울러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이 형성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3. 구성ㆍ내용

① 2종류의 언어3종류의 문자로 구성

로제타석의 내용 일부가 "그리스어"로 적혀 있는 까닭은, 당시 이집트는 "알렉산더 왕" 이후에 그리스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그리스 계 "마케도니아인"의 후손이다). 이처럼 하나의 비문에 여러 언어(및 여러 문자)가 사용된 것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동일한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설형문자" 해독에 중대한 단서를 제공한 "베히스툰 비문"도 "고대 페르시아어ㆍ바빌로니아어ㆍ엘람어"의 3개 국어로 되어 있고, 중국 명시대의 탐험가 "정화(鄭和)"가 "인도ㆍ타이"를 원정한 후 돌아오는 길에 세운 비석도 "중국어ㆍ타밀어ㆍ페르시아어"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 황제"가 남기고 간 "삼전도(三田渡) 비문"에도 "중국어ㆍ만주어ㆍ몽골어"의 3개 언어로 되어 있다. 또한 예수가 사형당할 때, 십자가에 달린 명패에도 같은 내용이 "히브리어ㆍ라틴어ㆍ그리스어"로 적혔다.

내 용 : 내용의 앞부분 + 선언문

"내용의 앞부분ㆍ선언문"으로 구성되며, 나머지는 구체적인 선언문이 구구절절 이어진다. 사제들과 신전에 대한 여러 가지 혜택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이어지며, 여기에서 소개된 분량은 1/5 정도이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사제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같은 내용을 전하기 위하여 3가지 언어로 적었다. 

사제들을 위하여, "이집트 신성문자"로 적었고, 1번째 14줄이다. 신하들을 위하여, "이집트 민중문자"로 적었고, 2번째 32줄이다. 이집트에 사는 그리스어 문화권의 사람들을 위해 "고대 그리스어" 대문자로 적었고, 마지막의 51줄이다.

내용의 앞부분

새로운 왕이시며 왕관의 주인이신, 영광이 크시고 이집트를 평탄케 하시며, 신들에 대해 경건하며, 적들보다 우월하며, 인간의 삶을 올곧게 하시고, 헤페스투스 대왕처럼 30년을 다스리시고, 태양과 같은 왕이시며, 윗 세상과 아랫 세상의 위대한 왕이며, 헤페스투스가 인정하신 부모를 공경하는 신들의 자녀이며, 태양이 승리를 허락하시고, 제우스의 현신이며, 태양의 아들이신, 프타에게 사랑받는 영생하실 프톨레마이오스께서 통치하실 적에. 9년째 되는 해, 즉 아에투스의 아들이자 알렉산더의 사제이며, 구원자 신들과 형제 신들과 이롭게 하는 신들과 부모를 공경하는 신들과 드러내고 영광스러운 신의 사제인 아에투스.

그리고 베르니케 에우어게티스의 아틀로포루스(athlophorus)인 필리니우스의 딸 피라. 그리고 디오게네스의 딸이며, 아리스노에 필라델푸스의 처녀사제(kanephoros)인 아레이아. 그리고 프톨레마이우스의 딸이며, 아리스노에 필로파토르의 사제인 이레네. 크사니쿠스월 4째 날이며, 이집트력으로는 메케이르월 18번째 날에.

 선언문

대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신전 안으로 들어가 신들을 찬양하고, 매의 반지를 끼고 거룩한 문자를 기록하는 자들 및, 이 나라의 곳곳의 사원에서 왕위를 물려받는 제전을 위해 멤피스로 와서 왕 앞에 모이는 사제들과, 영원하시고도 프타에게 사랑받으며 신을 드러내고 영광스러운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를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사제들은 오늘 선언하였다.

영생하시고, 영광스러운 프타에게 사랑받으시는 왕 프롤레마이오스 왕께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과 아리스노에 왕께서 성전과 그곳에서 사는 자들과 그가 다스리시는 자들을 위하여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이시스와 오시리우스 사이에 태어나 나중에 그 아버지인 오시루스를 도왔던 호루스처럼, 처음부터 신과 여신에게서 태어난 신처럼. 자애롭게 신들에게 바치는데 은과 곡식과 같은 수입을 신전에 집중시켜 주셨으므로, 이러한 관대함이 이집트를 부유하게 할 것이며, 신전을 확고히 하게 될 것이다. 신들은 그에게 건강과 승리와 힘과 다른 모든 것으로, 그에게 영원히 다스릴 권세와 그를 이을 자녀들에게 영원히 보답하셨다.(후략)

4. 해독

"로제타석"이 발견된 그 이듬해인 1800년에 "로제타석"의 탁본이 유럽의 모든 학자들에게 배포된다.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집트 문자"로 기록된 부분을 해석하려고 애썼지만, 이 비문에 쓰여 있는 "고대 이집트어"가 4세기 후반 경에 급격히 사라져 버린 언어이기 때문에 해독은 쉽지 않았다. 해독작업에 처음 기초를 놓은 이는 "토마스 영 (Thomas Youngㆍ1773~1829ㆍ영국 언어학자ㆍ외과의사ㆍ 물리학자)"이다. 1814년 그는 타원형의 테두리로 둘러싸인 이집트 문자들을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으로 해독하였으며, 또한 새나 동물이 바라보는 그림의 방향이 "이집트 문자"를 읽는 방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이때까지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문자가 "의미"만을 나타내는 "표의문자"로 생각했었다.

이후 1822년 프랑스의 "샹폴리옹(J.F.Champollionㆍ1790~1832)"은 이 문자들이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라는 가설을 세워, "그리스어" 단어에 해당하는 문자를 비교함으로써, 개별 문자들의 "소리 값"을 찾아낼 수 있었다.그러므로 "이집트 학"의 시작은 바로 이 문자를 전면적으로 해독해 낸 "샹폴리옹"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연구를 통해 그 동안 해독되지 못해 방치되었던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에 적힌 문자를 읽을 수 있었고, 그 가치를 새롭게 밝혀낼 수 있었다.

5. 이집트의 상형문자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하나의 의미 외에 1개, 2개, 혹은 3개의 발음이 섞여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등 매우 복잡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적힌 문자를 해독하여, "이집트 문명"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로제타석"을 발견하고 여기에 적힌 문자를 해독함으로써, 다른 많은 이집트 자료들을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세계 4대 문명 중의 하나인 "고대 이집트 5천년"의 신비가 풀리게 되었다.

유럽이 아직 원시적 수렵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통일된 왕국을 이루어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지만, 인류의 기억에서 잠시 사라져버린 이집트 문명이 마침내 이 돌덩어리 하나를 통해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858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프톨레마이오스"학회에서 "로제타석"의 영어 번역을 처음으로 출간했다. 3명의 학부생 "찰스 R.헤일ㆍS.헌팅턴 존스ㆍ헨리 모턴"이 번역을 맡았다. 이 번역은 재판까지 모두 금방 팔렸지만, 학술적인 가치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출판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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