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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영국 : 로스차일드 가문ㆍ세계 최고 갑부ㆍJohn Rothschild Family

by 당대 제일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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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John Rothschild Family) 가문"은 유대인 금융재벌 가문 (19C~현재까지)으로, 유럽 철도와 석유산업 발달을 주도했다. 본래 "독일의 대금업자" 가문이었으나,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에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태어나며, 본격적으로 그 비상을 시작하게 된다. 최초의 국제적 금융 은행을 설립한 후,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2016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으며, 제대로 된 접근 자체도 불가능하지만, "쑹훙빈(화폐전쟁의 저자)"은 재산을 약 50조 $ (약 6경원6만조 원)로 추정했다.

 

1. 로스차일드 가문 (John Rothschild Family) : 로트실트 (독일어)ㆍ로쉴드 (프랑스어)

"로스차일드"라는 뜻

옛 독일어로 "붉은 방패"라는 뜻ㆍ가문이 대대로 살던 저택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붉은 방패는 아직도 "로스차일드가"의 문장 한가운데에 박혀 있다.

 문장의 "5개의 화살"을 쥐고 있는 주먹 : 바로 5명의 아들들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

본래 "독일의 대금업자" 가문이었으나,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에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태어나며, 본격적으로 그 비상을 시작하게 된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금융 제국을 만들고, 5명의 아들을 당대 유럽 경제의 핵심부에 파견하여 사업 범위를 확장해나가기 시작한다. 

1906년, "교황의 재산 관리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로스차일드가"는 "신성 로마 제국ㆍ오스트리아ㆍ영국"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Mayer Amschel Rothschildㆍ1744~1812ㆍ68세ㆍ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

독일의 유태인 은행가ㆍ국제적 금융 재정 가문ㆍ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를 창조

•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1773~1855ㆍ82세): 프랑크푸르트          • 살로몬 마이어 로스차일드 (1774~1855ㆍ81세): 빈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 (1777~183659): 런던           카를 마이어 로스차일드 (1788~185567): 나폴리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 (1792~186876): 파리

유럽의 왕ㆍ귀족들의 신용ㆍ예금을 관리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오직 가문에 속한 사람들만 은행에 대해 깊숙이 관여할 수 있도록 하여, 가문ㆍ은행의 재산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들의 은행은 왕실ㆍ귀족들의 명성ㆍ권위를 바탕으로 굳건하게 그 세를 불려나갔다. 그들의 재산은 주식ㆍ채권ㆍ부채와 같은 형식으로 전 세계를 순환하였고, 폭력ㆍ무력으로부터 안전한 은행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신용을 쌓았다.  나중에는 다른 유대인 가문들도 이와 같은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하며, 부를 쌓기 시작했다. 

19C 중반에 이르러, 유대인 가문들은 세계 경제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왕실ㆍ다른 대부호 가문들과 결혼하며, "가문의 부"를 축적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마치 "사치ㆍ부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가문은 "예술품 수집ㆍ궁전ㆍ자선 사업"으로 유명하였다. 가문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들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갯수도 41개나 되었다. 심지어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마저 1909년에 "로스차일드가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평한 바 있다.

무려 150년이라는 시간 동안 "포도주 사업"을 해왔다. 1853년 "프랑스"의 유명 양조장을 구입하여, "샤토 무통 로쉴드"라는 브랜드를 창출했고,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5째)"는 후에 "샤토 라피트 로쉴드"라는 포도주 상표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전 세계에 "포도주 양조장"을 보유하고 있다. "북아메리카ㆍ남아메리카ㆍ호주ㆍ프랑스" 등 세계 곳곳의 최고급 포도밭들을 소유하여, 그곳에서 나는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데, "로스차일드 가문의 포도주"는 가히 세계 최고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유럽의 산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전 세계에 "철도"를 까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심지어 "수에즈 운하"와 같은 거대 정부 사업에도 관여하여 이익을 남겼다. "브라질 독립"에도 크게 관여하였고, "세실 로즈의 아프리카 식민지 사업"에도 자금을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1880년대 후반 "아프리카의 광산 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19C에 "로스차일드 가"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올라섰으며, 현재까지도 그 명예를 지켜나가고 있다. 가문의 재산은 시간이 지나며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고, "로스차일드 가"가 관여하는 분야는 수많은 사업들을 망라하며 걸쳐져 있다. 국제 금융ㆍ주식ㆍ광업ㆍ에너지 사업ㆍ비영리 사업까지 장악하며, 그 범위를 꾸준히 확장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엄청난 부 때문에, "로스차일드 가"는 종종 국제 정치ㆍ경제를 장악한 음모론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2. 음모론​ㆍ시오니즘

 음모론​

"로스차일드 가문"의 막대한 부ㆍ권력은 종종 "음모론자들의 입"에 많이 거론되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지난 2C 동안 이 가문이 막강하기 짝이 없는 희대의 권력 구조를 구축하였으며, 전 세계의 정치ㆍ경제를 통제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분쟁ㆍ전쟁들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일으킨 것이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가문에 대한 수많은 소문들은 "반유대주의ㆍ인종차별"과 관련이 깊다.

 시오니즘

​가장 대표적인 "유대인 가문"이고,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다.  1917년, "월터 로스차일드"는 "밸푸어 선언"의 수신인이었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영국 정부"로부터 약속받았다. 또한 가문의 막대한 자금력을 활용, "미국 정부"에 로비와 압력을 넣어, "미국"이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제임스 아먼드 드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엘"에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이스라엘"의 지방법원 건물은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후원하였다.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새 지방법원 건물 건축을 후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려고, "국무총리 피러스"에게 썼던 편지가 국외 대통령 회의실에 전시되어 있다.

3. 부의 축적

① 나폴레옹 전쟁 (1803~1815)

"나폴레옹 전쟁" 때, 상당한 부를 쌓으며, 큰 발전을 이루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신용과 함께,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가 생명이었고, 이를 얻기 위해 유럽 각지에 촘촘한 정보망을 깔아, 심지어 각국의 정부들보다도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마침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산업 스파이를 보내, "프랑크푸르트- 파리- 런던- 빈- 나폴리"로 이어지는 정보망을 구축했다.  또한 당시 "런던"에 파견되어 있었던 "네이선 로스차일드(3째)"는 영국에 엄청난 규모의 금ㆍ정보를 제공하며, 영국 정부의 신뢰를 쌓으며, 정계에 진입을 시도했다.

② 영국의 국채​ : 워털루 전투 (1815.03월)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영국ㆍ프랑스" 군대가 대격돌하였는데, 이 전투에 따라 차후 유럽의 판도가 갈릴 확률이 매우 높았고, 유럽의 이목은 모두 이곳으로 쏠려 있었다.  만약 "영국"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영국"의 명예ㆍ권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질 것이지만, 만약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이긴다면 "영국"이 무너지며, "영국"과 관련된 채권ㆍ 무역 문서ㆍ신용도가 폭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도 이 전투의 행방에 크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 중 1명이었고, 누구보다도 빨리 이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뛰어난 정보 수집망을 바탕으로 정부보다 무려 1일이나 앞선 날에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하지만 그는 이 귀중한 정보를 대중들에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향해 "영국군이 졌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 말을 믿은 금융가의 사람들은 곧 가치가 폭락할 "영국 국채"를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워낙 많은 수의 국채가 한꺼번에 매물로 나왔기 때문에 얼마되지 않아 영국의 국채는 이전의 5% 밖에 안되는 헐값이 되어버렸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헐값에 나온 "영국 국채"를 모두 사들였고, 그 다음날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전보를 전하면서 국채 가격은 엄청나게 치솟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행동으로 인해 "로스차일드 가문"은 무려 20배나 되는 차익을 보았고,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중에 세계적인 금융 제국을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③ 1차 대전 (1914.07~1918.11)

"1차대전" 당시, "영국"에 사는 "로스차일드가"의 후손이 "영국 정부"를 크게 도와 "독일"의 침략을 좌절시키기도 했다. "1차대전"의 패배로 "독일 정부"는 막대한 전후 손해배상금의 부채를 지게 되어, 전쟁의 패인과 관련해, "로스차일드가"에 대한 더욱 큰 분노가 있었다.

④ 2차 대전 (1939.09~1945.09): 히틀러

"2차대전" 당시, 그는 유태인을 대량학살했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하는 것조차 모든 언론에서 금기시되며, 단지 "유태인"이라고만 부를 수 있었다.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의 금융시장을 모두 "로스차일드가"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막대한 부로 세 나라의 정치인, 귀족들을 연회에 초청하거나 제외하는 방식으로 큰 굴욕감을 주어, 귀족들의 존경과 동시에 반감이 상당했다.

⑤ 이스라엘의 독립​ (1917)

"로스차일드"의 고손자인 "베이론 로스차일드"는 고조부로 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부로 "1차대전" 당시 군자금이 부족한 "영국 정부"로부터 "밸푸어 선언(1917)"을 받아내어, "이스라엘"의 독립을 돈을 주고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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