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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프랑스 : 루이 15세의 정부ㆍ퐁파두르 후작부인ㆍ뒤바리 백작부인

by 당대 제일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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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 "루이 15세 (루이 14세 증손자1710~1774ㆍ재위 1715~1774)"의 정부로 유명한 사람은 시민 출신의 후궁인 "퐁파두르 후작부인 (1721~176443)"과 창녀 출신의 "뒤바리 백작부인 (1743~179350세)"이다. "엘리제 궁전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저택 중의 하나였다.

 

1. 퐁파두르 후작부인 (Madame de Pompadourㆍ1721~1764ㆍ향년 43세 (폐결핵))

시민 출신의 후궁마담 퐁파두르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엘리제 궁전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도 그녀의 저택 중의 하나였다.

• 배우자 : 1741(20세)~1744(23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 (자신의 사촌ㆍ아버지의 조카)         자 녀 : - 알렉상드린         정 부 : 1745(24)~ 1764(43): 프랑스 왕 "루이 15(1710~1774재위 1715~1774)"

프랑스 왕(루이 15세 (1710~1774))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정치"를 좌지우지한 "그림자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그녀는 "나의 시대가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녀는 돈을 물 쓰듯이 사용하고 (하지만 그전 역대 프랑스의 어떤 왕의 여자보다는 검소했다.), 여러 곳에 저택과 성곽 등을 건설하였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매우 지성적이었고, 예술 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자주 그렸고, 보석 디자인을 하기도 했으며, 훌륭한 유머 감각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왕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던 추기경 "플뢰리 (Fleury)"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43년에 사망하자, "루이 15세(루이 14세의 증손자)"가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745년부터 실제로 궁정의 대소사를 좌우한 것은 왕의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이었다. 그녀는 왕을 움직이고 싶어 하는 한 정치인에 의해, 훈련받은 "시민 출신의 후궁"이었다. 그녀는 "루이 15세"를 환락으로 유혹했고, 그녀 스스로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뚜쟁이 노릇까지 하였다. "퐁파두르 부인"은 20여 년 동안 "루이 15세ㆍ프랑스 정치"를 좌우했다.

그녀의 부모는 중산층으로 "금융가의 투기꾼"이었다. 그녀는 부자의 아내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계몽 사상가"들을 후원하였고, "정부 고관의 임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쇼아죌"이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것도 그녀의 덕분이었다. "쇼아죌"은 외교적으로는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며, 국내적으로는 "예수회"를 억압하고, "얀센주의자ㆍ국교회주의자ㆍ계몽사상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학예 보호에 힘쓴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ㆍ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의 문예"를 진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고, 극장ㆍ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도 모두 그녀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가구ㆍ도자기ㆍ그릇ㆍ의상ㆍ보석ㆍ그림ㆍ책" 등 많은 수집품을 모았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죽은 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 데에만 1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아한 부인은 당대의 모든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한 당시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녀의 이러한 수집 열은 각종 미술품의 생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그녀의 입김이 여러 곳에 미치자, 자연스레 그녀의 취향은 당시 유행의 기준으로 통용되었다. 그녀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발달했던 시대가 되었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1710~1774)"의 애첩ㆍ정부 (11년 차이)

"퐁파두르 부인"이 죽은 1764.04.15일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루이 15세"는 "여 후작이 떠나기엔 좋지 않은 날씨군"이라고 얘기했다고 하며,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741년, 그녀는 아버지의 조카, 즉 자신의 사촌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결혼하여, "잔느 앙트와네트 데티올"로 이름을 바꾸고, 딸 "알렉상드린"을 낳았다. 1744년, 가끔 수렵을 하러오던 "루이 15세"에게 우연히 그 미모가 눈에 띄어, 내연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곧 "여 후작"의 작위가 주어져, 귀족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으며, 남편과 이혼하여, 1745.09.14일 정식으로 "왕의 정부(情婦)"로서 인정되어, "루이 15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30살 넘었을 무렵부터, "루이 15세"와 한 침실에서 같이 자는 일은 없어졌지만, "루이 15세"는 그녀가 43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총애했다고 한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 안에 "녹원"을 조성하고, 그곳에 전국 각지에서 데려온 미녀들을 모아놓고 "루이 15세"에게 고르게 하여, 매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대령했다"고 한다. 그래서 7년간은 "뚜쟁이였다"는 악평을 듣게 된다.

 퐁파두르 머리모양

앞이마에서부터 머리를 높게 롤 모양으로 올리는 헤어스타일 (남자의 올백 형 헤어스타일) 앞머리를 뒤로 둥글게 말아 올리고, 양 옆머리는 위로 빗어 올려, 앞머리와 합치게 하는 머리모양. "퐁파두르 부인"에 의해 처음 시도된 스타일로, 곧 왕실의 여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로코코 시대"의 "마담 퐁파두르"의 헤어스타일에서 유래하였으며, 1940년대와 1960년대에 유행햇다.

 생애

1721년, 당시 파리의 부유한 금융업자였던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의 딸로 태어났다. "잔느 푸아송"은 "평민" 신분에 속했었지만,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어머니 애인의 호의 덕분에 귀족의 자녀 이상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성적이 매우 우수했으며, 예술을 애호하게 되었다. 그녀는 모든 연극의 대사를 암송할 수 있었고,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었으며, 열정적인 정원사이자, 식물학자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이 된 그녀는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루이 15세"를 매혹시키고 그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윽고 정치에도 참견하게 되어, 약 15년간 권세를 누리게 된다. 그녀의 추천을 받아, 1758년 외무대신이 된 "쇼아죌"은 "전쟁 대신" 등의 직위도 겸하여, 대략 10년에 걸쳐 사실상 "재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중농학파 "프랑수아 케네"는 그녀의 주치의였다. 1756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ㆍ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와 교류하여, "반(反)프로이센 포위망"을 결성했다(7년 전쟁).

 "예수회"와 악연

그녀와 "루이 15세"는 "예수회 신부"에게 자신들을 "공식 커플"로 인정해 주길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예수회"에 큰 상처를 안고 있었다. 그 때 마침 "라발레트 파산 사건"이 발생하자, 그녀는 "프랑스"에서 "예수회 추방"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예수회 추방"은 "라발레트 파산 사건"과 잇따른 "국왕 암살 음모" 등으로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 "그녀의 입김"으로 인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

2. 뒤바리 백작부인 (Comtesse du Barry1743~1793향년 50창녀 출신)

하층민 출신의 "사생아"였으며, 귀족이 아닌 평민출신으로 전직이 "매춘부"였다. "퐁파루드 후작 부인" 사후, "루이 15세"의 뒤에서 정치적 영향력과 실권을 행사하였다. "루이 15세"의 마지막 정부(情婦)로,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함께 "루이 15세"의 대표적인 정부로 알려져 있다. "루이 15세" 후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6세의 비)"와 수시로 갈등하였다. "창녀 출신"이었던 탓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물론, "루이 15세"의 세 딸로부터도 수시로 경멸ㆍ무시당했다. "루이 15세" 사후, "바스티유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가, 1793.12월 "프랑스 대 혁명기" 때,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수녀원에서 교육받은 뒤, "파리"의 한 의상실에서 잔" 보베르니에"라는 이름으로 점원 일을 보았다. 그곳에서, 전쟁 청부업자로 재산을 모은 가스코뉴의 귀족 "장 뒤 바리"의 정부가 되었다. 그는 그녀를 "파리 상류사회"에 소개했으며, 그녀는 타고난 미모로 귀족 출신 연인들을 계속 사로잡다가, 1768년에는 "루이 15세"의 눈에 띄었다. 1764년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죽었고, 1765년에는 "왕세자 루이 페르디앙", 1767년에는 "왕세자비 마리아 요제파", 1768년에는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가 사망하면서 "루이 15세"는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런 국왕을 1768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뒤바리 백작부인" 자격으로 왕궁에 수시로 출입했다. "루이 15세"는 그녀의 미모와 지성이 마음에 들어 공식 "정부(情婦ㆍ메트레상티트르)"가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뒤바리 백작부인"은 일정한 절차를 거친 후, 애첩 "퐁파두르 부인"을 이어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가 되었으며, "루이 15세"는 말년에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녀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처럼 정치에 깊이 있게 관여하진 않았지만, 그 이전까지 자신이 우러러보던 높은 귀족들이 자신에게 조아리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 레슈친스카"를 사랑했던 "루이 15세"의 딸들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대놓고 그녀를 무시하였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것이 외교 문제로 비화될까봐 염려하였고, "카우니츠 재상(오스트리아 총리대신)"을 통해 훈령을 보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자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앙투아네트"는 "카우니츠 재상"에게 무슨 자격으로 자신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느냐며 추궁하였다.

이에 "뒤바리 백작 부인"은 "루이 15세ㆍ오스트리아 대사"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의 행태가 계속될 경우, "프랑스ㆍ오스트리아"의 외교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 압박하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빠의 설득에 굴복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에게 "오늘 베르사유에 사람이 참 많군요"라고 직접 인사를 건넨 유명한 일화도 있다.

1774년, "루이 15세"의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이 임박해지자 출궁을 명받아 "베르사유 궁"을 나왔다. 이후 "루이 15세"가 하사했던 "루브시엔 성"에서 머물게 되었고, 그가 사망하고 손자 "루이 16세"가 즉위하자, "수도원"으로 사실상 추방된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루이 16세"는 그녀에게 "루브시엔 성"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당시 그녀는 "런던"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자신의 저택에 가보기 위하여 "프랑스"에 입국하지만, "공화주의자"에게 붙잡혔다. 결국 "콩시에르쥬리 감옥"으로 압송되었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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