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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프랑스 : 나폴레옹 (1769) ① 황제 (1804~1815)ㆍ브뤼메르 쿠데타

by 당대 제일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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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Napoléon Bonaparte1769~182152168cm)"는 프랑스 황제ㆍ프랑스 군인ㆍ정치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 말기)황제 (1804~1815)이다.

 

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ㆍNapoléon Bonaparteㆍ1769~1821ㆍ52세ㆍ168cm)

이전의 도시단위의 "용병의 전쟁" "국민 동원 체제 (국민 징집)"으로 전환 → 거대한 규모로 유럽 정복 시작→ 상비군 체제 도입

1815.06월 "워털루 전투(벨기에 근처)"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완전히 몰락하고,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간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남대서양" 외딴섬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보냈다. 특히 "세인트헬레나 섬"의 총독인 "허드슨"으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는 무례하게도 자부심 강한 "나폴레옹"에게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부르며,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는 등 철저하게 조롱했다. "나폴레옹"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본국으로 귀국시켰다. 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 매일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821년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위암"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해는 1840.05월,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한편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 모발"에서 "비소" 성분이 다량으로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출 생 : 아작시오 (코르시카 공화국지중해 서쪽 작은 섬 코르시카 섬)          사 망 : 세인트헬레나 롱우드 (영국령)          사 인 : 위암독살설(비소 중독설)          유 배 : 엘바 섬(1814): 1813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게 패배지중해의 작은 섬의 영주로 추방          세인트 헬레나(1815):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6년간 유배

학 력 : 1784~1785 파리 육군사관학교 (16세에 졸업) 포병소위          종 교 : 로마 가톨릭교회 (1809년 파문당함)          왕 가 : 보나파르트 왕가 (이탈리아 계)          칭 호 : 나폴레옹 1(Napoléon Ier)프랑스 제국 황제  왕 가 : 보나파르트 왕가 (이탈리아 계)          칭 호 : 나폴레옹 1 (Napoléon Ier)프랑스 제국 황제           취 임 : 쿠데타 성공 (1799)1통령에 취임          재 위 : 1804.05~1814.04 (10) 프랑스 황제 1815.03~ 1815.06 (3개월)          대 관 : 1804.12.02 (노트르담 대성당), 자신이 직접 황제관 수여독교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          전 임 : 루이 17프랑스 제1공화정          후 임 : 나폴레옹 2(1815.06.22~07.07) 루이 18(1815~1824루이 16세의 동생)

• 처 : 1796 : 조제핀 드 보아르네 (귀족의 미망인총재 정부의 총재 "파울 바라스"의 애인)1810 : 마리 루이즈(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의 딸,811년 로마 왕 "나폴레옹" 출산)          약 혼 : "클라리 가""데지레 클라리" (형의 처제)파혼(1796)          가 족 : -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코르시카 법관)          - 마리아 레티지아 보나파르트(코르시카 장군 조반니 제로니모 라몰리노의 딸)

※ 유언 : 1821년, "나폴레옹"은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기 전 유언은 "프랑스ㆍ육군ㆍ육군 총수ㆍ조핀"이었다. 1814년, "조제핀"의 죽기 전 유언은 "보나파르트ㆍ로마왕ㆍ엘바섬"이었다.  

 나폴레옹의 키

키가 150cm 가량의 왜소한 체격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키는 168cm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 프랑스의 척도 단위인 "푸스(pouce)"와 영국의 단위인 "인치(inch)"가 서로 달라서 생긴 오해로, 1인치에 해당하는 "1푸스"가 "1인치"보다 긴 데서 유래한다. 또한 키가 큰 근위대에 둘러싸인 나폴레옹이 상대적으로 작아보였던 탓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전문가들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키는 미터법으로 환산하여 168cm 정도로 당시 프랑스인들의 평균 신장인 164cm 보다 컸다.

 나폴레옹 황제 등극의 충격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은 다방면으로 여러 가지 충격을 주었다. 그를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하여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예정이었던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고 있던 "베토벤"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한탄하며, 나폴레옹에게 곡을 헌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목도 "영웅"으로 변경했다. 또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을 보면서 절대 권력에 혐오감을 갖게 되어, 후에 왕정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산 마르틴"과 결별하였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 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독립하게 되는데, 그 독립국이 훗날 "아르헨티나"였다.

2.  생 애

살아 있을 때는 "독재자"라고 불렸으나, 사후 그는 "혁명의 아들"이라고 불렸으며,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불패의 신화로 다시 등장했다. 그는 전쟁마다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가장 위대했던 장군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의 민법 관할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지만, 전쟁에서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코르시카 소 귀족출신으로 프랑스 혁명 당시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지에서 전례 없는 승리들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정치적 지지 세력을 규합한 그는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 나아가 종신통령에 취임하였고 1804년에는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통치는 대내적인 개혁과 대외적인 정복으로 이어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812년에 실시한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이후 1814년에 몰락하였다. 1815년 잠깐 다시 정권을 장악하지만 워털루 전투 패배 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서 1821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유럽 전체에 헤게모니를 형성했고,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을 퍼트렸으며, 이전 정권의 양상을 복원하는 "제국 군주제"를 통합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으로 "파리 사관학교 포병대"에 입교한 뒤, 포병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는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 눈에 띄게 지위가 올랐고, 제1차 및 제2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5년 뒤에 "프랑스 원로원"이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을 주도하였다.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이 전쟁에 휘말렸으며, 많은 승리 뒤에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적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광범위한 제휴와 친구들과 친척들을 유럽 다른 나라들을 통치케 하여 프랑스의 위상을 유지시켜 나갔다. "스페인의 무장시민들과의 싸움"과 1812년의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의 삶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의 대 육군은 전쟁에서 큰 손상을 입었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1814년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하였고, 나폴레옹을 정권에서 내려오게 하여 "엘바 섬"으로 유배했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그는 엘바 섬에서 도망쳐 나오고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1815.06월에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배하였다.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보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위암"으로 결론이 났으나, 그의 사인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의 사인은 "독살"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으며, 나폴레옹의 모발 등 신체에서 "비소" 중독자의 질환, 증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1840년 "루이 필리프 1세"에 의해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1861년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현재 전쟁박물관이 있는 "앵발리드"에 안치 되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코르시카 섬"에서 "코르시카 인"으로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된 후, 주검으로 프랑스로 돌아 올 때에는 완벽한 프랑스인이었다. 그의 주검은 돌아 올 당시에는 대중으로부터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사후, 혼돈의 프랑스에서 민족주의 열기가 불타오를 때, 영웅으로 다시 등장했다. 그는 살아 있을 때는 "독재자"라고 불렸으나, 사후 그는 "혁명의 아들"이라고 불렸으며,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불패의 신화로 다시 등장했다.

3. 1799.11월 :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안개달(Brumaire) 18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ㆍ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내세워 프랑스를 위협하였다이때의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  1799.08.01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가 2척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 전함들을 격침시켰고, 이집트 곳곳에서도 "반 프랑스" 봉기가 일어났다그로 인해 영국해군이 해당지역의 재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하고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되고 만다나폴레옹은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나폴레옹과 함께 온 학자들은 이집트의 중요한 유물들을 약탈하고 수집하였다.

1799년 나폴레옹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오스만"군대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보급 부족과 풍토병으로 나폴레옹은 이집트로 되돌아와야만 했다이때 나폴레옹은 유럽에 "2차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는 08.24일 일시적인 영국 해군의 철수를 이용하여, 군대를 "클레베르 장군"에게 맡기고, 이집트를 몰래 빠져나와 프랑스로 향했다영국의 해상권 장악으로 이집트와 프랑스 간의 연락망은 두절된 상태였고, 본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나폴레옹은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서 몰래 1799.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한 때는 10월로 프랑스의 전황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하지만 재정은 파탄이 났고"총재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다"500인 회"와 "원로원" 나폴레옹의 전선 이탈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총재정부 지도자들인 "엠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와 동생 "루이 시에예스"로제 뒤코스조제프 푸셰탈레랑 등의 협력으로 1799.11.09즉 "안개달(Brumaire) 18"에 쿠데타를 감행하여 체제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 체제"를 수립하였다중간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에게 장악된 군대와 30여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500인 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들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4. 연 보

1779 (10세): 프랑스 "브리엔느 유년 육군사관학교" 입학  1784 (15): 파리 육군사관학교 입학  1785 (16): 파리 육군사관학교 졸업 (11개월 만에 졸업58명 중 42)포병 소위 임관  1789 (20): 프랑스 혁명에 참가  1795 (26): 파리에서 왕당파의 봉기수도 시가지에서 대포로 진압 (사단장 진급)

1796 (27세):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결혼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  1798 (29): 이집트로 파병혁명 정부(총재 정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의 견제병력 : 5만여 명,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피라미드 전투 승리"로제타 석" 발견영국군에 의해 "대영 박물관"으로 이관  프랑스 "샹폴리옹"이 해석

1799 (30세):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대패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 → 본국과의 연락 두절 → "혁명 정부" 승인 없이 혼자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귀국

1799( 30세): "브뤼메르" 쿠데타 성공  "500인 회" 해산시켜 헌법 폐기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제정  국민투표 실시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  1800 (31세): 연합국에 강화 제의 → 거절당하여 알프스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 → 참모 만류"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알프스 진격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승리

1801 (32세): 오스트리아와 강화조약 체결 → 제2차 "대프랑스 동맹" 붕괴 → 영국만 전쟁 지속 → 중심축인 "소 피트"가 사망 → 1802.03월 양국간에 "아미앵 조약" 체결안정  1802 (33):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 창설종신통령(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 강화

1804 (35세):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인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 제정"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국가의 세속성종교의 자유경제 활동의 자유"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국민투표로 제정 수락 프랑스제국 초대황제 나폴레옹 1세 등극(1804.12.02 대관식, 노트르담 대성당) 프랑스 "루이 16"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

1805 (36세): 영국의 "아미앵 조약" 파기 → 영국 상륙을 위한 "도버 해협"을 접한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 → 영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제3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 오스트리아군 격퇴, 빈 점령 → 구원군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의 군대와 합류 →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군 완승 →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트 조약"체결, 항복 선언 → 이 전투는 3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3황제 회전"이라고도 불린다.

1805 (36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함 그러나 프랑스 해군은 1805.10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게 완패를 당하여 영국 상륙 작전은 실패 → 형 "조제프"를 "나폴리" 국왕으로,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 국왕에 각각 앉히고 자신은 "라인 동맹"을 발족시켜 보호국화 하여 독일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 로마제국" 해체

1806 (37세): "프로이센"은 영국ㆍ러시아ㆍ스웨덴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조직 →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 승리, 베를린 입성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 선포  영국과의 모든 교역 금지

1807 (38세): 폴란드로 진격 →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격파 → "프로이센"의 영토 축소, 폴란드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 "바르샤바 대공국" 형성 → 남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를 "베스트팔렌"의 왕으로 임명 → 프랑스 제국의 "위성 국가"로 지정스페인의 국왕 "페르디난드 7"를 내쫓고, 자신이 스페인을 통치

1810 (41세): 14년 동안 함께 살아온 황후 "조제핀"과 이혼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의 딸, "마리 루이즈"와 혼인  1811 (42): "마리 루이즈"는 로마 왕 "나폴레옹" 출산  1812 (43):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 →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공격모스크바 점령 → 러시아의 항전ㆍ겨울준비 미비 → 프랑스군 퇴각 →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공격하여 궤멸 → 러시아의 승리

1813 (44세):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ㆍ러시아ㆍ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 휴전 → "메테르니히"와"평화교섭" 불발 →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대패 → 프랑스로 도망  1814 (45):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 "블뤼허"의 연합군 25,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 16,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 제국의 수도 "파리" 함락"퐁텐블로 조약"을 체결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  "해방전쟁"이라함.

1814 (45세):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  1815 (46): "엘바"섬 탈출  파리로 와서 복위 성공  연합국에게 강화 제안  연합국 거부 → 초반에는 승세 →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ㆍ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 → "백일천하  (실제는 95일)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섬인 "세인트 헬레나"로 유폐(6년간)  1821 (52): "위암"으로 사망, "비소" 독살서 제기  1840 : "루이 필리프 1"에 의해 프랑스로 유해 반환  1861 : "나폴레옹 3(나폴레옹의 조카)"에 의해, 현재 전쟁박물관이 있는 "앵발리드"에 안치

5. "프랑스 대혁명" 당시 상황

 프랑스 "국가재정 적자", "대혁명"을 일으키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미국)에서 혁명이 일어나, "영국"과 "혁명 민병대"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이 "미국독립전쟁"인데, 시작은 "보스턴 차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영국 입장에서는 식민지의 이주민이 일으킨 "반란"이었고, 프랑스 입장에서는 영원한 적(영국)에 대항한 영국 식민지 주민의 "저항"이었다.

이에 프랑스는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하는데, "혁명 민병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14세"이후 줄곧 계속된 전쟁으로 인하여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고, "루이15세"시절에도 이러한 적자를 해소하지 못했으며, "루이16세"에 와서도 적자 누적상태가 계속되었다. 재정적자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없었음에도 영원한 적인 영국에 저항한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한 후 더욱 심각한 재정적자에 빠진다. 뿐만 아니라 "루이16세"시절에는 흉년이 계속되어 식량 위기까지 엄습했다. 영국 식민지 북아메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났듯이 프랑스는 본토인 파리에서 반란의 불꽃이 일어날 참이었다.

"루이16세"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70여 년간 개최되지 않은 "삼부회"를 소집한다. "삼부회"는 3개의 신분인 귀족ㆍ성직자ㆍ평민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을 말하는데, 왕권이 약하던 시절에 "삼부회"는 왕에게 정치적ㆍ경제적 이익이 되는 형식상의 행사였다. 프랑스에서 절대왕권이 수립되자, "삼부회"는 열리지 않았는데, "루이16세"는 "면세"라는 특권을 누리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세금징수를 실시하려고 하자, 이에 저항이 일어난다.

왕은 새로운 세금제도를 만들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특권을 가진 귀족, 성직자, 평민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 "삼부회"는 파행을 거듭한다. 결국 "삼부회"는 3개의 신분 (성직자귀족평민) 사이의 갈등을 촉발시켰으며, 이는 평민의 본격적인 저항을 낳았다. 평민계급은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의회"를 만들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왕의 군대가 진압을 위해서 파리로 군대가 집결 중이라는 소식이 알려진다. 이에 파리 시내에서는 군대와 시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으며, 파리 시민들은 무기를 탈취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왕의 군대와 시민군 사이에 전투가 발생했으며, "바스티유" 감옥습격은 파리를 벗어나, 전국으로 확대가 되는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루이 16세"의 탈출과 단두대

"루이16세"는 평민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평민들은 왕이 살고 있던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행진한다. 평민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왕은 평민들이 만든 의회가 재정한 "프랑스 인권선언"을 인정하고 감금당한다. 왕권은 추락하고, 의회가 권력을 장악한다. 의회는 "입헌군주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으며 선거를 통해 "입법의회"가 탄생한다. "입법의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파(푀양파)와 왕이 없는 "공화국"을 지지하는 파(지롱드파, 자코뱅파)로 양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왕정체제"가 붕괴하자, 프랑스에서 특권을 누리던 귀족과 성직자들이 이웃 나라로 탈출을 하기 시작했다.

왕은 과격한 혁명을 거부했고, 결국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왕국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국경에 도달할 즈음, 왕과 왕비의 탈출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한 때 왕궁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 왕과 왕비의 얼굴을 알아보아 결국 체포된다. 파리로 돌아온 왕과 왕비를 본 파리 시민들은 분노했으며, 혁명을 거부한 왕을 비난했다. 이제 "입헌군주제"의 가능성은 없어졌으며, "공화주의자"들이 득세를 했다. 이에 이웃나라인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왕국"은 혁명이 자국으로 파급되는 것을 염려해 "루이16세"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협박을 가했다. 일시적으로 왕은 지위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이 프랑스로 진격했으며, "프랑스 혁명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장교인 귀족들이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군대를 지휘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파리가 위협받았다.

혁명은 위기를 맞았다. 이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왕이 머물고 있는 궁전을 공격했다. 궁을 지키던 스위스 인으로 구성된 "용병"과 "근위대"는 전멸하고, 왕은 유폐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1792.09.20일에 "발미 전투"가 일어난다. 패배를 거듭하던 "프랑스 혁명군"은 당시 유럽 최강으로 불린 "프로이센 군"을 격퇴한 것이다. 자원입대한 평민의 군대가 귀족이 지휘하는 정규군을 격파한 것이다. 이에 혁명은 유지가 될 수 있었다. "발미 전투"로 공화국은 계속 유지가 되었으며, 그 결과 "루이16세"는 운명의 날을 맞게 될 터였다. 1793.10.16일 재판에 따라, "루이16세"는 단두대에 올라 처형당했다.

 나폴레옹의 초고속 진급과 영웅의 등장

사관학교 졸업생으로 혁명을 지지한 나폴레옹은 귀족들이 대거 군대를 떠남에 따라, 매우 젊은 나이에 초고속 진급을 거듭했다. 1793년 그는 대위였는데, 혁명정부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군항이던 "툴롱 항구"에서는 왕당파들이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반란을 진압하고자 군대가 동원되었으나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이때 나폴레옹이 선발되어 "툴롱 항구"로 파견된다. 그는 포병장교였던 관계로 포격전을 실시해 반란군을 진압했고, 영국 해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 아니었고 행운은 그의 편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승리였다. 아무튼 그는 "툴롱 항구"에서의 포위전으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제 나폴레옹은 장군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위는 안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혁명을 지지하던 장군이든 장교든 간에 운이 좋으면 해임이고, 운이 좋지 않으면 단두대로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군 지휘관으로 능력이 충분해 보였고 정치적 능력도 있었으며, 그를 후원하는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있었기에 단두대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툴룽 항구"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크게 알려지게 된다.

1794년 공포정치를 실시하던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실각 후 처형된다. 공포를 기반으로 혁명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공포는 "로베스피에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내일 누가 단두대로 올라갈지 몰랐기 때문에, 혁명의 동지들은 그를 먼저 단두대 위로 올려 보냈다.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남동생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감옥으로 가야만 했다. 감옥에서 석방되는데, 새롭게 등장한 총재정부의 총재인 "바라스"에게 등용되었다. 1795.10.05일 파리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나는데 나폴레옹이 시가전을 통해 반란을 진압했다. 시가전에 대포를 동원해 제압해 버린 것이다. 이에 그는 다시 장군으로 복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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