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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스웨덴 : 노벨 (1833)ㆍ노벨 상ㆍNobelㆍ다이너마이트

by 당대 제일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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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Alfred Bernhard Nobel1833~189663)"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로 남아 있다. 비상하면서도 고독하고, 비관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현대전에 사용된 강력한 "폭탄"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 이바지한 지적인 업적에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1.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 (Alfred Bernhard Nobelㆍ1833~1896ㆍ향년 63세)

스웨덴 과학자ㆍ유언에 따라 노벨상이 제정"트로글리세린" 연구다이너마이트 (고체 폭탄""을 뜻하는 그리스어) 발명"니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하고, 이를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 1867년에 특허를 얻었다. 1869년부터 "파리 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하여, 1875년 "무연 화약 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발명 및 특허에 의해, 그의 가문은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노벨이 19살 때, 외국 유학 도중 "프랑스"에서 한 여인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후 이 소녀는 죽고 말았다. 이 죽음의 상처로 노벨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1896년 "이탈리아 산레모"의 별장에서 여생을 마쳤다.       • 출 생 : 스웨덴 스톡홀름        사 망 : 이탈리아 산레모        분 야 : 발명화학공학방위산업

그러나 만년에 들어선 "노벨"의 마음은 슬펐다. 자기가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새 문명을 건설해가는 어려운 공사에 이바지되는 것은 기뻤으나, 전쟁에 이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노벨의 평화에 대한 갈구는 아주 컸다. 그래서 여비서가 "평화운동"에 참가해서 일할 때는 많은 돈으로 원조해 주기도 하였다.

① 노벨 박물관ㆍ노벨륨

그의 생애ㆍ노벨상ㆍ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을 다루는 "노벨 박물관"은 "스톡홀름"의 구 시가지에 있다. "주기율표 102번 원소"인 "노벨륨"은 "노벨"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발명품 : 다이너마이트 ("힘"을 뜻하는 그리스어)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혼합한 안정한 "규조토"와 같은 물질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좀 더 안전하고 사용하기 쉽게 변형하였는데, 이 혼합물들을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냈다. 발명 첫 해에는 "잉글랜드의 레드힐 (서리주)"에 특허를 내고, "Nobel's Safety Powder"란 이름으로 이름 짓기도 하였지만, "힘"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다이너마이트"란 이름으로 결정한다. 이후에 "콜로디온"과 유사한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스 혼합물"들을 섞은 혼합물을 만들었고, 후에 투명하고, 젤과 같은 물질이면서, "다이너마이트"보다 더 강력한 "젤리나이트" 또는 "블라스팅(blasting) 젤라틴"이란 이름을 붙은 물질을 1876년 특허를 낸다. 

비슷한 혼합물의 호스트로부터 유래된 것이지만, "질산칼륨(potassium nitrate)"을 추가하고, 다양한 그 외의 물질들을 추가한 점이 다르다. "젤라틴"은 보다 안정적이고, 이동하기 편하고, 구멍을 뚫거나(드릴링)이나, 채광(마이닝)에 좀 더 쓰기 편하게 구멍과 같은 홈에도 넣어 쓸 수 있었다. "채광 역사"의 표준으로 이 물질이 사용되면서, 노벨은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2. 노벨상 (1901~ )

1896.12.10일, 숨을 거두기 전, 유명한 유언장을 남겼다. 자기 재산에서 생기는 "이자"로, 해마다 "5개 부문(물리학ㆍ화학ㆍ생리학 및 의학ㆍ문학ㆍ평화)"에 걸쳐 "공헌이 있는 사람에 상을 주라"는 유언이었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염원해 오던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되었다. 그 기부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 제도"를 설정하였다. 이 상은 "6개 부문(물리학ㆍ화학ㆍ생리학 및 의학ㆍ문학ㆍ경제학ㆍ평화)"로 나누어, 국적 및 성별에 관계없이 그 부문에서 뚜렷한 공로자에게 매년 수여하고 있다.

3. 생 애

"스톡홀름"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주 있는 건축기술자로 알려져 있다. 발명하기에만 열중하는 아버지라, 가정의 살림은 나날이 빈궁에 빠져 들어갔다. 1837년,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기계공장을 세우고, 처음에는 번창하였다. 1851년(18세), 미국에 유학하여 4년간 "기계공학ㆍ화학"을 공부하였다.

"크리미아 전쟁(1853~1856)"에 "러시아"가 패전하는 바람에, 아버지 공장도 파산하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스웨덴으로 돌아가고, "노벨"은 형님 2명과 함께 그냥 "러시아"에 머물러서 연구를 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너마이트" 연구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후에 다시 "노벨"은 "스톡홀름"에 돌아왔다. 이때 "노벨"은 혼자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좋은 공동연구자였다. "스톡홀름"의 공장이 폭발할 때는 "노벨"의 동생 "에밀"이 희생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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