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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앤 불린 (천일의 앤)ㆍ헨리 8세ㆍ엘리자베스 1세

by 당대 제일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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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불린 (Anne Boleynㆍ1501 (1507)~ 1536ㆍ35세 (29세))"는 헨리 8세의 제1계비ㆍ엘리자베스 1세의 생모로, "런던탑"에는 밤마다 "머리 없는 앤 불린"의 유령이 떠돌아다닌다는 전설이 있다. 1969년 개봉한 영국 영화 "천일의 앤"의 주인공 (헨리 8세 역으로 리처드 버튼 출연)이다.

 

1. 앤 불린 (Anne Boleynㆍ1501(1507)~1536ㆍ향년 35세(29세))

헨리 8세의 제1계비ㆍ엘리자베스 1세의 생모"캐서린 왕비"와의 결혼무효를 교황이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헨리 8""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민족주의 성격의 종교개혁을 일으켜 "잉글랜드 교회""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시켰다.(영국 종교개혁 그녀의 왼손 손가락이 6개였다거나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는 소문은 마녀로 몰려 사형당한 사실에서 비롯된 유언비어로 추정된다.  1857년, 그녀의 유골이 발견됨에 따라, 손가락이 6개였다는 소문은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후, 불륜ㆍ이단ㆍ모반 등의 혐의를 받아 1536.05.19일 사형 당했다. 

그로부터 11일 후,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앤 불린의 상궁 출신)"와 결혼하였다. 후일 "헨리 8세"의 5번째 왕비가 되는 "캐서린 하워드"는 그녀의 외사촌 여동생으로, 그녀의 외삼촌 "에드먼드 하워드 경"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외교관 "토머스 불린", 어머니는 명문 집안인 하워드 가문의 "엘리자베스"였다. 자매 언니인 "메리 불린" 역시 한때 "헨리 8세"의 정부로, "윌리엄 캐리"의 미망인으로, "윌리엄 스태포드"와 재혼하였다.

총명하고 재치있는 성격으로,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수업을 받으며 예법을 닦았고, 프랑스어ㆍ라틴어에 능숙했다. "프랑스 루이 12세"의 왕비 "메리 튜더"의 시녀가 되었다가 "루이 12세"가 승하하고 "프랑수아 1세"가 즉위하자 그의 "정비 클로드"의 시녀로 간택되었다. 오랜 프랑스 생활로, 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그녀는 이후로도 프랑스식 옷차림ㆍ문학ㆍ음악ㆍ종교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1521년경, 그녀는 "오몬드 공작"과의 혼담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와 "헨리 8세"의 정비 "아라곤의 캐서린"의 시녀가 된다. 지참금 문제로 "오몬드 공작"과의 혼담이 무산되자, 그녀는 "노섬브리아 공작"의 후계자 "헨리 퍼시"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분 차이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반대로 "헨리 퍼시"와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이에 낙심한 "헨리 퍼시"는 궁정을 떠났다.

"안토니아 프레이저(전기작가)"에 따르면, "헨리 8세"가 그녀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1526년경이라고 한다. 그녀는 전통적인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인은 아니었으나, 흑발에 까만 눈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당시 유럽 유행의 최첨단을 걸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받은 교육 덕분에 세련된 기품이 배어 있었으며 화술도 뛰어났다. 이미 앤의 누이인 "메리 불린"을 정부로 두었던 전력이 있는 "헨리 8세"는 "앤"마저 정부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앤"은 왕의 유혹을 거절하며, 정식 결혼을 요구했다. "왕비 캐서린"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던 "헨리 8세"는 젊은 "앤"이 왕자를 낳아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1527년,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시도하였다. 

"캐서린"의 거센 저항과 "로마 교황청"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히자, "헨리 8세"는 결국 "종교개혁"을 일으켜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시키고 나서, 스스로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형수인 "왕비 캐서린"과 결혼하여,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결혼한 지 20년 만에 별거하였다. 그리고 1520년대 초부터 자신의 정부였던, 왕비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혼인하려고 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혼인 무효화를 허락하지 않아 "로마 교황청"과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다. 

그 뒤 그는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시켰다. 1536ㆍ1539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ㆍ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소령(所領)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1536.01.08.일, "헨리 8세ㆍ앤"에게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헨리 8세ㆍ앤"은 밝은 노란색 옷을 차려입었다고 한다.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죽음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기쁨을 드러내었다.

1529년부터 "앤"은 왕의 총애를 받으며, "잉글랜드 궁정"에서 출세가도를 걷는다. 하지만, "앤"은 신실한 "캐서린 왕비"를 왕궁에서 쫓아낸 여자라고 백성의 반감을 샀다. 1532년, "헨리 8세"는 "앤"에게 "펨브로크 후작"의 지위를 내려 그녀의 신분을 격상시켰다. 미혼 여성이 직접 작위를 하사받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같은 해, "크랜머 대주교"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을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무효로 했다. 1533.01월경, "헨리 8세ㆍ앤"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앤"은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같은 해 06.01일, "앤"은 호화로운 예식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했다.

1533.09.07일, "앤"은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헨리 8세"는 실망했으나, 곧 아들도 생길 것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앤"은 다시 임신했으며, 만일 그녀가 이번에도 아들을 낳지 못할 시 어떻게 될지는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헨리 8세"는 경기에서 그만 낙마하여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한때 "헨리 8세"의 생명이 위험한 것처럼 보였다. 사고 소식을 들은 "앤"은 그 충격으로 15주간 잉태하였던 사내아이를 유산하였다. 그날이 1536.01.29일로 마침 "캐서린"의 장례식을 거행한 날이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본다.

"마이크 애슐리(저술가)"는 "앤"이 엘리자베스를 낳고, 1536년 사내아이를 유산한 후, 2명의 사산아를 더 낳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앤"이 수차례에 걸쳐 유산을 반복했고, 부부 사이의 말다툼이 잦아지자 왕의 마음도 "앤"에게서 멀어졌다. "앤"이 마지막 유산에서 회복할 즈음, 왕은 "자신의 혼인이 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대신 왕은 "앤"의 시녀 "제인 시무어"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앤"의 정적 "토머스 크롬웰"은 "제인 시무어"를 지지하면서 "앤 왕비ㆍ불린 가"의 추락을 획책했다. 1536년, "앤"과 남동생 "로시포드 공작 조지 불린", 그리고 두 사람과 가까운 귀족 청년들 몇몇은 간통ㆍ반역ㆍ근친상간 혐의로 "런던탑"에 감금되었다. 심지어 "앤"은 마법으로 왕을 유혹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했으나, "앤"은 2차례에 걸친 재판에서 모두 유죄 선고를 받았다.

본래 "앤"은 화형당하기로 판결되었으나, 나중에 "헨리 8세"에 의하여 참수로 감형되었다.

참수형이 확정되자, "앤"은 시녀에게 "내 목이 가늘어서 다행이다"고 씁쓸한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앤"의 사형 집행은 그때 당시 참수에 흔히 쓰이던 도끼 대신, 잘 드는 칼을 사용하기로 결정되었고, 왕은 "앤"의 참수를 위해 "프랑스"에서 칼을 쓰는 노련한 사람을 특별히 고용했다. 동생 "로시포드 공작"이 처형당한 지 이틀 후인 05.19일, "앤"은 "런던탑"에서 참수되었다. 사형장에서 "앤"은 구경꾼들에게 "왕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충성을 다해 섬겨달라"고 부탁하는 연설을 남겼다. "앤"의 마지막 말은 "주님께 제 영혼을 맡깁니다"였다. "앤"의 사형 집행은 단칼에 마무리되었다.

2. 헨리 8세 (Henry VIIIㆍ1491~ 1547ㆍ향년 56세)

잉글랜드의 국왕 (재위 1509~1547)ㆍ아일랜드의 영주 (1541~1547)150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6번이나 결혼한 군주로 유명하다.  2명 왕비를 처형하고, 2명 왕비와 이혼했으며, "토머스 모어ㆍ토머스 크롬웰" 등 시종과 공신을 처형하고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였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하였다.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2번째로 등극하였다 "헨리 7세"의 2째 아들로, 형 "아서 튜더"가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헨리 8세"는 "영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치세 초반기에는 14C "존 위클리프" 이후 활력을 얻기 시작한 "종교개혁"을 강력히 억압하였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한 왕으로 더 알려졌다. 이 싸움은 결국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6C 이래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이었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잉글랜드 교회"에서의 "왕위 지상령"을 갖게 하였다.

"헨리 8세"가 자신의 1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2번째 부인인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문당했지만, 임종 때까지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지지하였다. 본격적인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였다. 또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ㆍ웨일스"의 통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3.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ㆍ1533~1603ㆍ향년 70세ㆍElizabeth Tudor)

"헨리 8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509~1547)아일랜드의 영주(1541~1547)열강들의 위협급격한 인플레이션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C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초를 다진 통치자였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 주도권을 쟁취했으며,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내적으로는 "튜더구빈법"을 시행하여 민생을 안정화시켰다.

 천재로, 특히 어학ㆍ문학 부문에서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7개의 언어를 구사했는데, 모두 10살 전후에 마스터한 것들이다.  만약에 통치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시인이나 저술가로도 이름을 날렸을만한 사람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으로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② 늘 "짐(朕)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문학ㆍ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였다. 당시 영국 민중들은 집안에 악기를 갖추어 문화 활동을 즐길 정도로 영국 문화는 꽃을 피웠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아시아에는 후에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식민지 경영기관인 "동인도회사"를 창설하여 그 세력을 세계로 뻗어나가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an era)"라고 부르게 된다.

"헨리 8세"와 2번째 아내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는 첫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고, "앤"과 결혼했지만 3년 만에 간통과 반역죄를 씌워 참수시켰다. 뿐만 아니라 의회를 매수하여 자신과 "앤"의 결혼이 처음부터 무효였으며, 따라서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선포했다.

1537년, "헨리"의 3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가 아들을 낳았다. 이복 언니 "메리"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서열 3번째로 밀린 "엘리자베스"는 "로저 애스컴"을 비롯한 훌륭한 가정교사들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고전ㆍ역사ㆍ수사학ㆍ윤리ㆍ철학을 배웠으며, 그리스 어ㆍ 라틴 어 이외에 프랑스 어ㆍ이탈리아 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이런 외국어 능력은 훗날 그의 외교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리하고 진지한 그녀는 신학도 공부하여 형성기에 있던 성공회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1547년, "헨리"가 죽자, 10세밖에 안 된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1537~1553)"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에드워드 6세"가 1553년에 사망하자 가톨릭교도인 "메리 1세(1516~1558)"가 즉위했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려고 했고, 이는 개신교도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란탄압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목숨은 매우 위태로워졌다. 표면상 가톨릭 계율에 순종하는 척했지만, 다음 왕위계승서열에 있는 그녀는 정부를 뒤엎고 "개신교" 신앙을 회복하려는 음모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54.01월, "토머스 와이어트 경"이 반란을 일으킨 후, "엘리자베스"는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지만 사형은 간신히 모면했다. 그러나 "메리"의 통치 기간 내내 "엘리자베스"는 줄곧 온갖 박해를 받았다.

 메리 1세 (잉글랜드ㆍMary Iㆍ1516~1558ㆍ42세재위 1553~1558ㆍ메리 튜더 (Mary Tudor))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재위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 복고정책"으로 "개신교ㆍ성공회"를 탄압하여, "블러디 메리(Bloody Maryㆍ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1558.11.17일, "메리"가 죽자 "엘리자베스"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정부를 구성하고 포고문을 공포했다.그녀는 "윌리엄 세실ㆍ니콜라스 베이컨ㆍ프랜시스 월싱엄ㆍ니콜라스 스록모턴"을 비롯하여 경험이 풍부하고 믿을 만한 조언자들을 주위에 모았다. 즉위한 날 아침에 "수석국무장관"으로 임명된 "세실"은 그 후 40년간 현명하고 노련하게 여왕을 보필했다. 대내적으로는 "추밀원(Privy Councilㆍ국왕 측근의 소수 귀족 집단인 자문기구)"을 중심으로 유능한 정치가들을 등용했으며, 정치는 "성실청(Court of Star Chamberㆍ영국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별의 방에서 열리던 형사재판소)"을 통해, 종교는 "특설고등법원(Court of High Commissionㆍ엘리자베스 1세 때 만들어진 종교재판소로, 훗날 청교도 탄압기관으로 이용되었다)"을 통해 통제했다.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장려했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히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지만, 양을 키우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한 인클로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방황은 심각해서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튜더구빈법)"으로 불리는 사회복지정책을 제정했다.

또한 잉글랜드를 "개신교"로 돌려놓았다. 1559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수장령(首長令)"으로 "헨리 8세"의 반교황적 법령을 되살렸으며, 여왕을 "성공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엘리자베스 정부는 이런 구조적 개혁과 교회 예배에 대한 개혁을 신중하고도 꾸준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과격한 개신교도들은 교회의 성직체계와 교회재판소를 철저히 개혁하고, 기도서와 교회의식에 남아 있는 가톨릭적 요소를 말끔히 씻어내며, 성공회 기피자를 적극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라고 요구했다. 가톨릭교도 역시 그녀의 조치에 저항했다.

1569년, 완강하게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봉건 귀족과 그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571년에는 "리돌피 음모"라는 국제적인 여왕 암살 음모가 적발되었다. 이것은 모두 15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나 "잉글랜드"로 망명한 "메리 스튜어트 여왕"과 관련이 있었다. 가톨릭교회가 진정한 잉글랜드 여왕으로 간주한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결국 "프랜시스 월싱엄 경"이 이끄는 정부 첩자들이 "메리"가 여왕 암살 음모에 깊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586년에 또 다른 "엘리자베스" 암살 음모인 "배빙턴 음모"에 메리가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친서로 증명되었고, "메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의회는 즉결 처형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는 3개월 동안 망설인 끝에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고, "메리"는 사형 당했다. 이로써 영국 내에서 "엘리자베스"의 지위는 공고해졌다.

※ 메리 1세 (스코틀랜드ㆍMary Iㆍ1542~1587ㆍ재위 1543~1567ㆍ메리 스튜어트 (Mary Stuart))

스코틀랜드의 여왕ㆍ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의 5촌 조카훗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 왕이 되는 제임스 1(스코틀랜드로는 제임스 6)의 어머니"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지속적으로 신경전을 벌여 "엘리자베스 1"와는 숙명의 라이벌이라는 평가가 있다 "프랑스"의 왕비였으나 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한 후 1561년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여 여왕으로 통치를 하였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의 권력다툼에서 패하여,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한편 오랫동안 "엘리자베스"는 "프랑스ㆍ스페인"과 복잡한 외교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프랑스ㆍ스페인"에 한참 뒤처진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의 해적들을 지원하여 "스페인"을 견제했다. 또한 모직물 공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는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그 결과 "스페인"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고,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를 견제하는데 필요했던 가톨릭교도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된 후 "스페인"은 다급해졌다.

1586년경, "펠리페 2세"가 이른바 "영국에 대한 보복 계획"을 위해 함대를 준비하고 있으며, 또한 "교황 식스투스 5세"로부터 이단의 섬나라 영국을 정복하여, "로마 교회"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만들라는 밀명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여왕에게서 "영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인 에스파냐를 응징"하는 전권을 위임받았다. 이듬해 "드레이크"는 약 30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공격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뢰가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드레이크"는 "에스파냐의 카디스 항"을 공략하여 36시간 만에 수천 톤에 달하는 무적함대에 보급될 선적화물과 보급품을 파괴했다. 이 공격으로 "에스파냐"는 영국을 침공할 함대의 발진을 1년 더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는 1588.07월 "영국 해협"에 무적함대를 등장시켰다.

"하워드 경"이 해군 제독에 임명되고, "드레이크"는 부 제독에 임명됐다. 그러나 정작 전세를 일순간에 결정지은 것은 바로 "드레이크"의 돌격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에스파냐" 선박 1척을 직접 나포했고, "화공선(火攻船)"을 동원하여 "칼레"에서 무적함대를 격퇴시켰다. 당시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운 좋게도 "신의 바람"이 불어와서, "에스파냐 함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거의 대부분이 난파됐다. "드레이크"는 200년 후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필적하지 못할 인기를 얻은 잉글랜드의 영웅이 되었고, 이 일로 인해 "에스파냐"는 유럽에서 주도권을 잃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이 과정에서 점차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났으며, 수많은 문학이 꽃피었다. "셰익스피어의 문학ㆍ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였다. 서민들도 집안에 악기를 갖추어 문화 활동을 즐길 정도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를 일컫는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개척했다. 아시아에는 식민지 경영기관인 "동인도 회사"를 창설하여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데 필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대를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통치 말년에는 흉년ㆍ물가 폭등ㆍ실업이 발생했고, 국민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여왕의 충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일랜드"를 정벌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충신인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의 항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로버트 데버루"는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지만, 왕명을 어기고 "런던"으로 돌아와 반역을 기도했다. 그는 1601.02.25일에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 반란이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기력을 앗아간 듯, 질병에 시달리던 그녀는 1603.03.24일 "스코틀랜드 왕"이자 자신이 처형한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잉글랜드"는 새 국왕을 열렬히 환영했으나,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 인"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에 향수를 느끼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여성의 권위ㆍ왕의 위엄ㆍ국가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인"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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