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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미 대통령 ② 1대 : 조지 워싱턴 (1732)ㆍ국부ㆍ1$ 지폐 인물

by 당대 제일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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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초대 대통령 (1789~1797)인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ㆍ1732~1799ㆍ67세)"은 미국의 국부 (Father of His Country)이며,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역사학자들은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1.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ㆍ1732~1799ㆍ향년 67세)

"미국 독립 전쟁(1775~1783)"에서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 국민들은 그를 "국왕"과 같은 군주로 인식하여 서로 거리감을 느꼈으나, 점차 미국의 건국과 혁명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으로 등극했다. 장례식에서 "헨리 리" 그를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속에서도 으뜸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 출 생 : 대영제국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어랜드           • 사 망 : 미국 버지니아주 마운트 버넌            종 교 : 성공회            처 : 마사 워싱턴 (부유한 과부출신)          • 정 당 : 무소속            경 력 : 미 초대 대통령 (1789.04~1797.03)미 육군 중장 (1753~1789) 미국 대원수(추서)부통령 : 존 애덤스(2대 대통령)

1775년, "대륙회의"에서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받을 때까지 "총사령관"으로서 복무하였다. 한편으로 금방이라도 와해 될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하여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후 그는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 "조지 3세(영국 국왕)"은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787년, 그는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하였다. 1789년,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써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해외 문제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택하였다.

1795년, 전쟁을 회피하고자 "영국"과 "제이 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1743~1826ㆍ3대 대통령(1801~1809)"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다. 그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성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ㆍ파벌주의ㆍ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강조하였다.

2. 혈연에 따른 세습이 아닌, 임기가 정해져 있는 "세계 최초의 국가원수"

그의 취임은 세계 역사상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 취임식이야말로 "대통령 중심제"로 대표되는 현대 정치의 진정한 출발이었다. 세계사에서 최초로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가 국가 원수가 된 사건이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ㆍ인도 바이샬리"에서 "민주적 공화정"이 실시된 적이 있지만,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에 한한 것이었다. 참고가 될 만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 그에게 막막했다.

대포ㆍ총 앞에서는 의연했던 장군이 취임 연설을 하면서는 어느 때보다 떨고 있었다. 연설 말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의 부름을 처음 받았을 때,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불빛 앞에서 나는 나의 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불빛은 나에게 어떤 금전적인 보상도 바라지 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나의 개인적 보수는 사절하겠습니다. 업무상 따르는 비용도 공익을 위해 꼭 필요한 실질 경비로 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막 출발 선상에 선 "미국"은 "조지 워싱턴" 같은 리더쉽을 원하고 있었다.그는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독단적이지 않았고, 주위의 의견을 듣고 포용할 줄 아는 겸손하고 신중한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정직하고 도덕적이었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굳센 의지의 소유자였다. 바야흐로 "미국과 조지 워싱턴"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만약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봉건적 왕정"이 오히려 옳았다고 판명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역사의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았다.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그를 선택한 것이 그만큼 현명했음을 말해주는 결과였다.

3. 마지막이 아름다웠던 대통령 : 나 죽거든 사흘이 지나기 전에 묻어주오.

그의 퇴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재선"은 수락했으나, "3선"은 파멸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전혀 욕심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느 선에서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왕이 되어달라"는 국민의 성원이 있었을 때에도 그는 과감하게 욕심을 접었다. 임기가 6개월 남은 1796.09.17일, 그는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고별연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고별 연설"이었지만, 연설로 행해진 것은 아니고 일간신문에 발표되었을 뿐이다.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수 세대에 걸친 선조들과 이 땅에 뜨거운 애정을 느끼면서, 나는 은퇴 후에 누리고자 스스로 다짐했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봅니다."

1797.03.04일, 그는 "존 애덤스 (2대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초대 대통령"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평화로운 정권교체였다. 그것은 후대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퇴임 후에 고향에 돌아갔지만, 1798년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그는 다시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내 몸에 남아 있는 모든 피를 조국에 바치겠다."며 수락했지만,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799.02월, 자필로 긴 유언장을 작성한 그는 12.14일 "죽은 후 사흘이 되기 전에 묻어주오"라고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장에는 "개인 시중을 든 윌리엄을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하고, 그에게 연금 30달러를 줄 것이며, 아내가 죽으면 나머지 노예들도 해방 시켜달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미국 독립"을 일구어낸 "독립운동가"이자, 첫 단추를 잘꿴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긴 업적도 훌륭하지만, 그것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아름다운 뒷마무리가 더욱 돋보인 인물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전기를 쓴 "브래들리 T. 존슨"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인간 워싱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워싱턴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감정이 격했지만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강한 의지력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신ㆍ현명함ㆍ관용ㆍ정의감과 조화를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재성은 없었지만, 그는 신속한 퉁찰력과 정확한 판단, 그리고 지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열성이 있었다."

4. 생 애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고난의 어린시절, 항상 배우는 자세의 노력파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어린 시절의 그는 유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11세 때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이기적이었다.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은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난 1째 부인과 사별한 후, 2번째 부인 "메리 볼"과 혼인하였다. "어거스틴ㆍ메리 볼"은 아들 3명과 딸 1명을 낳았는데, "조지"는 "장남"이었다. 그의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정도에서 그쳤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으면 "영국"으로 유학 갈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조지"는 어린 시절에 병정놀이를 즐겼다고 하는데, 항상 지휘관을 맡았다. 그는 모든 운동을 좋아했고,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중재자 역할을 했다.

당시 "가부장제"는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재산은 이복형인 "로렌스"의 것이었다. "조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좋지 않은 조건이 그에게 오히려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했다. 다행히 좋은 멘토도 있었다. 1번째 멘토는 이복형 "로렌스"였다. "로렌스"와는 14살 차이나 나지만, "조지"는 형을 무척 따랐고, 형도 동생을 잘 이끌어주었다. 형이 "버지니아 주"의 명문가 "페어팩스 집안"에 장가를 가자, "조지"도 자주 그 집안에 드나들게 되었다. 사돈이 되는 "윌리엄 페어팩스 대령"은 "조지"의 새로운 멘토가 되었다. "형ㆍ페어팩스 대령"의 조언에 따라, "조지"는 독학하여 측량사가 되었고, 일자리도 얻었다.

1748년, "조지 윌리엄 (페어팩스 대령 아들)"은 "셀리 게리"와 혼인했는데, 당시 16세의 "조지"는 그만 "셀리"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조지"는 "셀리"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서로 편지도 교환했다. 그것은 아마도 청소년 시절의 턱없는 열정이었을 것이다. "조지"는 사랑이 열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1759년, 부유한 과부 "마사 커티스"와 혼인한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독립군 총사령관에서 대통령 선출까지, 전례없는 역사를 이끌어간 지도자

1752년(20세), "형ㆍ조지 윌리엄 대령"의 주선으로 "영국군"에 입대하여 군인이 되었는데, "조지"가 세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해 7월 "형 로렌스"가 죽었지만, 그때 "조지"는 모든 슬픔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식민지 출신인 "조지는 "영국 정규군"이 될 수 없었다. 좌절한 "조지"는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 전쟁 경험은 훗날 "독립군 총사령관"이 될 자질을 닦은 훌륭한 훈련이었다.

젊은 시절, "조지"의 인생 목표는 간단명료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늘 배우고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군인의 길을 포기한 "조지"는 정치에 도전했다. 1759년,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였다.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지"는 "영국"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1774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조지"는 새로 창설하기로 한 "대륙군의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다.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군대의 실체는 없었다. 각 주마다 병사들을 모집하고 무장해야 했다. "버지니아"에서는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이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지"는 훈련받지 못한 군인들ㆍ무기ㆍ군수물품의 태부족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세계 최강의 "영국군"에 맞서야 했다.

"아메리카의 혁명세력"이 처음부터 "독립"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지"를 비롯한 그들의 상당수는 "식민지의 자치"를 원했다. 그러나 "조지 3세(영국 왕)"가 "대륙회의"의 요구를 전면 무시함에 따라, 더욱 결정적으로는 1776.01월 "상식(토마스 페인의 소책자)"가 발간됨으로써, 독립에 대한 갈망이 불꽃처럼 타오르게 되었다.

1776.07.04일, "조지"는 "대륙회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독립선언서"를 확인하고 난 "조지"는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준 후 말했다. "여러분,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싸우십시오.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전은 하느님이 보호하고 계십니다." 1781.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조지"는 "찰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을 종결시켰다.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된 후, "조지"는 "군 통수권"을 연합회의에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연합회의"는 각 주의 이해관계 때문에, "중앙 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연합회의"는 국가의 운영원칙을 세우기 위해 "제헌의회"를 구성하였다. 각 주의 대표들은 "조지"를 의장으로 뽑았고, "조지"을 의장으로 한 "제헌의회"는 "미합중국의 헌법"을 만들었다. 그 헌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 결과, 1789.02.04일 "워싱턴"이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에이브러햄 링컨ㆍ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더불어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조지"는 새로운 민주 정부 체제 아래서, 전례 없는 역사를 창조하는 막중한 임무를 실로 엄격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수행해나갔다. 먼저 합리적인 행정부를 구성하여, "공명정대한 인사권"을 발휘했다. 그에게 "혈연ㆍ지연ㆍ학연ㆍ종교ㆍ친구 관계" 등은 일절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는 오직 능력에 따라, "재무장관(알렉산더 해밀턴)ㆍ국무장관(토마스 제퍼슨)ㆍ전쟁장관(헨리 녹스)ㆍ법무장관(에드문트 랜돌프)"를 임명했다. 외교적으로는 중립노선을 폄으로써 적을 만들지 않았고, "국립은행"을 창설하고, "위스키" 제조업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단호한 재정 정책으로 국고를 튼튼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 세력과 인권 문제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여성 참정권"은 이미 "제헌의회"에서 무산되었다. 대통령 자신은 "인종차별" 등에 비판적이었지만, 차별을 철폐하는 정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백인 남성 위주"의 인재만을 등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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