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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프랑스 : 루이 16세 (루이 15세 손자)ㆍ마리 앙투아네트 (1755)

by 당대 제일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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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d'Autricheㆍ1755~1793ㆍ38세)"는 프랑스 왕 "루이 16 (Louis XVI1754~1793재위 1774~179239)"의 왕비로,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ㆍ오스트리아 출신ㆍ시인ㆍ소설가ㆍ세계 3대 전기 작가)"  1932년 발표한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이다.

 

1. 루이 16세 (Louis XVIㆍ1754~1793ㆍ재위 1774~1792ㆍ향년 39세)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제5대 왕ㆍ루이 15세의 손자"프랑스 혁명" , 퇴위당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 일로 "마지막 루이(Louis le Dernier)"라는 별명이 있다. 절대 왕정의 성공 여부는 군주의 인격과 능력에 많이 좌우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품ㆍ자질ㆍ적성이 맞지 않았고, 무능하며 정치에 무관심하기까지 했다. 정책에 일관성이 없었고, 선대(루이 14ㆍ15세)로부터 물려받은 재정악화에도 불구하고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함으로, 경제를 파탄일보 직전까지 내몰았다.

1788년 기후악화로 인한 "대흉작"은 백성들이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신분제에 따른 불만 등으로 인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1791.09.03일, 혁명세력에 의해 프랑스가 "입헌군주국"으로 선포되며, 신분이 전제군주에서 "입헌군주"로 바뀌었고, 1792.09.21일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군주제"가 폐지되자 신분이 파리시민으로 변경되었다. 성품이 선량했던 "루이 16세"는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나약하여, 의지와 추진력이 부족하였다. 군주로서 결여된 이런 부분은 훗날 닥쳐온 비운의 최대 원인이 되었다.

당시 귀족층의 사치스러운 생활 또한 심각하였다. "튀르고"를 등용하여 구제도의 모순 해결, 재정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였으나, 궁정 및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네케르"를 기용하였으나, "미국 독립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함으로써 재정은 더욱 곤란해졌다. 이후 "칼론ㆍ브리엔"을 기용하였으나, 재정은 악화될 뿐 개혁은 특권신분의 반항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고, 1788년 "삼부회(三部會) 소집"을 결정, 재차 "네케르"를 기용하였다.

1789.06월, "삼부회"가 "국민의회"로 성장하여 "입헌왕정"에의 움직임이 높아지자, 군대에 의해 의회를 탄압코자 책동하였다가, 이것이 도리어 "바스티유 공격"을 초래하였고, 시민의 봉기에 굴복하였다. 이후 소위 1789년 체제에 입각한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에 대하여 자신의 무정견과 "왕비 마리앙투와네트"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신체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보일보 양보하였다. 한편 "미라보ㆍ라파예트ㆍ바르나브" 등과 손을 잡고 권력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791.06.20.일, 일가와 함께 국외로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입헌 왕정을 기조로 한 1791년의 헌법의 승인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국민공회"는 왕을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선포했고, "루이 16세"는 "국민공회"의 투표결과 반역자로서 1793.01월 "단두대 (기요틴ㆍguillotine)" 이슬로 사라졌다.

2.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d'Autricheㆍ1755~1793ㆍ향년 38세)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막내 딸"오스트리아"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

1793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가장 참혹하게 꺾인 인물은 "베르사유의 장미"로 알려진 그녀였다. 혁명세력은 그녀를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로베스피에르"는 그녀가 만족할 줄 모르는 "자궁의 충동"을 갖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그녀가 왕비로 있었을 때, 국고가 파산지경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녀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ㆍ미국독립전쟁 지원"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결혼당시, 정치에는 무관심한 15살 행복한 소녀였던 그녀는 "사치와 환락의 궁전"으로 알려진 "쁘띠 트리아농 궁"에서 실제는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겼을 뿐이었다.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에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지 않게 배려한 사람이었으며 "루이 16세"가 활을 쏘다 실수로 농민을 다치게 했을 때에도 직접 치료를 해준 사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례적으로 빈민구제와 프랑스식 농경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빈민구제를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를 직접 팔고 당시 악마의 음식이라고 불린 감자에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직접 꽃을 꽂아 나눠주거나, 감자 꽃을 머리에 꽂았으며, 그녀는 오히려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에게 사치를 도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다 딸의 불만을 사기도 했을 만큼, 아름답게 꾸미고 자애롭게 돌보는 것을 좋아했던 여인이었다.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역시, 그녀가 결백하다고 알려진지 오래다.

그 목걸이는 애초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뒤 바리"의 사치를 위해 제작된 것이고, 그녀는 그 목걸이 구입을 거부했다.  1772년 "루이 15세"의 연인이었던 "마담 뒤 바리"에게 선물하려던 엄청난 가격의 목걸이였다. 당시 파리 최대의 보석상 "보에메르ㆍ바상쥬"가 연합하여 만든 목걸이로, 제작 도중 구매자인 "루이 15세"가 1774년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이에 파산 위기에 몰린 보석상이 1778년 "루이 16세"에게 접근하여 이와 같은 세기의 보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왕비뿐이라며 구매를 현혹하였으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를 거부하였다.

1781.10월, "루이 16세"의 2번째 자녀이자 첫아들인 "루이 조제프 도팽"이 태어나자 그해 말 보석상은 다시 "루이 16세"에게 접근하여,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선물로 구매를 건의하였으나, 왕비는 역시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스트라스부르" 주교인 "추기경 드 로한"이다. 그는 왕실 교사로 근무 중, "폴리냑 부인"에게 자리를 물려준 "마담 구메네"로 알려진 "빅투아르 드 로한"의 삼촌이다. 1772년 "추기경"은 "빈"에 "프랑스 대사"로 재임 중,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리지아"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음해성 정보를 자꾸 전달하였던 사실을 "마리 앙투아네트"가 알고 있었다. 이후 1774년, 왕비에 오르게 되면서, "추기경"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왕실 교사로 있었던 조카 "마담 구메네"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에 왕비와의 화해를 모색하던 중, 조카 "마담 구메네"마저, 1782년 왕실 교사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만나게 된 인물이 계획적으로 "추기경"에게 접근한 "정부 발루이가"의 "드 라 모트 부인" 이었다. 궁전의 소식통이었던 조카 "마담 구메네"의 정보통이 없어진 "추기경"은 왕비와 가장 친밀한 사이라는 "라 모트 부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거액의 목걸이를 왕비가 구매하려 하지만, 왕실 재정과 세간의 이목으로 직접 사들일 수 없는 이유로, "추기경"이 이를 구매하면, 나누어 갚겠다는 정교하게 위조된 왕비의 편지를 받아 들고, 1885년 목걸이를 사서 "라 모트 부인"에게 건넨 것이다. 그러나 왕비의 감사 표시가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전갈이 없는 가운데 엄청난 목걸이 대금의 독촉이 심해지면서 화가 난 "추기경"은 보석상에게 왕비가 전한 위조된 편지를 공개하고 말았다.

이에 보석상은 세간에 쏟아지는 왕비의 여론을 상기하며 몹시 나쁜 왕비라는 생각으로 국왕에게 편지의 사본과 함께 목걸이 대금을 청구하면서,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추기경"은 즉시 투옥되었고, "발루이가의 라 모트 부부"와 연관된 사기범 일당이 모두 체포되었다. 문제는 재판 과정이었다. "추기경"은 사기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또한 "라 모트 부부"를 포함한 사기범 일당들은 죄를 조금이라도 면해 보려고, 왕비에 대해 음해성 소문들을 부풀려 쏟아내면서, 세간의 여론은 마치 사치에 놀아난 왕비와 존엄한 추기경의 대결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외국인 왕비에 대한 비난과 질타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빵이 없다면, 과자를 먹으세요

원래 이 말도 원래는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신하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 슈를 주세요"였지만, "혁명군"은 의도적으로 그 말을 왜곡해서 퍼뜨렸다. 더구나 아들을 무척 사랑했던 그녀는 "혁명군" 측의 음모로, 재판에서 아들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는데, 당시 8살이었던 "루이 17세"는 마약까지 먹은 상태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동의했고, 그것은 그녀 생애에 가장 큰 상처였다.

1793.01.21일, "혁명 재판"은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 단두대로 참수형에 처했다. 7월에는 왕위계승자인 "루이 샤를"이 어머니와 고모에게서 떼어 놓아졌다. 08.01일, 그녀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았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단두대 (기요틴guillotine)" 참수 당일

1793.10.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 당했다. 참수형 당일, 그녀는 특별 죄수로서, 거름통을 싣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루이 16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콩세르쥬리 감옥"에서 나올 때, 그녀는 머리카락이 짧게 깎여져 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여져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답게 품위를 중시했던 그녀는 "반혁명의 혐의"로 3일 간 받은 심문 내내 의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였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혁명 직전, 그녀는 편지글에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남겼고, 사형장에서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아버렸을 때에도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라며, 에티켓을 지킨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녀는 끝까지 위엄으로써 많은 오욕에도 잘 견디고 품위 있는 태도를 보였다. 기본적으로 "단두대"로 처형할 시, 사형수의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하였지만, 그녀의 경우는 얼굴을 일부러 위로 향하게 해서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또한 사형집행일 전날 머리카락이 하룻밤 만에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설이 있으나, 과학적으로 그런 급속한 변화의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3. 폴리냑 공작부인 (1749~1793ㆍ향년 44세)

프랑스의 귀족ㆍ정치인ㆍ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는 측근이었다.  "프랑스 백작"의 딸로, 1767년 "폴리냑의 쥘 공작"과 결혼하였다. "쥘 공작"의 여동생 "다이애나"는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 공주"의 심복이었다. 이러한 시누이 "다이애나"의 초청으로 1775년 "베르사유 궁전" 공식 만찬에 참석한 "폴리냑 공작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만났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공작부인"의 너무나 상냥한 자세와 재치가 있는 화술은 물론 격조를 갖춘 태도에 반하였다. 왕비는 "루이 16세"에게 요청하여, 부채를 청산해주면서, "베르사유 궁"에서의 생활을 허락하였다. 무려 "베르사유 궁전"의  13개의 방을 사용하였다.

4. 단두대 (斷頭臺)ㆍ기요틴(Guillotin): 1792~1977까지 사용(1981년 폐기)

"기요틴"이라 불리는 단두대는 외형상 흉측하지만 원래는 인도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스대혁명" 이전에는 사형 집행 방식이 참수였는데, 단번에 목이 잘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 끔찍한 장면이 연출되고는 했다. 특히 참수에도 신분 차이가 있어서, 귀족은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참수 당했지만, 평민은 무딘 칼로 여러 차례 맞으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792년 정식 사형 도구가 되었는데, 1791년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의회"에서 계급에 상관없이 참수형에 처할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안토닌 루이 박사(왕의 주치의ㆍ외과학회 사무국장)ㆍ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파리 의료기기부의 해부학 교수)"가 이 기구로 사형수들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모든 사형수를 기계로 처형하라고 요구하며 2.3m 높이의 구조물에 40kg의 무거운 칼날을 매달아 순식간에 목이 잘려나가는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공포 정치"에서 "로베스피에르 파"는 "혁명 반대파ㆍ온건파ㆍ투사" 등 반대파의 인물을 차례로 숙청했다. 처형당한 인물은 "루이 16세ㆍ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 아내)ㆍ당통(프랑스 혁명 주도)ㆍ로베스피에르(단두대로 많은 사람을 죽임)ㆍ라부아지에(과학자)ㆍ에베르ㆍ라부아지에ㆍ카미유 데뮬랭ㆍ뤼실 두플레시(데뮬랭의 아내)" 등 수많은 인사들이 처형당했다. 그러나 "프레리알 22일 법" 제정에 따라, 사법 절차가 크게 간소화되었기 때문에, 정식 재판 없이 사형을 시켰고, 옥중사도 많아, 희생자와 피해자는 약 4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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