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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인도 : 마하트마 간디 (1869)ㆍ비폭력ㆍ무저항주의

by 당대 제일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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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ㆍ1869~1948ㆍ79세)"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ㆍ(1861~1941ㆍ80세ㆍ철학자)"가 지어준 이름이다.

 

1.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ㆍ1869~1948ㆍ향년 79세)

인도의 정신적ㆍ정치적 지도자ㆍ독립운동가ㆍ정치인ㆍ법률가ㆍ사상가"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에 4번이나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였다. 인도의 화폐인 "루피"의 초상화에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 본 명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            • 사 인 : 암살 (화기에 의한 사망)             학 력 : 도 사밀러스 대학교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변호사 자격 취득             종 교 : 힌두교              부 친 : 카람찬드 간디인도의 작은 소공국인 "포르반다르" 총리 출신의 3째 아들             자 녀 : 1(할리랄 간디별명 : 작은 간디이슬람교로 개종 (간디로부터 탈출))인도 독립운동가

"간디"는 300년 동안, 영국 식민지로 있던 조국 "인도"를 "무저항ㆍ비폭력"으로, 총 1방 쏘지 않고 인구 세계 2위의 나라로 독립시켰다. 인도의 "영국 식민지 기간(1859~1948)" 중, 대부분을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반영 인도 독립운동ㆍ무료 변호ㆍ사티아그라하 등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종교는 부모의 영향으로 힌두교이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노동 운동ㆍ민족 해방 독립 운동"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1915~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던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19년 "반영운동"을 하면 체포영장 발부 등의 적법한 절차 없이 무조건 잡아갈 수 있는 즉, 반영운동을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다시 반기를 들고 "빵을 구하는 데, 돌을 준다."고 항의하면서,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의 불매ㆍ납세 거부ㆍ공직 사퇴" 등 영국에 대해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1947.08.15.일, 인도는 드디어 "영국"에게서 독립을 했으나,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가는 민족분열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종교 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자,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모습은,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보였으며, 결국 1948.01.30.일, "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반 이슬람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 단체인 "라시트리야 세와크 상가"의 "나투람 고드세"에게 총을 맞아 암살당했다.

2. 사상 : 비폭력ㆍ무저항주의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I like Christ but I don't like christian, because they are not like Christ)" 후에 자신의 "비폭력ㆍ무저항주의"는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야기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비폭력이야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자 무기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에서 법대를 졸업하고, 한때 "남아공화국 더반"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다. 영국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노예처럼 학대하고, 임금과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는 만행을 좌시할 수 없어서 노동자들을 위한 변론을 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인들은 거의 기독교 신자들이었지만, 기독교를 빙자해 부를 축적하였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종교적인 양심마저 저버리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3.  간디 (1869 생)네루 (1889 ㆍ20년 차)는 대조적 

표면적으로 "네루"와 "간디"는 대조적이었다. "간디"는 종교적(힌두교)이고 전통적인 태도를 가졌고, "네루"는 비종교적ㆍ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 "인도 정치"에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했다고 오해받고 있는 "간디"는 오히려 "힌두교"를 세속화하려고 노력했던 "사회개혁가"였다. "네루ㆍ간디" 두 사람의 진정한 차이점은 "종교관"이 아니라, 그 "문명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루"가 "점진적 근대화의 이상"을 추구한데 비해, "간디"는 "고대 인도의 영광"을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간디"는 "힌두교"라는 틀 속에서, 틀 밖에 있던 "네루" 못지않게 "개혁주의자"였다. 정통 "힌두교도"의 시각으로는 두 사람 모두 "힌두교"를 보는 눈이 세속적이었으며, 둘 다 "힌두교" 이외의 여러 종교들을 존중했다.

4. 모순된 행동

1990년대 이후, "간디"의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① 성윤리의 모순

"간디" 스스로도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어려움을 고백하기도 했지만, 환갑이 넘어도 끊이지 않는 "몽정"을 속죄하기 위해, 발가벗은 수 명의 아가씨들과 함께 자는 의식을 하기도 했다가, 세찬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밤만 되면, "오한"으로 시달렸던 그는 자신과 친숙하게 지내던 집안의 일부 "처녀"나 "새색시들에게 체온으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알몸으로 "간디"의 몸을 데워 주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심"과 "간디로부터 받는 사랑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침대에 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린 소녀들과 동침한 일에 대해 평소 "오한 증세"도 있었지만, 실상은 "서양의 회춘법"인 "스네미티즘"을 신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증손녀 뻘 되는 친족인 "마누 간디"와도 동침하였는데, 작가 "월리엄 샤일러"는 이를 두고 "여성의 질투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바람둥이"라고 비판하였다.

② 지나치게 엄한 아버지

아들 "할리랄 간디"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도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며, "작은 간디" 라는 이름을 얻으리만큼 노력하였으나,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 모든 것을 지배"하려던 아버지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위대한 남자들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의 저자 "모리시타 겐지"로부터 "아들은 아버지의 위대한 삶을 위한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③ 일구이언

아내인 "카스트루바이"가 "폐"에 염증이 생겨,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때 "영국인 의사"는 항생제를 주사하면 치유가 가능하다고 설득했지만, 그는 "영국인 의사"의 진료를 믿을 수가 없다며, 거절하였다. 아내가 죽고 며칠 뒤, 그는 학질을 앓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장염"에 걸렸을 때에는, "영국인 의사"의 시술을 받기도 하여,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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