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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프랑스 : 루이 14세 (1638)ㆍ태양왕ㆍ베르사유 궁전 건립

by 당대 제일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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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 (Louis XIVㆍ1638~1715ㆍ77세)"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제3대 왕ㆍ프랑스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왕이었으며, 거대한 궁이자 당대 프랑스 문화를 집대성한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프랑스 대혁명"은 "루이 16세" 때, 국가의 재정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삼부회"를 소집되면서 터지게 되는데, 급격한 재정 악화는 "루이 14세" 때부터 누적되었다.

 

1. 루이 14세 (Louis XIVㆍ1638~1715ㆍ향년 77세ㆍ163cm)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5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고, 실질적인 통치는 "재상 마자랭" 1661년까지 대신하였다. 유럽 군주 중 최장기 집권자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치세기간은 섭정친정 기간을 모두 합하여 72 3개월 18일이다"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평생 소화불량장염당뇨 등에 시달리면서도 "식탐"을 놓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폭식"이 남성미라는 시선과 쇼맨십 때문도 있지만, 어린 시절 "프롱드의 난"으로 겪었던 가난과 배고픔 때문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했다.

 별명 : 태양왕 (Le Roi Soleil)

젊은 시절, "발레"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고, 15세였던 1653년 "밤의 발레"에서 "아폴론 신"으로 분장, 직접 배우로 참여함으로써 "태양왕"이란 별명을 얻게 된다.

 명언

"짐이 곧 국가니라"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1694~1778ㆍ계몽주의 작가)"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오히려 죽을 때 유언으로, "짐은 이제 죽지만, 국가는 영원하리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인성

"프롱드의 난"을 진압한 야심찬 왕족들로부터 감시를 받거나, 행차할 때 귀족들이 마차를 멈추지도 않고 지나가는 등 무시당하는 일도 예사였으며, 하녀들조차 조롱하며 살았다고 한다.  오래 살아야 한다는 미신적인 이유로 남동생 필리프와 함께 여자아이 옷을 입고 살았다고 한다. 이때의 암울했던 기억이 절대군주가 된 이후의 행적, 즉 일을 열심히 한 대신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고 식탐 대왕이 된 것, 귀족들을 신임하지 않으며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배경이라는 시각도 많다.

부모인 "루이 13세"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안 도트리슈(오스트리아의 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극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탄생은 국가적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 그 자체였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지나쳤던 "루이 13세"는 3살배기에 불과한 아들이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매질하는 모진 아버지였다. 그러던 "루이 13세"가 1643년에 급서하면서 5세가 채 되기 전에 즉위했고, 어머니 "안"이 섭정을 했으나 대부분의 국사는 추기경이자 재상인 "쥘 마자랭(리슐리외의 후임자)"이 1661년까지 맡았다. 즉 23세에 친정을 시작한 것이다.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 것은 지방의 힘 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 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군주"의 전형으로 고찰되게 되었다.

치세 상당부분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과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3번의 주요 전쟁 (프랑스-네덜란드 전쟁ㆍ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ㆍ스페인 왕위계승 전쟁)과 2번의 작은 분쟁 (상속 전쟁ㆍ재결합 전쟁)을 치렀다. 이 시대 정치ㆍ군사상 걸출한 인물로는 "마자랭ㆍ장바티스트 콜베르ㆍ렌ㆍ보방"을 들 수 있다. 문화 또한 이 시대 번성하여, "몰리에르ㆍ장 라신ㆍ부알로ㆍ라 퐁텐ㆍ르브룅ㆍ리고ㆍ루이 르 방ㆍ쥘 아르두앙 망사르ㆍ클로드 페로ㆍ르 노트르" 등이 이 시기의 사람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루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왕과 왕실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맹트농 후작부인 (1635~1719ㆍ84세)ㆍ루이 14세의 정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보낸 탓인지 가난한 귀족여인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자로도 활동했다.  1683.07월, "왕비 마리 테레즈"가 사망한 후, 3개월 만에 "루이 14세"와 비밀리에 결혼은 했으나 신분의 차이로 이 결혼은 공표되지 않아. 공식적인 왕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실권자로 등장했다.  안주인이 된 "맹트농"은 궁궐을 카톨릭적인 경건함과 엄숙함으로 이끌어나갔다.  이로 인해 종교문제에 있어서 "루이 14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685.10월 "루이 14세"가 내린 "퐁텐블로 칙령"이다.  이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던 "앙리 4세의 낭트 칙령(1589)"이 철회되며, 본격적으로 "위그노(개신교ㆍ신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개신교 학교와 예배당과 시설들은 폐쇄되고 철거당했다.  상공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던 대략 30만 명 이상의 "위그노"가 "영국ㆍ프러시아ㆍ미국" 등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 중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스위스"로 가서 시계 산업을 일으킨다.  "칼뱅파"인 그들은 "자본주의ㆍ금융"에 밝았는데, 따라서 부(富)와 함께 그들의 경제적 전문성도 빠져나가는 중대한 사안이었기에 프랑스 산업과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2. 신 체

얼굴키 (163cm) +  검은 가발 (10cm) + 하이힐 (14cm)= 187cm

키(163cm):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하이힐(14cm의 빨간 굽)"을 최초로 신었고, 귀족들이 그것을 따라하여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키(163cm) + 가발(10cm) + 하이힐(14cm)= 187cm)           • 검은 가발 : 홍역을 앓아 빠진 머리를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 얼굴 : 처진 눈ㆍ코 옆으로 뚜렷이 드러난 8자 주름ㆍ"합죽이"같은 다문 입술

② 심장

사망 후, 부검된 심장은 암모니아에 담겨져 남았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왕족 물건들을 내다팔던 이들이 100프랑으로 팔아치웠다. 이걸 "영국 성공회"의 "윌리엄 버클랜드 주교"가 1,000프랑에 사가면서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주교의 후손인 "의사 프랭크 버클랜드 (1826~1880)"가 이걸 먹어치웠다. 이 사람이 워낙에 별미를 찾던 미식가로 전 유럽에서 알아주던 괴인이긴 하지만. 그런 "버클랜드"가 "루이 14세" 심장을 먹어보곤 특별한 맛은 없고, 그저 세상에서 왕의 심장을 먹어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자랑거리가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③ 건강상태 : 탐식치통

젊은 시절, "발레"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천연두ㆍ성홍열ㆍ홍역"을 앓았고, "위장병ㆍ치질ㆍ만성두통"이 떠나지 않았다.  발단은 탐식ㆍ치통이었다.  대식가로, 끼니마다 30접시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치아ㆍ위장이 약해졌고, 치통ㆍ두통을 호소하는 그에게 "수석의 다캥"이 이빨을 전부 뽑아버릴 권한다. "사혈(瀉血) 치료"의 방편이었으나, 마취도 없는 진행한 위험천만한 시술이었다.

아래턱에 금이 가고, 소독한답시고 뜨거운 쇠막대기로 14번을 지진 입천장에 구멍이 뚫렸다.  음식물이 콧구멍으로 역류했고, 어떤 것은 며칠이 지난 뒤, 콧구멍으로 튀어나왔다.  만성 염증이 생겼고, 악취가 났다.  이후 씹지도 않은 음식을 삼켰고, 장내엔 가스가 차서, 늘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식탐은 대단했다고 알려졌는데, 연회가 열릴 때면 폭식을 해서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루이 14세의 남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부인)"는 "국왕 폐하께서는 4종류의 수프를 따로, 꿩 2마리를 모두, 큰 샐러드 한 접시, 두꺼운 햄 2조각, 마늘소스로 양념된 양고기 한 접시, 페이스트리 한 접시 가득, 마지막으로 과일과 삶은 계란을 드시는 것을 자주 봤다. 폐하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은 모두 삶은 계란을 지나치게 좋아 하신다"고 기록했다.

당시에는 포크가 도입될 때였는데, 손자가 포크를 사용하려고 해도 "나는 칼과 손가락 말고는 다른 걸 사용해 본 적이 없어"라며 못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포크를 사용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꾸지람을 주던 때라, 포크 없이 손으로 마구 집어 먹었다.

"위장병"이 심한 나머지, 속이 좋지 않아 의자에 앉은 채로 "대변"을 쌌다고 한다. 

귀족들의 반응은 글자 그대로 "폐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왕의 배변 순간에 함께한 사람들 중 일부는 닦아 준다던가 등의 뒤처리를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남에게 항문을 맡긴다는 것은 굉장히 큰 빈틈을 보이는 것인 만큼, 암살 위험 등이 없다고 확신하는 굉장한 신뢰관계를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왕의 뒤를 닦아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왕의 몸은 함부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다 건너 "헨리 8세"도 시종 중에 자신의 뒤를 닦아주는 걸 전담하는 "청결관"이라는 직책을 뒀었는데, 그 중에는 "후작 급"의 고관도 있었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장 상태는 텅 빈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왕에게 다량의 설사약을 먹였고, 그것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용변을 보고 산 원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루이 14세" 시대에 화장실은 그의 주된 정무 공간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목욕하면 피부병이 생기거나, 전염병이 옮는다는 속설로 몸을 잘 씻지 않았다.

악취는 더욱 지독했고, 치루까지 생겼다. 관장으로 배설을 도왔다.  그리고 평생 목욕도 거의 안 하고 살았고, "치질"에 걸려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중년 이후에는 "중풍"에 걸리고, 치아질환ㆍ소화기질환으로 인한 설사병, 유동식만 섭취한 데에서 오는 영양부족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늘 누워 있었는데, 초상화에서 보는 당당한 포즈들은 사실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가는 다리를 보면, 발 모양이 이상하다. 발레의 동작을 취한 듯 보이지만, 통풍의 증세를 가린 것이라 한다. 실제 잘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하였다는 것으로, 이런 상태로 14년을 더 살았다.  다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하루 7시간 넘게 앉아서 공무를 처리하고, 매끼 기름지고 고칼로리 투성인 식사를 공개적으로 3~4시간 넘게 먹어대고 거기에 시간을 내어 애첩들을 만나러 다녔다.  당시 기준으로 엄청 오래 산 76세까지 장수했으니 나름 관리를 하긴 한 것으로 보인다.

3. 베르사유 궁 : 프랑스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베르샤유 궁"은 단순 사치를 위한 궁전이 아니라, "태양왕 루이14세"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지역 귀족을 이 궁으로 모이게 하면 그 귀족들을 감시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베르사유 궁에 화장실이 없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원래 화장실과 욕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으며, 왕실 전용 외의 화장실들도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중축이 한창이던 "루이 14세" 때, 궁전의 평면도를 보더라도 옷 방ㆍ용변실 등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었는데, "루이 14세" 말기에는 돈을 더욱 더 들여 기존 궁전의 "용변실"보다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하고, 면제품을 보관하는 벽장과 비누질ㆍ행구기를 위한 2개의 욕조 더운 물ㆍ찬물ㆍ하수관 등을 가졌으며 대리석 바닥은 고인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지하 배수로 쪽으로 기울어졌고, 바닥 밑에는 방수를 위해 납판이 깔리고, 벽난로는 도자기로 된 난로로 대체 되었는데다 최신 욕실이 있었고, 용변을 위한 변소실에는 물 내리기, 탱크로 연결된 분사장치를 갖춘 최신식 영국식 변기가 베르사유 여기저기에 설치되었으며, 전문적으로 청소하는 일꾼들을 구하여 수시로 왕궁을 비우고 가까운 "트리아농"에 체류해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대청소를 시켰다. 이랬던 것이 "프랑스 혁명" 이후인 18C, 궁전은 주거공간에서 박물관으로 용도를 변경하기 위해 옷방ㆍ욕실ㆍ변소ㆍ다용도실을 대부분 다 없애는 공간 개조작업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현존하는 궁전에는 과시용 공간만 남게 된다.

어린 시절 자신을 공격했던 "파리"가 영 불편했던 "루이 14세"는 궁정에 오래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아버지 "루이 13세"가 사냥용 천막으로 이용하던 "베르사유"를 자주 찾다가 아예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1662년, 친정을 시작하는 동시에 공사를 시작한 "베르사유 궁"은 20년 동안의 공사 이후 일단락되었다. 수십 년에 걸친 공사 결과, 오붓한 분위기의 사냥용 천막이었던 "베르사유"는 10,000명 이상의 왕실 식구가 상주하며, 1개월을 머물러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거대한 궁전으로 탈바꿈했다. 이 럭셔리한 궁은 미적 스케일에 있어서, 유럽 모든 왕실을 단연 압도했다.

"궁"의 건설 이면에는 재무장관이던 "니콜라 푸케 (1615~1680ㆍ소설 철가면의 주인공ㆍ욕심만을 채운다는 죄로 콜베르에게 고발되어 무기징역을 선고)"에 대한 "루이 14세"의 질투심이 있었다. "파리" 근교에 멋진 정원을 갖춘 저택에서 살던 "푸케"는 "루이 14세"를 자기 저택에 초대했다. 그런데 왕궁보다 멋진 저택에서 사는 "푸케"에게 질투를 느낀 "루이 14세"는 이런저런 죄목을 붙여 그를 실각시켰고, 왕의 권위야말로 절대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푸케"의 저택보다 더 화려한 새 궁전 건설에 나섰는데, 그렇게 지어진 것이 바로 "베르사유 궁"이다. 무리수를 두어 "베르사유 궁"을 지어서 국가의 재산을 많이 날려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에 투입한 비용은 8,200만 리브르로, 전투를 2~3번 치를 수 있는 비용이었으며 국가재정 지출의 3%를 차지했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니지만, "루이 14세"의 재위 기간 동안 국가 재정이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는 데에 "베르사유 궁" 건설은 무리한 대외 원정에 비해 그리 큰 기여를 하지는 않았다.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었으나, 1682년 "루이 14세"가 "파리 루브르궁"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1789년 왕가가 수도로 돌아갈 것을 강제될 때까지 "프랑스 앙시앵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였다. 또한 1783년, 이 안뜰에서 세계 최초의 열기구가 떠올랐다.

"로크 건축"의 대표 건축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에 1,400개의 분수들, 오페라와 "거울의 방"으로 유명하다.

거울의 방은 벽과 천장이 "베네치아 산 거울"로 된 길이 73m의 방인데. "1차 세계대전"을 형식적으로 마무리 지었던 "베르사유 조약"이 1919.06.28일에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 "베르사유 궁전"은 1번에 2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안뜰에는 "대트리아농ㆍ소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있다. 본격적으로 궁전으로 만든 절대왕정의 "태양왕 루이14세"는 자신을 상징하는 "태양", 태양신인 "아폴론"을 "베르사유 궁"에 배치했다. 대표적으로 거울의 방 천장화에 "아폴론"을 그려놓았고, "아폴론"이 끄는 마차를 동상으로 장식된 분수 또한 만들었다.

이러한 분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지만, 궁의 위치는 고지대에 있기 때문에 "센 강"의 물을 펌프로 퍼 와야 했다.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파리로 다시 궁전을 옮겼다. 나중에는 "프로이센(프러시아)"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유 궁"에서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이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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