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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 라스푸틴 (1869)ㆍ제정 러시아 괴승ㆍ심령술사

by 당대 제일 2023.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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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푸틴 (1869~1916ㆍ47세)"은 제정 러시아 말기의 심령술사ㆍ파계 수도자ㆍ예언자이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 (Nicholas II)황후 "알렉산드라 (Alexandra)황태자 알렉세이 (Alexei)"에게 큰 영향을 끼친 심령술사로, 러시아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1.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1869~1916ㆍ향년 47세)

일부 사람들은 그를 "순례자 (Strannik)"라거나, "장로 (Starets)"로 불렀으며, "심령치료사"로 여겼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미친 "수도승"이라고 하지만, 수도승이었던 적은 없었다. "성자"로 불리며, "황후 알렉산드라 (Alexandra)"의 마음을 사로잡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황후 알렉산드라"는 죽기 전까지 "라스푸틴"이 적어 준 학습서를 읽고 공부하다 죽었다 하니, 그에 대한 맹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종교가 없는 수도승인 그는 "러시아" 체제를 크게 뒤흔들어, 1917년 "로마노프 (Romanov) 왕조"가 몰락하는데 한몫했다는 데는 사실 많은 논란이 있다. 동 시대 사람들은 그를 "성스러운 예언자이자, 치료사"라고 생각했으며, 일부는 그를 "부패한 협잡꾼"으로 매도하였는데, 어느 쪽이 정확한 묘사인지는 오늘날도 알 수있는 방법은 없다.

2. 성기 크기ㆍ여성 편력

그의 주변에는 막강한 권력과 "평상시에 30cm, 발기시에 50cm가 넘었다"는 그의 물건에 매혹당한 여자들이 많이 몰렸다.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자연사 박물관에 그의 성기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여성 관람객의 팔과 라스푸틴 성기의 길이와 굵기가 비슷하다. 그는 하루에도 10여명의 여자를 기절시켰으며, 그와 관계를 가진 여자들은 그의 앞에서는 교만도, 거들먹거림도 모두 버리고, 순한 양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각종 청탁과 부정부패에 결탁하였는데, 청탁을 들어주는 대신 남녀를 불문하고 성관계를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귀부인 유혹하는 방법"은 그의 절륜한 정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술집에서 어제 황후를 어떻게 요리했는지, 황후가 자기의 기술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자신의 성기를 꺼내 놓고 설명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성기를 본 귀 부인들은 그 날로 그에게 넘어갔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한 수도승을 만나고 삶을 바꾸게 된다.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고, 어느 순간엔가 치유의 은사와 예언 능력을 갖게 된다. 그는 귀족들의 모임에 종종 상스러운 욕설과 반말, 무례한 행동을 하다가도 갑자기 성경을 해설하고, 긴 수염에 신비스러운 행동과 예언을 하면서 귀족부인의 혼을 빼 놓게 된다. 이 때부터 라스푸틴의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는 자신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펴서, 많은 귀족부인들은 라스푸틴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의 상스러운 언어는 신선한 조크가 됐고, 종종 맞추는 예언과 치유 능력은 이들의 이성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기에, 귀족부인들은 라스푸틴과 관계를 가진 것을 자랑하고 다닐 정도로 라스푸틴의 인기는 절정에 달하였고, 결국 음탕하고 부패한 라스푸틴이 황실과 국가를 망치고 있다고 판단한 몇몇 귀족들이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3. 최 후

암살 주모자는의 반대 세력으로 황제의 조카인 "이리나 공주"의 남편으로 당시 러시아 최대의 유산 상속자였던 "펠릭스 유스포프 공작", "검은 100인조"의 창설자인 "푸리쉬케비치ㆍ드미트리 파블로비치"였다. 라스푸틴의 전횡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를 처치하기로 모의하고, 궐석재판을 집행하여 라스푸틴에게 사형을 언도한 후, 라스푸틴을 잔치로 초대했다. 

그들은 평소 라스푸틴이 아리따운 "이리나 공주"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것을 이용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1916.12월 말, 그들은 공주를 딴 곳으로 빼돌리고, 공주의 초대장으로 라스푸틴을 "유스포프 공작"의 저택으로 불러냈다. 1층의 "암살실"은 호화롭게 꾸몄고, 식탁 위에는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와 독이 든 포도주를 올려놓았다. 포도주와 빵에는 일반인 치사량의 10배가 넘은 량을 주입해 두었다.

"유스포프 공작"이 그를 친히 모셔왔다. "유스포프 공작"은 "이리나 공주"가 2층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데, 곧 내려올 거라면서 그에게 계속해서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와 독이 든 포도주를 권했다. 라스푸틴은 3잔의 포도주와 빵을 먹고는 포도주를 더 달라고 했습니다. 독이 퍼진 라스푸틴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타를 잘 치는 "유스포프 공작"에게 집시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겁에 질린 암살자"는 기타를 치고, "시체"는 술 마시며 노래 부르는 기이한 광경이 몇 시간이나 계속됐다. 라스푸틴은 독약(청산가리)을 먹었음에도 기타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그의 기행은 2시간 반 정도 계속되었다. (보통 사람은 청산가리를 먹고 5초 이내에 죽는다.)

견디다 못한 겁에 질린 황족 "유스포프 공작"은 마침내 권총을 꺼내 라스푸틴에게 발사했다. 라스푸틴이 고꾸라지고, 2층에 있던 공모자들이 뛰어내려 왔다. 그때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서서 유스포프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견장을 북 뜯어내고는 비틀비틀 옆문 쪽으로 걸어갔고, "푸리쉬케비치"가 연신 몇 발을 쏘아 라스푸틴을 쓰러뜨렸다. 이 때 라스푸틴의 몸에는 실탄이 4발이나 박혔다. 공모자들은 밧줄로 시체의 양손을 묶은 후, 양탄자에 싸서 얼어붙은 "네바 강"에 얼음을 깨고 던져 버렸다. 3일 후 하류에서 라스푸틴의 시체가 발견됐는데, 한 여인이 그의 성기를 잘라냈다.

손을 묶은 밧줄은 풀려 있었고, 폐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황비 일행이 라스푸틴의 상태를 보니, 그는 독살도 총살도 아닌 익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실탄을 맞고, 강철 지팡이에 머리를 맞을 때도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라스푸틴의 영구를 "네바 강"에서 건져 올릴 당시, "네바 강" 표면의 얼어붙은 얼음에서 라스푸틴의 손톱자국이 발견되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어느 정도 사태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던 라스푸틴은 "차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예언하였다. "나는 내년 1월 1일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귀족들에게 살해된다면, 그들의 손은 나의 피로 젖을 것이며, 25년 동안 그 피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나의 죽음을 가져온 자가 폐하와 친척 관계인 사람이라면, 폐하의 자녀와 친척 어느 누구도 2년 후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어쨌든 라스푸틴은 죽었고, 살인자들은 동정적인 여론에 힘입어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라스푸틴을 제거해 황실을 구하려는 암살자들의 기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니콜라이 2세"는 이제 가족들과 함께 "차르스코예 셀로" 별궁에 묻혀, 혁명의 전조를 외면했다. 라스푸틴의 예언대로 몇 달 후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도하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는 붕괴되었으며, "로마노프" 왕조도 단절되었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연일 파업과 시위가 계속됐다.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이 암살된 지 2달 남짓 후 제위에서 쫓겨났고,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온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4. 생 애

시베리아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살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말을 훔치다가 마을에서 쫓겨난 후, 수도원을 전전하는 "돌중"이 됐다. 그의 종파는 최면술을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신흥종교였다. 1904년(34세) 당시 제정 러시아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났고, 점잔을 빼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많은 신도를 얻었고, 마침내 "알렉산드라 황후" 까지도 사로잡았다. 그가 황후의 신임을 얻게 된 것은 그가 혈우병을 앓고 있던 황태자 "알렉세이"의 증상을 완화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사이에는 뒤늦게 얻은 "알렉세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황후는 "알렉세이"를 끔찍이도 아꼈고, "알렉세이"는 황후의 권력을 유지해주는 버팀목이기도 했다. 어머니 쪽에서 독일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황태자는 많은 유럽 왕실을 괴롭히던 "혈우병"에 걸려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조그만 상처가 종창으로 발전할 때마다 "알렉세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의사들도 "혈우병"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라스푸틴이 최면술을 걸어 "알렉세이"의 병을 치유했다. 라스푸틴의 처방이 어떻게 먹혀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알렉세이"는 그 후 크게 괴로워하는 일이 없었고, 라스푸틴은 황후에게 살아 있는 성자가 됐다.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이제 막강한 권세를 얻었다. 심약한 "니콜라이 2세"는 매사를 대가 센 아내의 뜻에 따랐고, 황후는 매사 라스푸틴에게 자문을 구했다. 라스푸틴은 황후와 황제에게 "우리의 친구"가 됐다.

1910년경 라스푸틴에 관한 얘기가 신문에까지 보도되면서, 그를 질타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라스푸틴은 궁정에서는 매우 정중하게 행동하고 농민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보여주었으나, 밖에만 나오면 "개"였다. 그는 어리숙한 귀부인들에게 "육체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며, 숱한 여성들을 농락했다. 수상 "스톨리핀"은 라스푸틴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려 했으나, 황후에게 밀려 실패하고 얼마 안 되어 암살당했다. 라스푸틴의 권세는 이제 하늘을 찔렀다. 모두들 황후와 라스푸틴에 대해서 뒤에서만 수군거릴 뿐,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라스푸틴은 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라스푸틴을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은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특히 장녀 "올가 로마노바"는 라스푸틴을 죽여 없애야 러시아가 평화로워진다고 하면서, 라스푸틴을 몰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알렉산드라 황후"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올가"가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5. 폭정ㆍ전횡 (1915~1916)

당시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라스푸틴은 이를 이용하여 "니콜라이 2세"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며 폭정을 일삼았다. 1916.12월 말 암살될 때까지, 라스푸틴은 사실상 러시아의 황제나 다름없었다. 특히 1915년 "니콜라이 2세"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직접 군을 지휘하기위해 참전하게 되자, 러시아는 완전히 라스푸틴의 천하가 되었는데, 이때 라스푸틴의 폭정은 전무후무한 수준이었다. 1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는 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엄청난 인원과 물자가 전쟁에 동원되면서 경제는 파탄 났으며, 대중들 사이에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정부와 황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라스푸틴은 러시아의 농민들에게 생계유지조차 어려울 만큼 가혹한 세금을 거둬들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이에 항의하는 농민들에게 총탄을 퍼붓기까지 했다.

당시 황실을 지배한 사람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아니었다. 무능하고 심약했던 "차르" 뒤에는 드세고 편협한 "황후 알렉산드라"가 있었고, 황후 뒤에는 그녀가 신처럼 떠받드는 "요승 라스푸틴"이 있었다. 패전이 계속되던 1915년 여름, 황후와 라스푸틴은 자신들을 견제해온 총사령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들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니콜라이 대공"을 해임하라고 "차르"에게 간언했다. 08.23일, 많은 각료들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차르"는 "니콜라이 대공"을 해임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랐다. 08.25일, 온건 자유주의자들의 "진보 블록"이 차르에게 신임내각의 구성과 온건한 개혁을 요구해왔다. "차르"는 "진보 블록"과의 협조를 진언하는 몇몇 각료의 말을 무시하고, 이 요구를 거절했다. 자유주의자들과 협조할 수 있는 기회도 팽개쳐버리고, 충언을 하는 신하들까지도 내쳐버린 차르는 이후 황후와 라스푸틴에게 점점 더 의지해갔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모든 일반 농민들은 물론이며, 심지어는 황제파의 귀족들마저 황제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1915년, 총사령관이 된 "차르"는 수도를 비우고, 전선으로 출동하면서 러시아는 이제 라스푸틴의 것이 됐다. 라스푸틴은 충실하기 그지없는 여신도인 황후를 등에 업고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차르"의 결정이 필요한 사안은 황후를 시켜, "차르"에게 편지 한 장만 띄우면 그만이었다.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이 라스푸틴과 교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돌아갔고, 며칠이 멀다하고 내각이 해산되고 개각이 이어졌다. 장관들의 목숨과 주요정책의 방향은 이제 라스푸틴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라스푸틴은 또한 꿈에 계시를 받았다며, 황후를 통해 전선의 차르에게 "명령"을 내렸다. 황후는 차르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성자"의 조언을 전했다. "우리의 친구가 식량공급은 걱정 말랍니다. 다 잘될 거라는군요." "우리의 친구가 너무 고집 세게 진격하지 말라고 합니다. 손해가 더 클 거래요." 

수도의 거리에 황후와 라스푸틴의 관계를 조롱하는 벽보가 나붙고, 둘이 동침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두 사람이 독일과 결탁하여, 단독강화를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도 횡행했다(라스푸틴 일파는 실제로 독일과 강화하여 왕조를 유지하고자 공작을 폈다). 마침내 "대 황후"가 전장으로 달려가, "차르"에게 수도 귀환을 청했으나, "차르"는 라스푸틴이 "신께서 보낸 성자"라면서,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1916년 가을, 위기가 깊어지면서 대중들의 시위가 날로 격해지고 병사들의 동요도 뚜렷해졌다. 자본가들 사이에 쿠데타 움직임이 싹트고, 황실과 귀족사회 한구석에서까지 황제를 퇴위시키고, "니콜라이 대공"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일반대중은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도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위기를 느낀 황실 측근들은 라스푸틴을 죽여 황실을 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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