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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러시아 : 스탈린 (1879)ㆍ625 한국전쟁 개입ㆍ인간 백정

by 당대 제일 2023.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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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1879~1953ㆍ74세)"는 정치가ㆍ공산주의자ㆍ노동운동가ㆍ소비에트 연방의 군인ㆍ작가ㆍ시인ㆍ언론인이다.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1.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1879~1953ㆍ향년 74세ㆍ160cm 정도)

• 본 명 :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가 명 : 스탈린 (강철의 인간이라는 뜻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          애 칭 : 소소          별 칭 : 만능의 천재빛나는 태양삶의 지주위대한 조직자위대한 지도자위대한 선생이며, 친구집권 이전 (선생님)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 (우리의 아버지)사후 (조지아의 인간 백정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

• 출 생 : 조지아(그루지야ㆍ러시아 제국의 일부)의 고리          사 망 : 소련 모스크바 개인 별장 (개인 관저)          사 인 : 병사          병 명 : 뇌질환(뇌졸증)중풍 망상독살설과 목이 졸려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미확인          학 력 : 트빌리시 신학교 중퇴          종 교 : 러시아 정교회무신론자          적 수 : 레온 트로츠키 (붉은 군대 총지휘자레닌이 신뢰스탈린에 의해 축출당한 후, 멕시코 망명암살당함)

• 처 : 에카테리네 스바니제 (애칭 카토ㆍ1906~1908)ㆍ나데즈다 알릴루예바 (1919~1932) 1번째 부인이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가난 속에 최후를 맞이하면서, 그는 한층 냉혹하게 변한다 2번째 부인은 1932년 혁명 기념만찬에 참석했다가, 만취상태로 공개석상의 여러 사람 앞에서 폭언을 퍼부었고, 모멸감을 느낀 "나데즈다"는 바로 파티장을 뛰쳐나갔고, 그날 밤 자살했다.

• 가 족 : 아들 중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던 "야코프 주가슈빌리"가 독일군에 붙잡혔고,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로 잡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와 포로교환을 추진했으나, 그는 "원수와 대위를 어떻게 교환하느냐"며,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아들 "야코프"는 처형당했다.  한편 "파울루스 원수"는 "원수는 보잘 것 없는 사병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때 독일민족을 위해 사병으로 자원입대)을 위해, 죽을 수는 없다"라며, 조국을 배신했다.

• 정 당 : 1900~1922 (러시아 사회민주당)→ 1922~1953 (소련 공산당)         저 서 : 스탈린 선집레닌주의의 기초레닌주의의 재 문제         경 력 : 1924.01~1953.03 (소련 제2대 국가원수소비에트연방 서기장) 1924.04~1953.03 (소비에트연방 서기장)1941.05~1953.03 (소비에트연방 총리1945년 재선성공)1941.07~ 1947.03 (소비에트 연방 국방부장관) 1945.06~1953.03 (소련군 대원수)         

 서기장

블라디미르 레닌 (1917~1924)→ 이오시프 스탈린 (1922~1952)→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2~1953)→ 니키타 흐루쇼프 (1953~1964)→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64~1982)→ 유리 안드로포프 (1982~1984)→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1985)→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1991)→블라디미르 이바시코 (1991)→ 폐지(1991)→ 폐지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추락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조지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였다.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ㆍ노동 운동가가 되었다. 2008.08월, "러-조지아(그루지야)"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스탈린 고향인 조지아(그루지야)에 진입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의 생가와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1900년, 21세 때부터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지하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존경하고 탐독하던 "레닌"을 만났고, "레닌"의 후원으로 입지를 넓혀 나갔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멘셰비키 파ㆍ볼셰비키 파"로 분당하게 되자, 혁명운동에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이후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02.04월~1903.03월까지, 혁명활동을 하다가, 7번 체포되어 투옥ㆍ추방을 되풀이했다. 1912.04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잡지 "프라우다"를 창간하였다.

1920년대 "레닌"은 "스탈린"이나 "트로츠키 (붉은 군대 총지휘자)"가 집권할 경우, 초래될 위기상황에 대해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경쟁자 이전에 견해가 달랐던 "트로츠키"와 수시로 충돌했는데, "국적과 국경을 초월한 국제 노동자, 무산자 연대를 통해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 그는 "소련 단독으로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한 국가를 공산주의화 시킨다"는 "1국 공산주의론"을 확립했다.(스탈린주의 참조) 1920년대 말, 그는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고, 그의 용의주도함ㆍ치밀함을 간파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망명하였다. 

집권하자마자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가 중 하나였던 소련을 산업화하여,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능가하는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과학 기술의 개발에도 중점을 두어, 과학ㆍ교육ㆍ물리학자 등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후에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발판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전투ㆍ스탈린그라드 전투ㆍ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지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사후에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집권기간 중, 우상화를 추진해 나갔다. 스스로 "만능의 천재ㆍ빛나는 태양ㆍ삶의 지주ㆍ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러시아 정교회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 찬양받았다. 초상화ㆍ동상이 곳곳에 걸리거나 세워졌고, 스탈린 개인에 대한 숭배가 만연했다. 한편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고위 정치인에게 수여하기도 했다. 각지에 세워진 스탈린의 동상ㆍ휘호ㆍ상징물은 "니키타 흐루쇼프ㆍ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재임기간 중 철거되었다.

2. 암살설ㆍ독살설

스탈린 음식에 과다 복용할 경우, 장기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항응혈제 "와파린"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독살설" 외에 침실에서 "목 졸려 죽었다"는 설도 있다.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 내 기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3.03.05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나우모프(러시아 역사학자)ㆍ조나단 브렌트(미국 예일대 소련연구가)"는 공동저서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에서 독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독살용의자로 "라브렌티 베리야 (공산당 정치국원)"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스탈린 사망" 이후, "베리야"는 "내가 그를 해치우고, 모든 사람을 구했다"며, 자랑한 내용을 "니키타 흐루쇼프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흐루쇼프"는 "베리야"가 암살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책은 정치국원 4명이 모두 공모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1953년, 사망 당시 의료진의 보고서 초안에는 그가 숨지기 전, 광범위한 위장 출혈을 보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3개월 뒤 공개된 공식 보고서에는 병명에 관련된 내용이 삭제되었다. 당시 "크렘린"에서 근무하던 경비병 1명도 "베리야"로부터 "병세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3. 신체특징ㆍ성격ㆍ취향

① 신체 특징

키는 발육부진으로 160cm를 약간 넘었고, 얼굴이 곰보이고, 왼쪽 팔이 영구히 불구였다. 1886년(7살)에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천연두를 손과 바늘로 짠 탓에 그의 얼굴은 곰보가 되었다. 후에 소련의 사진들은 스탈린의 천연두 자국을 모두 편집ㆍ삭제하였다. 1891년(12살), 2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후 왼쪽 팔이 영구히 불구가 되었고, 청년기 때는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말년에 뇌질환(뇌졸증)ㆍ 중풍ㆍ망상증세를 보였다.

② 평소 과묵하고 그다지 말주변이 없었다.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고, 무자비한 면모를 보였다. 남녀 어린이의 사진을 유난히 좋아하였고, 딸 "스베틀라나"는 이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아들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딸 "스베틀라나"를 편애하였다.

③ 성격이 치밀하여 꼼꼼하고, 메모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억력이 비상하였다.

업무에 있어서 치밀하고 꼼꼼하여, 많은 인민위원회 위원들과 장관들로부터 수많은 서류를 일일이 직접 보고받았다. 각부 장관들로부터 직접 보고받고 계산ㆍ결재ㆍ업무를 추진했다. 작고 왜소하고 약한 체구에도 과중한 격무를 무난히 소화하였으며, 새벽 3시~4시까지 정무를 보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정무를 주관했다. 오전 10~11시 무렵에 늦게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④ 독서를 좋아하여, 업무가 없는 때는 독서로 소일했다.

"마르크스ㆍ엥겔스ㆍ헤겔" 등의 "유물론ㆍ자본론ㆍ변증법"은 물론 "찰스 다윈ㆍ헉슬리"의 적자 생존론ㆍ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등의 내용을 거의 대부분 이해, 암기하고 있었고, "베른슈타인"을 "개량주의 타협론"이라고 비판하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붉은 군대의 중전차 IS-2호는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 호"라고 지어졌다.

⑤ 암살 우려

자신이 암살당할 것을 우려하여, 개인 별장 (개인 관저)을 찾지 못하도록 깊숙하고 복잡한 곳에 위치한 숲 속에 별장을 짓고, 주택도 암살방지를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형태로 지어 경비원들조차 스탈린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사망 후, 3일이 지난서야 식사담당 파출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고소 공포증이 있던 그는 비행기나 헬리콥터 탑승을 꺼렸다. 추락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염려하여 고층 건물에 오르기도 꺼렸고, 장거리 여행도 주로 열차를 이용했다. 

⑥ 청렴하였는데, 집권기간 동안 사적으로 뇌물을 받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다. 

비교적 청렴한 생활과 종교를 부정하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정교회"에 호의적이었다는 점 역시 그의 정적들로부터 그에 대한 비판을 신중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4. 여성 편력

① 사디스트 (Sadist)ㆍ롤리타 콤플렉스 (Lolita complex)

비정상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사디스트 (sadistㆍ가학성 변태 성욕자ㆍ잔학한 일을 즐기는 사람)"였고, "롤리타 콤플렉스 (Lolita complexㆍ미성년 소녀에 대한 성적인 관심을 의미)" 취향으로 어린이를 좋아했다는 설이 있다. 딸 "스베틀라나"가 남긴 회고에 의하면, 사망 직전 병적으로 소년들ㆍ소녀들의 사진을 수집했다고 한다.

②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 (1899~1970ㆍ71세)"와의 사랑

그러나 "유디나"는 스탈린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유디나"는 "레닌" 이후 정권을 잡은 독재자 "스탈린"의 예술인들에 대한 억압정책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동료 예술인들을 변호하는데 앞장섰다. 반체제 인사들을 옹호하는 등 "유디나"의 이런 태도를 "스탈린"이 가만 두고 있을 리가 없지만, "유디나"에겐 정말 극히 예외적으로 강제수용소에도 보내지 않고,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유는 "유디나"의 연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디나"가 연주하는 "모차르트(피아노 협주곡 23번?) 협주곡"의 방송실황을 듣고 있던 스탈린이 연주에 매우 감동하여, 당장 녹음테이프를 구해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유디나"를 좋아했고, 존경하였기에 그녀에 대해서는 최대한 배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유디나"는 "스탈린"에게 정면도전도 불사했던 몇 안 되는 용감했던 예술가 중의 하나였으며, 이에 국립 음악원 교수직에서도 해직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치고는 지나치게 적은 수의 음반만을 남긴 것으로 보아도 그의 연주와 녹음 활동에 정치적 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는 시각이 있다. "유디나"를 배려한 것에 대해서도 "볼세비키 혁명" 당시부터 있었던 "유디나"의 혁명과정에서의 업적들ㆍ대중적인 인기ㆍ사회적 지위 등을 모두 고려했을 때,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더 큰 반발이 있을 것이란 점을 인식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5. 1950년 6ㆍ25 한국전쟁 개입

1946년 이후, 그는 "김일성ㆍ박헌영"을 수시로 소환하여, 북조선의 지도자 자격을 심사했고, 최종 결론은 "김일성"이었다. 1949.03.05일, 북조선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12월 북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관련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 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01.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0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950.01.30일, 스탈린은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1950.0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ㆍ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조선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하였다. 다만,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공ㆍ북조선"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 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05.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 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06.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김일성은 장문의 애도문을 소련에 보냈다. 김일성은 "미국이 남한에서 손을 떼고 일본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이 진심으로 전쟁을 시작하자,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일성은 드디어 전쟁 종결과 평화 달성의 주도권을 잡을 시기가 왔다며 좋아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종결하자고 하였으나, 김일성이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자, 지원을 감소시켰다. 또한 김일성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고 확신하여, 경계하게 된다. 1953.03.19일, 스탈린은 소련 각료회의에서 한국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은 소련ㆍ중공ㆍ북조선의 이익에 배치된다며, 이른 시일 내에 정전협상을 마무리 지을 것을 결정했다.

6. 아시아 민족 강제이주

소련은 일본의 국력이 강해지자, 일본민족과 비슷해 보이는 "황인종"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의 도움으로 "만주국"이 독립하자, 본래 만주 민족의 땅인 "연해주"에 대한 영토반환 분쟁을 대비해 1937년부터 "시베리아ㆍ연해주" 등에 살고 있던 모든 황인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강제이주로 수많은 동양인들이 희생되었으나, 덕분에 소련은 "시베리아ㆍ연해주ㆍ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 하여, 중국ㆍ일본ㆍ한국과의 영토분쟁을 피할 수 있었다.

7.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모든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1941년 "독ㆍ소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자신을 포함한 소련 인민들의 대다수가 비공식적으로 믿고 있던 "정교회"를 이용해,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정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리하여 "정교회의 총주교"가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25년 이래 선출되지 않았던 "모스크바 총 주교직"이 스탈린의 제안으로 다시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크리스마스ㆍ부활절과 같은 종교휴일도 부활되었고, 혁명 후 폐쇄되었던 수많은 교회나 수도원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이 때문에 어떤 "러시아 정교회"는 스탈린을 "정교회를 부활시킨 은혜로운 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에 "정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공산주의자였던 스탈린을 "시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파가 반발하고 있다.

8. 평가ㆍ비판

① 긍정적 평가

스탈린의 치하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상업국에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 탈바꿈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소련이 "독ㆍ소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모스크바 사수ㆍ연합국 지위 획득" 역시 그의 치적으로 기록된다. "독ㆍ소 전쟁"에서 초반 패배에 큰 책임이 있긴 하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책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소련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또한 서방 연합국과의 흥정을 통해 중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확인함으로써 전후 미국과 함께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중심의 통제 경제와 중소 수공업을 양성하면서 대량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련의 경제를 살린 인물로 평가된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레닌주의"를 더욱 구체화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리적인 혁명이론으로 전개하였다. 소련은 물론 다른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스탈린적 해석"을 학습하였고, 이를 혁명의 전략전술로 논리로 삼았다. 스탈린 생전에 편찬된 "볼셰비키당사"의 제4장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 문서임과 함께, 이후 북조선 조선로동당정권의 주체사상의 핵심적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베트남 호치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는데, 그는 "세계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고 했다. 한편 무모하게 추진해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강력하게 밀어붙인 기간산업의 국영화로 소련 국내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산업화 정책으로 상업이 주류이던 소련을 산업화했으며, 소련의 산업화를 완성시켜 독일에 반격할 수 있는 전력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현재 러시아에서는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부정적 평가보다 높으며, 그의 고향 "조지아(그루지야)"에서도 국가적ㆍ민족적 영웅으로 칭송된다. "조지아(그루지야)"의 역사 교과서에는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청년 층 중 일부는 스탈린을 "나치"를 물리친 강력한 군주로도 기억된다. 1990년 이후, 러시아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고르바초프ㆍ보리스 옐친" 등은 당초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제재하였으나,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여론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사수한 "전쟁 영웅", 산업화를 통해 소련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 "영웅"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스탈린 이후 민주주의 정부는 국민들에게 만족감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가 계속되고, 국민 영웅으로 여겨질 정도까지 불만을 가중시켜온 셈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러시아인들의 스탈린에 대한 존경심은 "러-조지아 전쟁"에서도 증명됐다.

② 부정적 평가

집권 과정, 집권 이후에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독재자 또는 살인마라는 비판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공범이라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의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지적했다. 생전에도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 그 관료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소련을 관료국가로 만들었다"면서 강도높게 비판받았으며, 사후에는 생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숙청들로 거세게 비판되었다.

9. 의 혹

①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암살 배후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급사하자, 암살 배후로 지목, "얄타회담" 혹은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월)"에서 "루즈벨트"에게 독이 든 차를 건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확증은 없다.

② "레닌트로츠키" 등의 주변에 정보원을 심고 이들로부터 정보를 빼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③ 학살 논란

1940년에 발생한 "폴란드 카틴 숲의 학살" 배후는 스탈린이 지시했지만, 스탈린을 영웅시하는 기류가 확산됨에 따라, 학살에 스탈린은 연관이 없다는 견해가 러시아의 좌파계열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2009.04월, 러시아 우익성향 언론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이 학살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다. "노바야 가제타"는 기밀 해제된 서류 중에서 자료들을 발췌, 04.22일 "최근 기밀 해제된 서류에서 스탈린이 소련 자국민과 외국인 수천 명에 대한 살생부에 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스탈린이 민간인 처형을 직접 지시했다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고, 스탈린의 개인 서명이 담긴 처형허가증을 발견해 기사화했다.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스탈린이 폴란드 장교 수천 명의 학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노바야 가제타"의 보도에 대해, 스탈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러시아 검찰에 고소, 기사 철회와 함께 1,000만 루블 (4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주가슈빌리" 변호인은 이날 법정에서 "스탈린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공정한 지도자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주가슈빌리" 본인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노바야 가제타" 측 변호인은 "스탈린이 수만 명의 사람을 죽인 것은 널리 인정된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스탈린 명예훼손 재판"은 러시아 및 구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법정은 관객들로 가득 찼고, 법정 밖에는 스탈린을 지지하는 진보성향의 사람들 모여들었다. "주가슈빌리"는 "노바야 가제타"의 보도에 대해 "이 문서 자체가 거짓"이라며, 날조 의혹을 제기하였고, "스탈린은 직접적으로 누구에 대해서도 처형을 명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주가슈빌리"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9.10월 모스크바 법원은 "스탈린의 폴란드 장교 학살설"을 보도한 "노바야 가제타"의 무죄판결을 내렸고, "주가슈빌리"는 패소하였다.

10. 생 애

1879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이던 "조지아(그루지야)"에서 구두 제화공ㆍ신기료 장사를 하던 아버지와 재봉사이던 어머니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콜 중독자에 술주정꾼인 아버지는 어린 그를 무자비하게 구타ㆍ폭행하였다. 아버지는 불같은 성격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무능하였다. 구두 장사가 잘 되지 않자, 알콜중독에 걸려 가족들에게 계속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도 아버지에게에게 수시로 폭행당했는데, 어머니가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한 스탈린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1886년 7살에 그는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기억력이 좋고 영민했던 그는 독서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체력이 강했다고 하나, 약체에 발육부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청난 의지력을 가졌던 그는 일찍부터 본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터득했다. 또한 피의 복수를 하는 "캅카스 인"의 전통대로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를 꾀하는 데 있어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을 집념을 키워 나갔다.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했던 그는 주변의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오직 독서만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는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1889년 10살 때, 신앙심 깊고 영리한 스탈린은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대로 교회 소학교에 입학했다.

일찍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1888년 9살 때,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하여, 구두 공장에 찾아가 아들을 되찾아왔다. 어머니의 기대와 노력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교회 학교들은 "조지아 민족들"에게 러시아인이 되는 교육을 강요하였다. 스탈린은 교육 과정과 수업 내용에 대해 강한 반발과 교사들, 제도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1891년 12살 때에 2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후 스탈린은 왼쪽 팔이 영구히 불구가 되었고, 청년기 때는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발육부진으로 키는 160cm를 약간 넘었다. 스탈린은 고리 시내에 있는 교회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외부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그의 러시아어는 약간 불완전하여, 항상 후음성의 "조지아어 악센트"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조지아 어" 만을 사용하였다. 1894년 15살 때,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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