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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미 대통령 ③ 16대 : 링컨 (1809)ㆍ남북전쟁 승리ㆍ노예해방

by 당대 제일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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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6대 대통령 (1861.03~1865.04) "링컨 (Abraham Lincolnㆍ1809~1865ㆍ56세)"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해, 연방 (聯邦)을 보존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대통령 (공화당)이다.

 

1. 링컨 (Abraham Lincolnㆍ1809~1865ㆍ향년 56세)

1865.04.14일 밤,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워싱턴 D.C"에 있는 "포드 극장"에서 "남군 출신" 배우 "존 윌크스 부스"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연극 "우리 미국인 사촌"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던 링컨은 곧장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튿날 오전 7:20분경 숨을 거뒀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지 5일 만이었다. 범인인 "존 윌크스 부스"는 남쪽으로 도망가던 중, 04.26일 발견돼 사살됐다.

• 출 생 : 켄터키 호젠빌            사 망 : 워싱턴 DC             : 메리 토드 링컨            별 칭 : Honest Abe (정직한 에이브)The Railsplitter (장작 패는 사람)The Great Emancipator(위대한 해방자)

미국의 여러 영웅들 가운데, 미국인에게나 다른 외국인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매력은 그가 누추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극적인 죽음을 맞은 남다른 인생경력을 가지고 있고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연방의 구원자, "노예 해방자"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있다. 특히 링컨은 "민주주의를 대변한 웅변가"로서 끊임없는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연방이 그 자체로도 구할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국민들에게 중요한 자치(自治)이념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구할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폄으로써,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게티즈버그 연설 (Gettysburg Address)

"링컨"이 "남북 전쟁" 중이던 1863.11.19일, "미 펜실베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했던 연설이다.  이 연설은 "게티즈버그 전투"가 있은 후 4개월 후에 전장에 세워진, 당시 숨졌던 병사를 위한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이루어졌는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연설로 손꼽힌다.  내용은 "미합중국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인간 평등의 원칙과, 남북전쟁이 단순한 결합이 아닌 모든 국민들에게 참 평등을 가져다 줄 "자유의 재탄생"을 위한 투쟁임을 상기시키는 내용이 들어갔다.  단순히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뿐만 아니라, 싸우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연설의 이러한 역사적 위치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연설 내용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게티즈버그 연설"의 필사본은 5개가 알려져 있는데, 각각은 여러 가지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연설의 "전문"은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즉 명예롭게 죽어간 용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했던 대의를 위해 우리도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굳건히 다지리라는 것,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2. 평가ㆍ성격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스탠턴"은 "이제 그의 이름은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링컨을 "순교자"라고 생각했다. 암살은 "성 금요일"에 일어났고, "암흑의 부활절"이었던 그 주 일요일에는 수백 명의 연사가 링컨의 죽음에 대해 연설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암살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님을 보이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죽었듯이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링컨이 죽은 시기와 상황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고 그를 성인의 지위로까지 올리는 역할을 했다.

링컨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화가 되었다. 그의 전설은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작품이나 민간전승ㆍ시ㆍ연극ㆍ소설ㆍ일화 등에서 보여 지며, 전기나 역사책 같은 사실성에 입각한 글들에서도 발견된다. 전설에서의 링컨은 변화무상한 신(神)과 같아서, 거의 모든 숭배자들을 만족시키는 데가 있다. 그는 꾸밈없는 신사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민첩함과 교묘한 솜씨를 갖춘 존재였으며, 권위를 휘두르고 약한 자를 옹호한 동시에 평범한 이웃이며, 친구였다.

인간으로서의 링컨은 신화로서의 링컨과는 평가가 다르다. 살아 있을 때부터, 그의 명성은 커지기 시작해, 죽기 직전에는 그 위대한 자질이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워싱턴 크로니클(Washington Chronicle) 지는 "확실한 판단ㆍ 감정의 냉정함ㆍ목표를 향한 단호함ㆍ최상의 도덕적 원칙ㆍ강렬한 애국심" 등의 면에서 그가 "워싱턴"과 닮았음을 발견했다.  "버펄로 익스프레스 (Buffalo Express) 지"는 링컨이 "뛰어난 중용과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워싱턴이라도 권력을 위한 권력의 행사에 그렇게 무관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링컨의 사상과 그가 한 말의 정수는 세심하게 씌어진 여러 책에서 검토되고 재차 언급되었는데, 그 중심 주제는 "자치문제와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남북전쟁"이 일어난 뒤로, "이상적 자치"에 대해 거듭 언급했으며, 자신의 말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섬터 요새"가 함락된 뒤, 의회에 보낸 최초의 교서에서, 그는 북부와 남부 사이의 문제가 미국의 장래문제를 넘어서 "입헌공화국 또는 민주주의, 다시 말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그 자신의 내부 적으로부터, 영토를 보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고 단언했다.

3. 링컨 어록

•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나에게 밤낮으로 무서운 긴장이 생겼기 때문에, 만일 내가 웃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죽은 지가 오래 되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이 더 좋아졌다는 것을 보는 일이다           • 나는 찬스가 올 것에 대비하여 배우고, 언제나 닥칠 일에 착수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추고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뒤로는 가지 않는다.

4. 링컨의 신앙 10계명 (링컨의 전기 중에서)

•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열심히 예배를 드릴 것이다            나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실천할 것이다            나는 매일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할 것이다            나는 약하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믿을 것이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가 이땅에 실현되도록 기도할 것이다.

5. 생 애

1809.02.12일, "켄터키의 호젠빌"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진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2세 때, 그의 가족은 이웃 마을인 "노브크리크"에 있는 한 농장으로 이사했다. 어렸을 적 기억은 주로 그 집과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1637년 "잉글랜드"에서 "매사추세츠 주"로 이민 온 "직공(織工) 견습공"의 후손이다. "토머스"는 선조들보다 훨씬 가난한 편이었으나, 억센 개척민이었다. 그는 1806.06.12일, "낸시 행크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굽은 어깨와 야윈 가슴에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새러ㆍ에이브러햄ㆍ토머스"가 태어났는데, "토머스"는 어릴 때 죽었다.

1816.12월, 링컨 가족의 "켄터키 농장"이 소송에 걸리게 되자, "토머스"는 가족들을 이끌고 "인디애나 주"의 남서부로 이사  갔다. 링컨 가족은 엉성한 "통나무 구조물"에서 출발해, 하나씩 살림을 늘려갔으며, 집 주위의 땅도 사들였다. 링컨 나이 9세 때인 1818년 가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나, 다행히 2년이 채 안되어,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재혼했다. 그의 2번째 아내 "새러 부시 존스턴 링컨"은 딸 2명과 아들 1명이 딸린 "과부"로, 원기와 애정을 가지고 가정을 꾸려나갔고, "토머스 링컨"의 아이들을 모두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에이브러햄"을 귀여워해, 그는 후일 그녀를 "천사 엄마"라고 불렀다.

새어머니가 링컨에게 책 읽는 습관을 붙여주었는데, 그가 어떻게 해서 배움을 열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부모는 거의 "문맹(文盲)"이었고, 링컨 자신도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후에 이웃들의 말로는 링컨이 책 한 권을 빌리기 위해 수km를 걸어가곤 했다고 하지만, 그 자신은 "어린 시절에 배움을 자극하는 것이 전무했다"고 말했다. 아마 링컨은 어릴 때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여러 번 통독했던 것 같다. 이 가운데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이었을 "성서"에는 처음부터 꽤 친숙했던 것 같다.

1830.03월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로 2번째 이사를 했다. "일리노이"에 도착한 뒤, 농부가 될 마음이 없던 링컨은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댔다. 그는 아버지의 새로운 농장을 경작하는 한편,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법률" 쪽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미 문법ㆍ수학을 독학한 상태였던 그는 "법률 책"을 파고들어, 1836년 "법률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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