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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미 대통령 ⑤ 35대 : J.F 케네디 (1917) ① 최연소 대통령 (44세)

by 당대 제일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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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35대 대통령 (1961.01~1963.11) "J.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Jackㆍ1917~1963ㆍ46세)"는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최연소 대통령 (44세)ㆍ최초의 "아일랜드 계" 대통령ㆍ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 대통령 (민주당)이었다.

 

1. J.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ㆍJack Kennedyㆍ1917~1963ㆍ향년 46세)

재임 중, "쿠바 사태ㆍ베를린 봉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위기를 맞았으며 "핵실험금지조약의 체결ㆍ진보동맹 결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 "댈러스"에서 자동차로 "가두행진"을 벌이던 중, 24세 된 "댈러스" 시민 "리 하비 오즈월드"에게 암살당했다. 

• 출 생 : 매사추세츠 브루클라인           • 사 망 : 텍사스 댈러스           • 처 : 재클린 케네디 (1953~1963ㆍ1929~1994ㆍ향년 65세)           • 자 녀 : 캐럴라인패트릭(백악관 시절에 사망)           • 명 언 : 물건을 잃으면 작게 잃는 것이고, 신용을 잃으면 크게 잃는 것이다. 용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나는 승리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오직 진실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나는 성공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빛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재클린 케네디"와 두 자녀는 "백악관"을 나와, "워싱턴"의 한 지구인 "조지타운의 사저(私邸)"로 이주했다가, 다시 1964년 여름 "뉴욕 시"로 이주했다. 1968.10.20.일, "재클린 케네디"는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그리스의 선박왕)"과 결혼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고교시절 우수학생으로 뽑혀, "백악관"을 방문해, 당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으며, "부인 힐러리 여사"도 "재클린 오나시스"가 생존해 있을 때는 "자녀교육 문제"를 의논할 정도로 친분을 유지했었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1961.01.20일,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케네디"의 미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국민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 (自問)해 보십시오.“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Ich bin ein Berliner :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

1963.06.26일, "케네디 미 대통령"이 "서 베를린 라트하우스 쇠네베르크"에서 한 연설로, "케네디"가 한 연설 중 최고라 여겨진다.  이 연설은 "소련"의 지원 하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동독이 언제 자신들을 침략하는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던 "서 베를린" 시민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발언은 당시 "중앙유럽 공산국가"들을 겨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독ㆍ소련"에 맞서 "서 베를린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어조가 담긴 발언이기도 했다.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

2. 암 살

케네디는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쪽 후보는 "애리조나 주" 상원의원인 "배리 골드워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골드워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규모 "개혁입법"을 밀어붙일 힘이 되는 국민적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계획에 1가지 장애가 되었던 것은 "부통령 존슨"의 고향인 "텍사스 주"의 주지사 "존 B.코널리 (민주당)"와 상원의원 "랠프 야버러 (민주당)" 사이의 불화였다.  2명의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케네디"는 2명과 함께 "텍사스 주"를 순회하기로 결정했다. 1963.11.22일 금요일, "케네디 대통령"과 "재클린 케네디"는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댈러스 시" 중심가를 관통해, 천천히 "자동차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12:30분, 한 저격범이 이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총탄 2발이 대통령의 목과 머리에 치명상을 입혔고, "파클랜드 메모리얼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곧 사망했다. "코널리 주지사"는 중상을 입었지만, 회복되었다. 당일 오후 2:38분,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24세 된 "댈러스" 시민 "리 하비 오즈월드"가 저격범으로 체포되었다. 2일 뒤, "오즈월드"는 "댈러스 경찰서" 지하실에서, 현지 유태인 출신의 "나이트클럽" 경영인 "잭 루비"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국연방 최고법원장"인 "얼 워런"이 주도하는 "대통령 직속 조사위원회"는 "저격범 오즈월드"나 "오즈월드"의 살해범 "잭 루비", 두 사람 모두 "케네디 대통령"을 살해하려는 국내 또는 해외의 음모와 연관되어 있지 않으며, "오즈월드"는 단독범 임을 밝혀냈다. (→ 워런 위원회) "케네디" 암살범 용의자 "오스왈드"는 체포된 이틀 뒤, "유태인" 출신의 "잭 루비"에게 경찰서 지하에서 "권총"으로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사진기자 밥 잭슨"이 살해 장면을 촬영했는데 그 이후 많은 매체에 게재되었다.

사진을 보면, "루비"가 총을 쏘는 순간의 뒷모습이 찍혀져 있다. "오스왈드"는 방어를 하듯이, 왼쪽 팔을 조금 들고 있다. 엷은 색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이 담당 형사였던 "짐 리빌"이다. 이 세 사람의 주요인물 중,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이 바로 "짐 리빌"이다. 그 후 "잭 루비"는 "오스왈드"가 이틀 동안 지낸 방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형사 "짐 리빌"은 "마피아 음모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나는 오스왈드를 직접 심문했지. 놈은 고백했어. 단독으로 대통령을 저격했다고."

또 다른 이유로는, "케네디 암살의 음모는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가 실시하고 있던 범죄소탕 캠페인으로 자신들이 파멸되어 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대통령이 "마피아"의 보스이자, 자신의 여자 친구의 친구인 "샘 지안카나"와의 비밀협정을 파기한 데 대한 복수이다."

3. 대통령 후보 시절뉴 프런티어 (Frontier개척)

1960.01월, 케네디는 "대통령 입후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의 주된 경쟁자는 "미네소타 주"의 "휴버트 H.험프리 상원의원"과 "텍사스 주"의 "린던 B.존슨 상원의원"이었다. 케네디는 "험프리"에게 타격을 가하여, "후보 지명전"에서 탈락하게 했고, "개신교도"가 대다수인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예비선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로마 가톨릭 신자"에 대한 종교적 금기현상에 일격을 가했다. 그는 "휴스턴의 개신교" 목사들 앞에서 행한 TV 연설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지지하는 자신의 소신을 공언함으로써, "가톨릭 문제"를 해결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그는 "존슨"을 자신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하여 "민주당"의 "정ㆍ부통령 후보의 진용"을 강화했다. "대통령후보 지명수락 연설"에서 케네디는 "우리는 뉴 프런티어의 한 끝에 서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이후, "뉴 프런티어"라는 말이 그의 모든 정책에 따라 다니게 되었다. 또 다른 문구인 "케네디 스타일"이라는 말은 "대통령 후보"로서의 그의 정체(正體)를 감싸주었다. 그는 총 유효투표수 6,833만5,642표 중 11만 8,550표 차로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리처드 M.닉슨"을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기록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그는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힘차게 만들어 봅시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는 "실업ㆍ침체된 경제상황ㆍ미사일 갭(미ㆍ소간의 핵 장착미사일의 보유수에 있어서, 소련이 우세함을 가리키는 말)ㆍ아바나의 신생 공산정권 탄생" 등을 개탄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은 두 후보 사이에 벌어진 4차례에 걸친 TV 토론회였다. 8,500만~ 1억 2,000만의 미국인들이 1차례 또는 그 이상 그 TV 토론회를 시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론회는 두 후보 모두 "국정의 문제점"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멋진 용모와 텔레비전 화면상의 좋은 인상으로 인해, 많은 시청자들이 "케네디"가 그 토론회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존 F.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행정부는 1,037일 동안 유지되었다.

4. 대통령 시절ㆍ쿠바 미사일 위기

취임 초기부터, 외교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인상적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인간 공동의 적인 압제ㆍ빈곤ㆍ질병,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이고, 힘든 투쟁의 부담을 함께 져 나가자"고 요청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1번째 "외교정책"은 "대실패"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임기말년, "미국 CIA"는 "쿠바 침공"을 위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쿠바 망명자"들을 조직하여 무장시키고, 훈련시켰다. "미국 합동참모부"는 신임 대통령인 "케네디"에게 "이 병력이 일단 쿠바 해안에 상륙하면, 쿠바의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총궐기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일치된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피그스 만 침공"은 "대실패"로 끝났다.

"쿠바 해안"에 상륙한 "특공대"는 사살되거나, 사로잡혔다. 그는 이 실패에 대하여, "단독 책임"을 졌다. 그는 사석에서 아버지에게 "합동참모부"의 추천사항을 사전검토 없이 그대로 수락하는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의 총리인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1961.06월 "빈"에서 "케네디"와 만나고 나서, 이 젊은 대통령의 그릇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흐루시초프"는 "동ㆍ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건축하라고 지시하고, "동독"과 단독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케네디"는 "방위군ㆍ예비군"에게 동원령을 내렸고, "흐루시초프"는 "단독평화협정" 위협을 취소했다.

1962.10월, "소련제 중단거리 핵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케네디"는 그 "미사일"들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쿠바"를 고립시키라고 명령했고, 실제로 "소련 군함"이 "쿠바"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해상봉쇄 조치를 취했다. 13일 동안, "핵 전쟁"이 임박한 듯한 분위기였다. 그 뒤, "소련"의 총리인 "흐루시초프"가 공격용 무기는 철수될 것이라고 발표했다.(쿠바 미사일 위기)

10개월 뒤, 케네디는 "흐루시초프"와 영국총리 "해럴드 맥밀런"이 참가한 가운데, "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했는데, 이것은 커다란 외교적 개가였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까스로 이겼기 때문에, 그는 "의회접근"에 조심성을 보였는데, 또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회"는 대체로 케네디가 제안한 법안들에 대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회"는 "중남미 국가"와의 "진보 동맹(Alianza)"과 수천 명의 대학생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은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승인했으나, 그가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2개의 법안, 즉 "대규모 소득세 삭감"과 "포괄적인 민권보호 조치"에는 냉담했다. 결국 이 안건은 그의 사후에 통과되었다.

5. 생 애

"존"은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 사이에서 9남매 중 2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들 간에 치열한 육체적ㆍ정신적 경쟁을 장려하는 집안에서 성장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가르침과 미국 "민주당"의 정치이념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았다. 1940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때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영국은 왜 잠자고 있는가(Why England Slept, 1940)는 영국의 군사적 "무방비 상태"를 논한 것으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38년, 6개월간 당시 "주영(駐英) 미국대사"를 지내고 있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비서로 일했다. 1941년 가을, "케네디"는 해군에 입대했고, 2년 뒤 "남태평양"으로 전출되었다. 1945년, 제대했을 때는 큰 형 "조"가 이미 전사한 뒤였다. "조"는 집안의 "장남"으로, 또 아버지의 희망대로 "공직"에 출마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는데, 그의 사망으로 이 역할이 2째 아들인 "존"에게로 옮겨졌다. 사실 "존"은 그 전에는 "학자"나 "언론인"이 될 계획이었다.

"존" 자신도 전쟁 중에 간신히 죽음을 모면했다. "해군"의 "PT형 어뢰정(魚雷艇) 정장(艇長)"이었던 그는 "일본 구축함"의 공격을 받아, 자신의 어뢰정이 "솔로몬 제도"에서 침몰할 때, 중상을 입었다. 적 후방에 고립된 그는 지휘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부하들을 안전하게 살려내어 용감한 군인에게 수여되는 "해군ㆍ해병대 훈장"을 받았고, 자청하여 "현역 지휘관"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10대 이후 그를 계속 괴롭혀오던 "척추 질환"과 "부신피질 부전증(不全症)"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존"을 포함한 "케네디 일가"의 사람들은, "존"이 신병 때문에 정치보다 더 손쉬운 직업을 선택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공직에 출마하여 승리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① 상원ㆍ하원 의원 시절

그는 공직에 출마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번도 선거에서 패배해 본 적이 없었다. 1946년, 첫 기회를 잡아,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신체적으로는 허약했지만,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 제11선거구"의 "민주당 조직"을 이용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족ㆍ대학동창ㆍ동료 해군장교들"의 힘을 빌려, 선거운동을 펼쳐 나갔다.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그는 차점자보다 거의 2배나 많은 표를 얻었다.

11월의 본선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는데, 그때 나이 불과 29세였다. "케네디"는 민생(民生)에 관심을 기울이는 "진보주의자"로서 1947~1953년 "하원의원"을 3번 역임했다. 그는 "더 좋은 근로환경ㆍ더 많은 공공주택ㆍ더 높은 임금ㆍ더 낮은 물가ㆍ더 싼 주택임대료ㆍ더 많은 노인복지 대책"을 지지했다.

"외교 분야"에서는 처음부터 "냉전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지지했으나, "트루먼 행정부"의 "대 아시아 정책"은 크게 비판했다. 그는 "장제스(蔣介石)"에게 압력을 넣어, "마오쩌둥(毛澤東)"과 연합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미국 국무부"의 태도를 비난했다. 1954년, "뉴잉글랜드 지방 출신의 상원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상호무역전(reciprocal- trade powers)"의 연장을 지지했고, "센트로렌스 해로(海路)"의 개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전의 20여 년 동안, "매사추세츠" 출신 상원ㆍ하원 의원 중에서, 그 "해로"의 개방을 지지했던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또한 그는 양심상의 문제로, 여론에 도전한 8명의 위대한 미국 정치 지도자들을 다룬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 1956))"을 저술하여, 1957년 이 책으로 "퓰리처 상"을 받았다.

"상원"에 다시 돌아온 그는 "선거인단 철폐제안"에 반대했고, 노동개혁에 앞장섰으며, 민권보호 법안에 점점 더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상원 외교분과위원"으로서, "아프리카ㆍ아시아"의 신생국가에 폭넓은 원조를 제공하자고 주장했고, "프랑스"에게 "알제리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워싱턴 정가"를 경악시켰다.

이 시기에 그의 정치적 태도는 "좌파적 경향"을 띠었다. 하지만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영향력으로 "민주당원" 사이에서 "존"의 위치는 서서히 높아져 갔고 마침내 그는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라이 E.스티븐슨"을 따르던 추종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스티븐슨"은 2번씩이나 "민주당 대통령후보"에 올랐고, 미국인들에게 "이상주의"를 호소함으로써 "민주당"의 면모를 일신시켜, "케네디"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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