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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아르헨 : 에바 페론ㆍ에비타 (1919)ㆍ후안 페론ㆍ페론주의

by 당대 제일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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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페론 (Eva Perónㆍ애칭 : 에비타(Evita)ㆍ1919~1952ㆍ33세)"은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후안 페론 (Juan Domingo Perón1895~19747924살 차)" 2번째 부인으로, "페론 부부"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지닌 부부였지만, 그들의 부부 관계가 원만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남긴 발자취로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커플로 기억된다.

 

1. 에바 페론 (Eva Perónㆍ애칭 : 에비타 (Evita)ㆍ1919~1952ㆍ향년 33세)

"에바 페론"에 대해서는 찬성ㆍ반대 의견이 크게 공존하고 있으며,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추모 열기는 계속되고 있다. 약자를 위한 복지 정책을 내놓아 대중의 칭송을 받았으나,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친 장본인이며, "후안 페론의 독재를 위한 방패 막이었다."는 비판도 많다. "후안 페론"이 "에바"에게 권력을 향한 길을 열어주었다면, "에바"는 노동자ㆍ빈민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여, "후안 페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 본 명 :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 (María Eva Duarte de Perón)ㆍ에바 마리아 이바르구렌 (Eva María Ibarguren)         • 남 편 : 후안 도밍고 페론          결 혼 : 1945, 에바 (26)후안 페론(50)

 사 망

1950년, 차츰 그녀의 개혁에 대한 모순이 드러나는 가운데,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이 차츰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1951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부통령 지명"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여, 10월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11월 대선에서 남편은 재선에 성공했으나, "에바"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다음해 2번째 임기가 시작되기 전에 남편은 그녀를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 올렸다. 그러면서 "에바"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위해, 자신의 병마를 이를 악물고 숨겨왔다. 그러나 그녀의 암은 상태가 더욱 악화돼, 1952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국민의 애도 속에 "국장"이 치러졌고, 이후로도 국민들은 그를 성스러운 존재로 기억했다. "아르헨티나"는 그녀에 대한 평가로, 이후 큰 혼란을 겪게 되며, 노동자ㆍ민중에서는 그를 "성녀"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한 반면, 그의 정적들은 국민들에게서 그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런 가운데 개혁의 모순으로 인하여, 남편은 정치적 궁지에 몰렸으며, 결국 1955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새 정부에서 먼저 한 일은 "페론주의"의 상징인 그녀를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방부처리되어 있던 그녀의 시신을 은닉하여, "이탈리아"로 빼돌렸다. 1971년, 시신은 "스페인"에 망명 중이던 "후안 페론" 측에 인도되었고, 1975년 "후안 페론"의 3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아르헨티나"로 송환하여, "대통령 궁"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다시 "쿠데타"가 일어난 후, "군사정권"은 유해를 제거했으며,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구역의 공동묘지의 "두아르테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사벨 페론 (Isabel Perónㆍ이사벨리타 페론ㆍ1931)

"후안 페론" 대통령의 3번째 부인ㆍ아르헨티나의 무용수 출신 여성 정치인남편의 러닝메이트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부통령"이 되었다. "후안 페론"의 사망으로 "대통령" 직을 승계했으나, 경제파탄ㆍ정치혼란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사다가 1976년 "쿠데타"로 실각했다       본 명 : 마리아 에스텔라 마르티네스 카르타스 데 페론(María Estela Martínez Cartas de Perón)           남 편 :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           결 혼 : 1961년, 이사벨 (30살)ㆍ후안 페론(66살)

 생 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의 농장에서 부유한 농장주인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정부인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후안 두아르테"는 정식 부인이 따로 있었고,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난 "에바" 및 다른 딸들을 법적인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생부에게서 버림받은 "에바"는 모친 및 다른 자매들과 함께, 곧 "후닌"으로 옮겨, 그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들은 "후닌"에서 한동안 방 1칸짜리 아파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나, 생모의 가족의 도움으로 더 큰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에바"는 학창 시절, 학교 연극ㆍ연주회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주목을 받으며, 영화배우가 될 꿈을 키웠다.

"에바"는 15살인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 연예계 진출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모델"로 활동하다가, "연극배우ㆍ영화배우ㆍ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이름을 알려, 1940년 경부터 유명 연예인이 되었고,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후안 페론"과의 만남

1944년, "산후안"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6,000여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육군 대령" 출신으로 당시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은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했으며, 이때 "에바"와 "후안 페론"은 처음 만났다. 1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에바"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으며, 두 사람은 곧 함께 살게 되었으며, 그런 가운데 기금 마련으로, 하층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후안 페론"은 곧 "부통령" 자리에 오르며 군부와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확보했다.

 자선 사업여성 운동

"후안 페론"과 "에바"는 1945년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그 다음해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다. "에바"는 남편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린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1946.06월 정식으로 취임했다. "에바"는 정부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에 오른 적은 없으나, 노동자ㆍ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며, 사실상의 "보건부 장관" 자리에 있었다.

1947년,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으며, 대통령인 남편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스페인"에서는 가난한 아동들에게 구호 활동을 펼쳤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골"을 만나 식량 지원을 약속했다. 한편 "정의당"의 분파인 "여성 페론당"을 결성하여, 대표로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여성 참정권 도입" 등의 여성 운동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노동단체ㆍ기업 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대표를 겸했다. "에바 페론 재단"의 기금은 "학교ㆍ병원ㆍ양로원" 등을 건립하고, 각종 자선사업을 하는 데 쓰여지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로 인하여 "상류층ㆍ군부"와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2. 후안 도밍고 페론 (Juan Domingo Perónㆍ1895~1974ㆍ향년 79세)

아르헨티나의 군인(육군 중장) 출신 정치인(대통령 2회(1946~1955ㆍ1973~1974)ㆍ부통령(1944~1946))1943"군사 쿠데타"에 참여, 군사정부의 내각에 입각, "노동부장관"을 역임이탈리아계 이민자의 후손정치적으로 "페론주의 운동"을 창시했으며,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페론주의 (페로니스모 (Peronismo)ㆍ페로니즘 (Peronism))

"현대 포퓰리즘"의 원조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페론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일은 쉽지 않으며, 이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아르헨티나"의 정치 운동으로, "후안 페론 대통령ㆍ영부인 에바 페론"의 정치 활동이 그 출발점이다. "페론"의 당이었던 "아르헨티나 정의당(Partido Justicialista)"에서 따온 "정의주의( Justicialismo, 후스티시알리스모)"라는 표현도 쓰인다. 일각에서는 "페론"이 "무솔리니"를 동경했던 것을 들어, "페론주의"를 "파시즘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페론주의"는 "프랑스의 드골주의"와 비교되기도 한다. "페론" 본인이 20년 가까이 "스페인"에 망명했던 점, 역시 중요한 점이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후, 다시 권좌에 오른 "페론"은 "좌익"에서부터 "반유대주의 성향의 파시스트 우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그의 정책을 빌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라고 풍자하기도 한다.

 페론주의의 특징

• 강하게 중앙 집중화된 정부와 권위주의적인 성향           • 외세의 영향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자본주의공산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의 경제 발전 추구           민족주의사회 민주주의의 통합

 평가

1943년, "쿠데타"에 참여하여 입각한 점과 재임기간 "언론탄압"을 행한 점은 비판받고 있다. 일명 "포퓰리즘"으로 대표되는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쳤다"고 평가를 한다. "페론주의"에 따라, 이루어진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 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파탄의 실질적 책임은 "후안 페론"에 있지 않고,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와 군사정부가 도입한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무분별하게 외자 유치를 했고, 자신들의 집권에 협력한 다국적 기업을 불러들였다. 어느 정도 실속을 챙긴 해외 자본과 기업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자,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페론" 집권 시기의 산업화와 경제 업적을 재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1949~1976년까지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2%가 증가했다. "페론"은 가장 많은 산업투자를 단행했고, "아르헨티나"가 농업국가에서 공업화로 가는데 이바지 했다. "페론" 집권기간 동안,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60%를 차지했던 극빈층이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 받았는데, 이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 있는 "부의 재분배 현상"이었으며, 이는 60%에 가까운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했다.

 퇴진ㆍ망명

1952년, "에바 페론"을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 연임"에 성공했다. 1952년, 부인 "에바 페론"의 사후에, 급격히 단행하였던 모든 개혁의 파탄이 차차 표면화되고, 이는 야당 인사들과 언론에 의해 집중공세를 받았다. 그는 "가톨릭교회ㆍ군부"와 반목했는데, 1955년 "가톨릭교회" 억압을 계기로 하여, "가톨릭교도ㆍ군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1955.09월에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정권을 잃고 망명했다.

1956년 경, "파나마"로 망명한 "후안 페론"은 이곳에서 "이사벨 마르티네스"를 만났다. "후안 페론"은 "이사벨"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고, 그녀를 자신의 개인 비서로 채용했다. 1960년, "후안 페론"은 망명지를 "스페인"으로 바꿨는데, 그는 "이사벨"과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이듬해인 1961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는 망명 기간, 여러 전투적인 "좌익 조직"을 지원했고, "극좌 페론주의" 조직인 "몬토네로스"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반공주의" 성향을 띠고 있는 "극우ㆍ보수 세력"도 지원했다. 특히 "경찰간부ㆍ군 장교"로 구성된 "반 페론주의" 조직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로페스 레가"는 충성스러운 "페론당원"의 가면을 쓰고, "페론 부부"의 신임을 얻게 됐다.

 2번째 대통령 집권ㆍ사망

1973.03월,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페론"의 개인비서 출신이자, "페론주의 좌익 분파"에 속하는 "엑토르 캄포라"가 승리했다. "후안 페론"은 "이사벨 페론"과 자신의 개인비서인 "호세 로페스 레가"를 "아르헨티나"로 보내면서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1973.06월, "호세 로페스 레가"는 "에세이사 학살"을 일으켜, 좌ㆍ우익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1973.07.13일, "엑토르 캄포라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임하고, "라울 라스티리"가 "대통령" 직을 승계했으며, "라울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을 맡는 동안, "호세 로페스 레가"는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을 설립해, 국가 주도로 "좌익 세력"을 탄압했으며, 이로 인해 "페론"이 재집권할 때 즈음, 좌ㆍ우익간의 갈등과 정치폭력으로 사회가 매우 혼란해졌다. 1973.10.12일, "라울 라스티리" 마저 사임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직위는 공석이 되었다.

"후안 페론"은 아내 "이사벨 페론"을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대선 결과, "후안 페론"이 대통령,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으로 당선됐고, 1973.10.12.일 취임했다. "후안 페론"은 취임 직후, "페론주의 좌익 세력"을 "국가 변란ㆍ폭동을 기도하는 세력"이라고 지칭하면서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좌익 페론주의자와 후안 페론"의 갈등은 "페론주의 청년단(Juventud Peronista)"에 속한 의원 8명이 사임하는 사태로 나타났다. 고령의 "후안 페론"은 건강이 악화되어, "대통령" 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사벨"이 "대통령" 직을 대행해야 했으며, 결국 "후안 페론"은 1974년에 사망하고,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의 자격으로 "대통령"의 직위를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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