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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미 대통령 ⑤ 35대 : J.F 케네디 ② 재클린 케네디ㆍ재키 (Jackie)

by 당대 제일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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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클린 케네디 (Jacqueline Kennedy)ㆍ재키 (Jackie)ㆍ1929~ 1994ㆍ65세"는 미국 퍼스트레이디 (John.F. 케네디 (미 35대 대통령) 부인)ㆍ세계 최고 갑부 (아리스토텔리스 오나시스)의 아내이며, 미국의 저술가ㆍ출판업자이다.

 

1. 재클린 케네디 (Jacqueline Kennedy)ㆍ재키 케네디 (Jackie)ㆍ1929~1994ㆍ향년 65세

"재클린"은 "현대 커리어 우먼의 아이콘"이자, "패션 리더"이기도 했다. 그녀는 "최고 권력자ㆍ최고 부자"의 아내로 살면서, 또한 능력 있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성취를 일구어 현대 매스컴의 지면ㆍ전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미디어 퀸(Queen)"이었다.

• 남 편 : 존 F.케네디 (1953~1963ㆍ11년ㆍ8살 차)ㆍ아리스토텔리스 오나시스 (1968~1975ㆍ7년ㆍ23살 차)            본 명 : 재클린 리 부비에 (Jacqueline Lee Bouvie)            출 생 : 미국 뉴욕주 사우스햄턴

• 사 망 : 미국 뉴욕ㆍ 1990년대 들어, "비호지킨 림프종(암의 일종)"으로 쓰러져 투병ㆍ1994.05.19일 "모리스 템펠스만 (마지막 연인ㆍMaurice Tempelsmanㆍ1929~ ㆍ벨기에 출신의 유태인 보석상)"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택에서 사망ㆍ"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1번째 남편 "케네디"와 일찍 잃은 자녀들인 "아라벨라ㆍ패트릭" 곁에 안장되었다.

1968.10.17일, "그리스 스코리피오스 섬"에서 "재클린ㆍ오나시스"는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생활은 1975.03월 "오나시스"가 "파리"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8년 동안 이어졌다. 이제는 "막대한 유산을 가지고 조용한 곳에서 칩거하고 지내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비웃듯, 그녀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사실 "오나시스"는 "재클린"에게 별로 남겨주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기자 경험을 되살려, 출판ㆍ언론계에 뛰어든 그녀는 사업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보여줬다.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보수적인 미국 남부 상류층 인사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녀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다시 돌아왔다. 다시 미국인의 "재키(Jackie : 재클린의 애칭)"가 된 것이다. "재클린"은 사업가로서, "사교계의 리더"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94년 숨을 거두었다. 

"재클린"은 "케네디"에 대해, "그는 나에게 인생 이상의 특별한 의미"라고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케네디의 외도", 즉 마릴린 먼로 등 숱한 여배우ㆍ미녀들과의 염문을 모른 척 묻어두며 엄청난 마음고생도 감수했던 사람이다. "재클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그녀의 처세에 대해 "위선"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중 앞에 서야 하는 공인으로서 그녀는 "이미지 메이킹"을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생각했고, 삶 속에서 "남에게 흠 있게, 만만하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오나시스"는 당시 돈으로 5억 $에 이르는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재클린"은 유산으로 800만 $ (약 40억 원)를 받고, "오나시스 집안"과의 재산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고, 주간 "내셔널ㆍ인콰이어리"지가 보도했다. 이 주간지는 당초 "재클린 여사"는 1,800만 $를 요구했으나, "크리스티나(오나시스의 딸)"는 이를 거부하고 협상 끝에 800만 $ (약 40억 원)를 주기로 하고, "재클린 여사ㆍ오나시스가"의 관계를 영원히 청산키로 했다고 한다.

2. J.F 케네디 (John Fitzgerald "Jack" Kennedyㆍ1917~1963ㆍ향년 46세)

제35대 대통령 (민주당)ㆍ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ㆍ최초의 "아일랜드 계" 대통령ㆍ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 대통령

3. 아리스토텔리스 오나시스 (애리스토틀 오나시스ㆍAristotle Onassisㆍ1906~1975ㆍ향년 69세)

그리스 출신의 선박왕ㆍ20C 세계적인 대 사업가ㆍ터키 이즈미르 출생            : 아시나 리바노스 (1946~1960그리스 선박업주의 딸2자녀)재클린 케네디 (1968~1975)            연인 :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1923~197754) 그리스계 미국이탈리아의 오페라 가수프라노뮤지컬 배우피아니스트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유명한 오페라 가수

① "마리아 칼라스"에게 구애

1958년, "파리 오페라제 공연" 중, "오나시스"는 VIP석에서 노래 모습을 지켜보다가 매료되고, 이후 그녀에게 계속 구애해왔다. 남편 "메네기니(이탈리아 부호ㆍ후원자)"와 결혼생활 중, 남편과 참석한 한 연회장에서 "오나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오나시스"는 자신의 유람선에 "칼라스ㆍ메네기니" 부부를 초청해 3주간 항해하였고, "칼라스"는 그에게서 드레스(20벌)ㆍ각종 신발ㆍ장신구 등을 선물받았다. 

"칼라스"는 남편 "메네기니"를 버리고, "오나시스"와 동거하였다. 1960년 초, "오나시스"를 따라 상류사회의 생활과 사교계에 다니며, 작품 활동이 뜸하였다. "칼라스"는 먼저 "메네기니"에게 이혼을 요구, 이혼 후 "오나시스"와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오나시스"는 1963년 "존 F.케네디ㆍ재클린"를 자신의 유람선으로 초대한 뒤, 그해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연인이 되고, "칼라스"는 이 무렵 아기를 유산하였다. 동시에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고, 공연 도중이나 공연 전에 연이은 공연 취소와 비난에 직면했다. 1968년, 남편을 여읜 "재클린 케네디"와 재혼하였다.

② 1906년, "터키 이즈미르" 부근의 부유한 담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2년, "터키 점령"으로 집안은 재산을 다 잃고 "그리스 본국"으로 탈출했다. 그 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다가 "담배 수입업"에 관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사업은 곧 번창하여 몇 년 만에 많은 재산을 모았다. 1931년, "해운업"에 처음 손을 대, 중고 선박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 1938년, "대형 유조선"을 소유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 정부의 비호ㆍ전쟁 특수로 재산을 더욱 불렸다. 전쟁 후, "뉴욕"을 근거지로 여러 "유조선"을 보유하며" 세계적인 선박왕"이 되었고, 부동산 재산도 불렸다. 한편 1957년, "그리스 국영 항공회사"를 인수하여 "올림픽 항공"을 설립했다.

그가 갖고 있던 "올림픽 항공" 지분은 1973년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후 모두 정부에 넘겼다. 말년에 "뉴욕"의 "재클린 케네디"의 아파트ㆍ그리스의 호화 요트를 오가며 생활하였으나, "재클린 케네디"와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1975년, "프랑스 파리" 부근의 "뇌이쉬르센"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4. 생 애 (재키 케네디)

부친 "존 부비에"는 "프랑스인 가톨릭" 계통의 "뉴욕 주식 중매인"이고, 모친 "재닛"은 "아일랜드인 가톨릭" 혈통의 성공한 "승마 선수"였다. 초등학교 교사는 그녀를 귀엽고, 가장 예쁜 소녀이며 매우 영리하고, 예술적이며 굉장하다고 묘사하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발레 레슨"과 12세에 시작한 "프랑스어 레슨"을 받는 등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40년, 11세의 나이로 그녀는 "국립 주니어 승마경연대회"에서 우승하였고, "뉴욕 타임스"는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에서 온 11세의 승마 선수 "재클린"이 진기한 우수성을 보였다고 보도하였다.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1951년 "프랑스어 문학"에서 문학사를 취득하였다. 졸업 후, 그녀는 "워싱턴 타임스 - 헤럴드 신문사"에서 "문의자 카메라 걸"로 일하였다. 그녀의 직업은 다양한 워싱턴의 주민들을 회견하고 사진을 찍고, 그들의 사진과 인터뷰 내용을 편집하여 싣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장 두드러진 인터뷰 중에는 "리처드 닉슨 회견ㆍ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식 취재ㆍ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등이 있다.

1951년, "재클린"은 "워싱턴" 정가의 한 파티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난다.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었다. 지적이고, 잘 생긴데다가,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는 이 상원의원은 이제 불과 34살의 총각으로 미국 미혼여성들의 우상 같은 존재였다. 둘의 눈빛이 마주쳤을 때, 이미 둘은 깊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2년간의 열애 끝에 1953.09.12일, "재클린"은 "존"의 아내가 되었다.

"재클린 케네디"가 된 후, 그녀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남편을 헌신적으로 보좌했다. 단지 "열심히" 챙겨주는 아내로서가 아니라, 남편의 정책에 의견을 제시하는 참모로서, 패션을 코디하고 연설문을 가다듬는 이미지 메이커로 활약했다. 또 그 자신이 열렬한 대중의 호감을 얻음으로써 존의 인기에도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61년, "케네디"는 "미국 제3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불과 44세에 "세계 최고로 힘센 사람"이 된 "케네디"의 백악관 입성은 아내 "재클린"의 내조가 절대적이었다. 한 줄기 햇살 같은 32살의 퍼스트레이디! 신선했다. 역동성ㆍ화사함이 느껴지는 밝은 미소에 센스있는 패션 감각ㆍ갓 서른을 넘긴 풋내기답지 않은 위엄을 갖춘 이 새로운 백악관 안주인을 보는 미국인들은 마치 자기들의 조국의 미래를 "재클린"에게서 투영해 보는 듯이 그녀에게 열광했다. "케네디 부부"는 전 세계 어디서나 단연 스타였다. 어떤 영화배우도, 록 가수도 "재클린"의 인기를 능가하지 못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까지도, 세상은 "케네디ㆍ재클린"의 것이었다. 1963.11.22일, "달라스"에서의 그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① "달라스"의 암살 이후

1963년, "케네디"는 재선 유세를 위해 "텍사스 주 달라스"를 방문했고, 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 속에 카퍼레이드를 시작했다. 천천히 도로를 달리던 차가 어느 커브를 돌아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케네디 대통령"이 고개를 "재클린" 쪽으로 툭 떨어뜨렸다. "오 마이 갓!" 재클린의 외마디 비명 속에 "케네디"의 두개골에서는 이미 뇌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암살이었다. "케네디"는 이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즉사였다.

미국 전역이 슬픔에 잠긴 채, "케네디"는 46세의 젊은 나이로 영면에 들어갔다. "케네디"와의 10년의 결혼생활과 3년간의 "미국 퍼스트레이디" 생활도 막을 내렸다. 대통령 미망인이 됐지만, "재클린"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비교적 조용히 지내고 있었건만 대중의 관심은 언제나 용광로만큼이나 뜨거웠다. 

② "오나시스"와 재혼 충격

대중들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일이 발생한 것은 5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었다. "재클린"의 재혼 계획 발표였다. 그러나 "재클린"의 재혼에 대한 궁금증은 미국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재클린ㆍ오나시스"는 아무래도 "언 밸랜스"처럼 보였다. 더욱이 세계인들의 뇌리에는 아직도 "케네디ㆍ재클린"의 "완벽한 그림"의 잔상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 신이시여.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1968년, 미국인들은 TVㆍ라디오ㆍ신문을 통해 발표된 "재클린"의 재혼 소식에 경악했다.

영원한 미국인들의 사랑,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재클린"이 "오나시스(그리스 선박왕)"과 결혼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왜 하필 그런 새끼랑" "천박하고 짐승 같은 호색한 오나시스와 결혼하겠다니.  바로 옆에서 남편이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봐야했으니 충격을 받아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 전 미국인들 사이에 육두문자가 오갔고, 오나시스를 저주하는 분노의 목소리들이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오나시스"는 "그리스"에서 해양산업으로 큰 돈을 번, 당시 세상에서 5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세계적인 갑부였지만, 이미 60이 넘은 나이에 투박하게 생겼으며,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온갖 여자들을 섭렵한 "난봉꾼"의 이미지로 미국인들에게 비쳐졌다. "그 우아하고 다정다감하며 지적인 우리들의 영부인을 그런 놈에게 뺏길 수는 없어" 미국인들은 이런 심정이었다. 그래서 "오나시스"가 더욱 밉고 추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재클린"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고, "케네디 대통령"과의 사이에 낳은 두 아이를 데리고 당당히 "오나시스 가"로 입성했다. 미국인들의 상실감은 극에 달했다.

③ "오나시스"와 결혼

1968.10.17일, "그리스 스콜피오스 섬(오나시스 소유)"에서 "재클린ㆍ오나시스"는 결혼식을 올렸다."오나시스"는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주급을 받고, 부둣가에서 막일을 하는 잡역부였으나, 특유의 집념ㆍ부지런함ㆍ물불 안 가리는 과감성ㆍ행운에 힘입어, 세계적인 부호로 성장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갑부였다. 그는 "재클린"과의 신혼생활 1년간 무려 2,000만 $을 썼다.

그러나 결혼은 평탄치 않았다. "오나시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재클린"을 하나의 "노획물"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힘센 미국의 젊은 영부인이 내 마누라야"라고 뻐기는 듯했다. "재클린ㆍ오나시스"의 결혼생활은 1975.03월 "오나시스"가 "파리"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8년 동안 이어졌다. 결혼 후, "재클린ㆍ자녀들"은 "스콜피오스 섬과 뉴욕"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재혼한 지 몇 년 안 되어, 불화에 빠지게 되었다. "오나시스"는 "재클린"의 지나친 사치 때문에 화가 났고, "재클린"보다 자신에게 충실했던 "마리아 칼라스"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재클린" 또한 "오나시스"의 바람기로 갈등을 빚게 된다.

둘은 갈등으로 이혼하려 하였으나, 그 와중인 1975년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났다. "오나시스"는 무려 10억 $가 넘는 유산을 남겼지만, 이혼을 준비 중이던 "재클린"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고 전 재산을 딸에게 상속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재클린"을 소송을 걸었다. "오나시스" 사망 후, "재클린"은 "뉴욕"으로 완전히 돌아와, 사회에 진출해 출판 편집자로 일하며, "뉴욕"에서 저술 활동ㆍ자선 사업을 한다. 이후 "모리스 템펠스만(Maurice Tempelsmanㆍ1929~ ㆍ벨기에 출신의 유태인 보석상)"과 사귀었다. 그러나 둘은 결혼하지 않았고, 대신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함께 동거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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