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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러시아 : 레닌 (1870)ㆍ레닌주의ㆍ러시아 혁명ㆍ트로츠키

by 당대 제일 2023.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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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870~1924ㆍ54세)"는 볼셰비키의 지도자ㆍ공산주의자ㆍ노동운동가ㆍ혁명가ㆍ정치경제학자ㆍ정치철학자ㆍ혁명지도자이다.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ㆍ소비에트 연방의 제1대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으며,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 이다. 

 

1.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870~1924ㆍ향년 54세)

• 본 명 :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 가 명 : 니콜라이 레닌 (널리 알려진 이름ㆍ혁명가 시절 사용하던 가명)          출 생 :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          사 망 : 소비에트 연방 고르키          사 인 : 병사 (뇌일혈)          병 명 : 암살총상 휴유증매독폐질환과로혈압(실어증)소련에 적대적이던 주변의 제1세계에서의 암살설(독살설)          시 체 : 보존처리 되어, 붉은 광장에서 극히 제한된 시간에만 전시된다. 매년 04.22일, 레닌의 생일날에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레닌을 기리는 대규모 집회를 하곤 한다.

• 학 력 : 카잔대학교 법학과 제적ㆍ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과          종 교 : 무신론자          :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가 족 : :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 마리아 (유대인)          정 당 : 1898~1912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1912~1924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볼셰비키 당)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자,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로 인정받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국영화ㆍ국유화 및 사상적 단결을 통해 국론통일을 지향했다.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혁명이론에 충실한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국영화, 국유화 및 사상적 단결을 통해 국론통일을 지향했다.

독서를 즐겨하여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토론ㆍ협상의 명수였다고도 한다. "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계몽주의 철학 "카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ㆍ베른슈타인ㆍ헤겔"의 서적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ㆍ적자 생존설"까지 두루 꿰고 있을 만큼 이론과 사상에 정통하였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의 "의회 민주주의론"은 끝내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에 창조적 발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될 만큼 공산주의 이론에 정통한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면도 있어서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이라는 필생의 목표를 달성했다. "이오시프 스탈린ㆍ마오쩌둥ㆍ호치민ㆍ요시프 브로즈 티토ㆍ피델 카스트로ㆍ김일성" 등이 그의 공산주의 국가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

서기장

블라디미르 레닌 (1917~1924)→ 이오시프 스탈린 (1922~1952)→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2~1953)→ 니키타 흐루쇼프 (1953~1964)→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64~1982)→ 유리 안드로포프 (1982~1984)→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1985)→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1991)→블라디미르 이바시코 (1991)→ 폐지

2. 레닌과 스탈린ㆍ트로츠키와의 관계

"스탈린"이나 "레온 트로츠키 (붉은 군대 총지휘자ㆍ스탈린에 의해 축출당한 후 멕시코 망명ㆍ암살당함)가 집권할 경우, 초래될 위기상황에 대해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을 불신하고 "트로츠키"를 신뢰하였는데, "트로츠키"를 신뢰하는 내용의 발언ㆍ편지ㆍ서적 등은 "스탈린" 집권 후, 회수되어 소각되었다. 1921년부터 소련의 국가 원수인 "레닌"이 병석에 누워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병든 "레닌"의 의사를 무시하고 능멸하였다. 

"레닌"은 임종 직전, 자신의 "스탈린"을 후원한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한다.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죽기 전에 "스탈린"을 제명하라고 명령했었다. "레닌"은 죽기 1년 전,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유언"을 썼는데, 이는 "레닌"의 유언은 당 중앙위원회에서만 낭독되었을 뿐, 출판되지는 않았다. "레닌" 사망 직후와 "스탈린" 사망 직후에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한 자료로 널리 선전되었다. 스탈린의 폭력적 정치수단, 지나친 러시아주의, 관료주의적 성향은 스승인 레닌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였다. 레닌은 특히 그의 유명한 유언장에서 "스탈린에게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으나, 1924년에 이르러 이미 거의 모든 내부 정치 조직체는 스탈린의 지배권 하에 들어갔다.

"레닌의 유언" 문서는 레닌이 친필로 직접 작성한 것이라, 스탈린의 당내 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용의주도함 때문에 레닌의 유언을 은폐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절하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가 레닌주의와 어긋난다는 주장을 펼쳐서 트로츠키를 공격했다. 이후 당에서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레닌을 우상화해 그의 후계자인 자신이 정당한 지도자라는 것을 확고히 했다. 1924.01월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그를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준(準)비잔틴식으로 우상화했다.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이 된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축출한 후, 최고 권력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자신의 우상화도 함께 추진했다. 1925년 스탈린은 "차리친 시"를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로 개명하였다. 생전에 레닌은 볼셰비키 노선을 고수하였고, 볼셰비키 노선에 대한 그의 집착이 결국 "스탈린의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되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3. 평 가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ㆍ소수 귀족계급에 의해, 대다수의 민중들이 탄압을 받던 러시아(피의 일요일 참조)에 평화와 평등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공산주의 철학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실화에 있어서 중앙집권적 경제체제에 바탕을 두어, 획일화된 1당 독재체제를 강화했다는 점이 한계였으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처음 실현시켰다는 것과 세계 약소국 식민 국가들과 유럽 각 국가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국가 지도자 입장에서 최초로 약소국의 완전한 해방을 주장했고, 적극적으로 민족해방세력을 지원했다는 것은 20C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과 의의를 갖는다.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였고, 차르와 귀족을 숙청한다는 명분 아래 정치적 반대파ㆍ자본가ㆍ상인 등을 숙청ㆍ학살하였으며, 공산주의국가를 실현함에 있어서 폭력으로 실현하여 폭력혁명과 국민학살의 전범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국민학살ㆍ굴라그 등의 국민에 대한 억압은 스탈린주의로 들어서면서이지, 레닌은 아니었다는 공산주의자들도 많으나, 실제로 "굴라그"의 건설은 그가 살아있었을 적에 건설되는 등, 실제로는 레닌도 자기들이 싫어하던 인민에 대한 억압을 실행한 것이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기존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봉건→ 자본→ 공산의 수순을 밟지 못하고, 봉건에서 바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게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획득했어야 할 국민으로서의 기본권 인식, 공업을 할 수 있는 인프라를 얻지 못해, 후대 서기장 스탈린에게 노동자의 혹사를 강요했다고도 볼 수 있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4. 체카 (Chekaㆍ공안기관ㆍ반혁명 태업 단속 비상위원회)

1922년 체카는 "국가정치부"(GPU)로 이름을 바꾸고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의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산하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스탈린은의 체카(Cheka)를 개조하여 특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 Komitet Gosudarstvennoy Bezopasnosti)를 조직하여, 국가보안위원회(KGB)를 특무기관이자, 친위조직으로 활용했다.

• 설 립 일 : 1917.12.20, 레닌의 명령에 의해 설립          설립목적 : 볼셰비키 정권의 체제수호공안을 책임지는 주된 무력          담 당 : 굴라그 및 강제노동수용소의 감독식량징발공산정부의 정적 및 반체제인사 숙청 및 진압농민 및 노동자의 불만세력 진압붉은 군대 휘하부대의 탈영방지나 반란 진압          병 력 : 1921년 체카의 산하부대 "공화국 국내 수비대"200,000명의 병력 보유

5. 코민테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자국의 전쟁을 지지함에 따라 "제2인터내셔널"이 붕괴되었다. 그러자 레닌은 "전쟁을 혁명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창설을 목표로 활동했다. 1919.03월, 레닌은 30여 국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인 자리에서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코민테른"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원을 위해 결성되어, 코민테른을 통해 당시 약소국 식민지국가들의 무장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제1회 코민테른 대회에서는 실제 창립 선언만으로 그쳤다. 그러나 1년 후의 제2회 코민테른 대회(1920.07월)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무산층)독재"를 선언하고, 비합법 조직의 병행, 군대ㆍ농촌ㆍ노동자 조직ㆍ의회에서의 활동ㆍ식민지 독립ㆍ민주적 집권주의 확립ㆍ각 당의 중앙위원회는 코민테른 대회와 집행 위원회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할 것ㆍ따위의 구체적 가입 조건을 규정하고, "세계 혁명"을 목표로 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코민테른"은 뒷날, 1943년에 스탈린에 의해 해산된다.

6. 1921ㆍ1922년 한국인 공산주의 지도자와의 면담

1921년ㆍ1922년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한 한국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1921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국인 공산주의자 "한형권ㆍ김립" 등을 면담하였는데, 레닌은 그들에게 "조선인들은 공산주의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민족주의 운동부터 한 다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레닌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금지원을 약속했고, 필요한 자금의 액수를 묻자,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40만$라고 말했다. 적은 액수라며, 호쾌하게 웃던 그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200만 루블을 지불했다.

이 돈은 "이동휘(상하이 공산당)"가 보낸 "한형권ㆍ김립"에 의해 30만 루블씩 분할 운송되었는데, 자금의 분배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게는 지불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 "상해파"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간의 자금 갈등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입수되었고, 임시정부의 김구는 이들이 "레닌에게 지원받은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면직ㆍ노종균"을 보내 "김립"을 사살하였다. 자본의 국유화ㆍ국영화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한 국민의 사상적 단결은 "베니토 무솔리니ㆍ이오시프 스탈린ㆍ마오쩌둥ㆍ피델 카스트로"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7. 러시아 혁명시기의 3인 : 케렌스키트로츠키레닌

1917.02월 혁명1917.04월 (레닌의 "4월 테제") → 1917.10월 혁명 (볼셰비키 혁명)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 1881~197089제정러시아 정치가프랑스로 망명

1917.02월 혁명 (3월 혁명ㆍ03.08~16)시위에서 혁명으로→ 케렌스키 임시정부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러시아 민중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당연히 민중들은 민중운동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쟁취하고자 하였는데, 1917.02.23일 "페트로그라드 시위"가 그것이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의 민중들은 밀가루 반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빵을 살 수 없었고, 어린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빵과 우유를 배급받고자 시민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다. 우연히 02.23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는데,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은 이날 빵과 우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그들과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8만 명이나 시위에 가담하였다.

시위는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 대사관" 직원은 시위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광장에는 수백만 명의 군인들이 군중들을 막고 있고, 기병들이 젊은 장교의 지휘아래 군중들을 거칠게 해산시키고 있다. 곧이어 기병들이 물러나자, 2열 횡대의 근위병들이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가를 부르고 "자유를, 시민의 행복을, 조국 러시아의 부흥"을 외치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러시아 민중들의 시위는 전쟁에서 돌아오거나, 민중시위 진압을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참여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푸틸로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니콜라이는 수도방위사령관 하발로프에게 군대를 보내 진압하도록 하였으나, 02. 27일 군대까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결국 03.02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이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제정체제가 붕괴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판단하고,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이렇게 됨으로써,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이때 2월은 러시아 달력에 근거한 것이며, 그레고리력으로 하면 "3월 혁명"이 된다.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 1879~1940ㆍ61세ㆍ외교관ㆍ사상가ㆍ노동운동가

1917.10월 혁명 (1917.11.07)볼셰비키 혁명 (위원장 : 트로츠키)

볼셰비키 혁명가ㆍ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그의 사상을 따로 "트로츠키주의"라고 한다. 소비에트 연방 전 해군 군사인민위원(1918~1925)ㆍ초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붉은 군대의 창립자"이다.  1917.07월, "볼셰비키"에 가입하기 전까지 양 분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에서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당"의 지도자 중 하나로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과 이론적인 차이가 생겨, 권력 투쟁을 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로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민생이 어려워진 원인인 전쟁을 끝내길 바라는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 채,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경제파탄을 겪자,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갔다. 9월로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시내에서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17.11.07일(구력 10.25일)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1,000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이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레닌"이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튼튼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든후,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트로츠키의 세계 혁명이론"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에게 "혁명이론"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인민의 적"으로 몰려 "소비에트 연방"에서 쫓겨나게 되어,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말년에 "멕시코"에서 거주했으나, "스탈린"이 사주한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피켈로 살해당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870~1924ㆍ54세ㆍ볼셰비키의 지도자ㆍ노동운동가

1917.04월, 레닌의 "4월 테제"

1917년 일어난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귀족·부르주아들의 "임시 정부"와 노동자· 병사들의 "소비에트"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망명지 "스위스"로부터, "독일제국"이 제공한 봉인 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혁명의 기운이 타오르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을 함성과 박수로 환영하는 민중들에게 병사들이 가져온 장갑차에 올라가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친애하는 병사와 노동자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노동자, 병사들의 소비에트를 뜻함)을 러시아 혁명의 승리자, 세계 노동자 군대의 전위로 보고 경의합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약탈전쟁은 유럽 전역에 내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세계는 공산주의 혁명의 여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금명간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루어낸 러시아 혁명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공산주의 혁명 만세! "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등 10개 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는데, "4월 테제"는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시 정부 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 정부에 대항했다.

8.  연 보

1891.12 : 사법시험에서 최고 점수로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 1895.12 : "반차르 운동"에 연루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 1년간 감옥생활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고, 슈센스케에서 5년간 유배 생활 1898.08 : 주요 저작이 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 "블라디미르 일린"이란 가명으로 출  1900.12 : 서유럽으로 1차 망명(1900~ 1905)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이며,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Iskraㆍ불꽃)" 창간ㆍ편집자로 활동  1902 :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쓰면서, 레닌이란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  1905 : "피의 일요일" 사건발생으로 2차 망명(1907~1917) 1908 : "유물론과 경험론" 발표- 기회주의자들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비판 1912 : 볼셰비키당을 독립된 당으로 만들고,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작업을 지도.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 대회를 소집ㆍ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 선언

1917.02 :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 붕괴굶주림/ 추위/ 전쟁에 지친 러시아 민중은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노동자와 군인들이 시위대 편에 합류, 니콜라이 2세 황제 추출케렌스키를 내각수반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임시정부가 재편  1917.04 : 레닌은 2차 망명을 마치면서, 준비한 10개항의 "4월 테제"를 발표레닌을 비롯한 32명의 러시아혁명 망명자들은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봉인열차"를 타고 1917.04.03 늦은 밤에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도착레닌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 농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새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 볼셰비키는 이때만 해도 여전히 소수파에 불과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정부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무산층)혁명운동을 선동시작

1917.04 : 레닌은 2차 망명을 마치면서, 준비한 10개항의 "4월 테제"를 발표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파격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서구식 제도를 도입하는 등 급진적으로 개혁 단행당시 민중들은 우선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열망이 무척 컸으나, 6월에 대공세를 펼쳐, 자멸적인 패배와 실패로 곧 한계를 드러내고, 동시에 국내의 경제사정이 파탄으로 치달으면서,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고, 민심은 극도로 동

1917.07 : "볼셰비키의 무력시위"가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진압레닌은 "독일제국의 스파이"로 수배범으로 몰려, 잠시 핀란드로 도피 망명핀란드에서 "국가와 혁명" 집필, 마르크스 이론을 러시아의 현실에 맞추어 이론화"자본주의의 발달이 더딘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인 전위당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

1917.09 : 평화/ 토지/ 빵을 요구하는 볼셰비키가 호응을 얻기 시작, 소비에트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볼셰비키 세력이 다수파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소비에트당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무모한 전략에 완강히 저항하지만, 의장인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적위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  1917.11 : 11.07(러시아력 10.25)10시 볼셰비키 1,000여 명의 적위대의 급습으로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10월 혁명의 성공, 새로운 정부인 인민위원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 → 1918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

1918.03 : 10월 혁명 이후,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살리기 위해, 주위에 반대여론을 물리치고 일제국과 비밀리에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 체결로, 종전내용은 "우크라이나, 발트3, 핀란드 등을 독일제국에게 양도하고, 독일제국의 위협으로부터 시아가 벗어나고 연합국에서 탈퇴하는 것" 당시 러시아 주요 산업지역들이어서, 이 지역들을 넘기는 것은 곧 러시아(소비에트)에게 있어 치명적이었음ㆍ레닌은 밖으로 우환을 없애고자 내부적으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완전한 민주 선거를 통하여 자신이 집권하기를 바랐으나, 민중은 레닌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여 레닌의 볼셰비키는 선거에 참패레닌은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인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독재주의 체제 시작쫓겨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족들에 대한 숙청작업 시작기독교 교회에 대한 탄압, 선교사 추방하였으나, 러시아 정교회는 존속

1918 : 러시아 내전 (적백내전) 발생구체제 출신 장군들귀족들부유층지식인 세력으로 구성된 콜차크 제독이 이끄는 백군과 농민노동자 등으로 구성,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볼셰비키 적군간의 내전 발생 1918 : 암살실패사회혁명당(SR)당원이던 파니 카플란이란 여자가 쏜 총에 턱과 팔을 맞아, 크게 중상을 입게 되고, 총상에 의한 부상 후유증 때문에 이후 제대로 활동조차 하지 못하게 됨  1919.02 : 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1919.02~ 1921.03)  "리가 조약"을 통해 소련은 영토가 줄어들고, 폴란드는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획득 1922.12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설립

9 . 생 애

1870년, 볼가 강 연안의 "심비르스크(현, 울랴놉스크)"에서 6명의 자녀들 가운데 3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교육 수준이 높고 교양이 있었으며, 아버지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는 농노의 아들로 교사이자 장학사를 지냈었고, 어머니 "마리아"는 독일인이자 의사의 딸이었다. 어머니 마리아의 아버지, 즉 레닌의 외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1886.01월,아버지가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고, 소득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생계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학시절 "나로드니키 운동"에 가담했던 맏형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가 제정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 혐의에 연루되어 1887년 처형당하자, 당시 17세였던 그는 형의 죽음에 충격에 빠지게 된다. 평소에 형을 잘 따랐던 그는 형의 죽음을 계기로 이때부터 마르크스주의ㆍ반 차르운동ㆍ혁명주의 세력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르크스의 저작을 연구하고 심취하기 시작한다.

1887년 가을,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이해 12월에 불법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대학교에서 제적되어 쫓겨난다. 당시 레닌은 불법집회의 주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단지 "죽은 레닌의 형이 과거에 알렉산드르 3세 암살계획에 가담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이후 다음해 "카잔"으로 돌아왔으나, 대학교 재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같은 뜻을 가진 혁명세력가들과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연구하고, 어울리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하였고, 이어 정식으로 "마르크스 원전과 자본론"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1889.01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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