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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미 대통령 ④ 32대 : 루스벨트 (1882)ㆍ뉴딜정책ㆍ4선 대통령

by 당대 제일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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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32대 대통령 (1933.03~1945.04)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ㆍ1882~1945ㆍ63세)"은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 (민주당)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고, "제국주의자"로 "전쟁불사론자"였다. "테디 베어 (Teddy Bear)"라고 불린 제26대 대통령 (1901~1909) "시어도어 루스벨트 (1858~1919ㆍ61세)"과는 다른 사람이다.

 

1.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ㆍ1882~1945ㆍ향년 63세)

• 출 생 : 뉴욕 하이드파크            사 망 : 조지아 웜스프링스 (뇌출혈)            : 엘리너 루스벨트           •  학 력 : 하버드대학교 졸업            별 칭 : F. D. R

국내적으로는 1930년대의 "대공황 타개"를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을 지도함으로써, 이후 미국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오늘날 "미국 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은 그의 통치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 국민의 지지를 유도하고, "행정부" 내에 다양한 정견을 가진 관료들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루스벨트를 능가할 인물은 별로 없을 것이다. 1932년, "루스벨트"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대통령직이란 고도의 윤리성이 요청되는 책무입니다." 취임 연설에서, "위대한 미국은 이미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것이며 번영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 뿐입니다."

공인으로서의 "루스벨트"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사랑을 받았던 인물인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정적들은 "그의 무능력ㆍ얄팍하고 교활한 정략ㆍ독재적인 야심들"을 꼬집었으며, 지지자들은 "경제공황의 구원자ㆍ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한 위대한 지도자"로서 그를 부각시켰다. 정치 분석가들은 "루스벨트 정부"가 때때로 역할분담이 명확하지 않아, 혼선을 빚어내기도 했지만 유례없이 "효율적인 행정능력"을 발휘했다고 설명한다.

2. 생 애

"하이드파크"에서 "제임스 델러노 루스벨트"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청빈하고 기품 있는 평온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가정교사들에게서 교육을 받다가, 14세가 되자 "매사추세츠 주 그라튼 학교"에 입학했으며, 공동체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교육받았다. 1900년, "하버드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교내활동은 교과과정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정통 자본주의의 자유방임적 본질에 얼마만큼의 국가규제를 용인하려는 "수정자본주의적" 경향에 깊은 영향을 받는 한편, 뛰어난 "진보적 대통령"이었던 "친척 시어도어 루스벨트(제26대 대통령(1901~1909))"의 영향을 받아, 정치에 매료되고 있었다. 

1905.03.17.일, 그는 "친척 시어도어 루스벨트(제26대 대통령 (1901~1909))"의 조카로 "뉴욕 시"에서 "인보문제 (隣保問題)"를 담당하고 있던 "엘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다. "엘러너 루스벨트"는 젊은 그에게 비참한 "슬럼가의 환경"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3. 테디(Teddy) 시어도어 루스벨트 (1858~1919ㆍ향년 61세)ㆍ테디 베어 (Bearㆍ곰)

제26대 대통령(1901~1909)ㆍ작가ㆍ수렵가ㆍTheodore Roosevelt.Jrㆍ별칭: 테디(Teddy)ㆍ테오도어/ 테오도르 루스벨트라고도 부른다. "테디베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미시시피 곰 사냥 일화"에서 유래했다. 1902.11월, "미시시피 강가"로 사냥을 나선 루스벨트는 하루 온종일 사냥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수행원들이 대통령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곰을 나무에 묶어 놓은 뒤, 총으로 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그 가여운 곰을 풀어주었고, 이 사실이 "신문 만평"을 통해 미국에 널리 퍼졌다. 이 기사를 본 "러시아" 출신 이민자 "모리스 미참"은 뉴욕에 있는 자신의 잡화점에 아내가 만든 "곰 인형"을 기사와 함께 전시하고, 대통령의 애칭 "테디"를 붙여, "테디의 곰(Teddy's Bear)"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모든 봉제 "곰 인형"에 "테디 베어"라는 명칭이 붙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유명해진 이름에 대해, "루스벨트"나 "모리스 미참" 같은 이들이 재산권을 행사하려 들겠지만, 그런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 사람들은 그저 대통령의 따뜻한 마음씨가 고마웠고 그 마음씨가 표현된듯한 포근한 "곰 인형"이 좋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곰ㆍ코끼리ㆍ사자"를 아낌없이 사냥했던 잔혹한 "프로사냥꾼"으로, "쿠바"를 중심으로 한 "카리브 해"를 지배하려 한 난폭한 "제국주의자"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전쟁불사론자"였던 그의 이중적 철학이 과연 포근한 "곰 인형"만으로 가려질까? "민주적 절차"보다는 "효율성"을 높이 사겠다며, 칼자루를 휘둘러대던 것이 "루스벨트"였다.

4. 뉴딜 경제 정책 (1933~1936)

"뉴딜"의 혁신적 조치들은 "사회보장ㆍ농업부흥계획ㆍ테네시 계곡 개발공사ㆍ증권거래위원회" 등으로 대표된다. 1933년 "테네시 강" 유역을 개발하고, 홍수조절 및 경제적인 수력발전을 목적으로,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가 설립되었으며, 이어서 투자가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증권거래위원회법" 등 제반 법령들이 제정되었다. 1935년에 추가로 제정된 법안들은, "좌익 선동가"들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는데, 특히 "사회보장법"의 내용 속에는 "실업보험ㆍ양로연금보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회는 실업자들을 구제하여 그들의 기술을 활용하고 자신감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공공사업 진흥국(WPA)"을 발족시켰다.

"WPA"는 1935~1941년 사이에 평균 210만 명 정도를 취업시키고, 수십 억 달러를 투자함으로써, 1935년에 이미 유력한 "경제회복 조치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같은 해 제정된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은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한 것으로, 노사분쟁을 심사하는 "전국 노동관계위원회(NLRB)"를 규정하고 있었으며, "공익사업지주회사법(公益事業持株會社法)"은 공익사업회사에 대한 "지주회사"의 지배를 규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한편 새로운 3개 법안도 마련되었는데, 고소득자와 대기업들에 대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일부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국민소득 재분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한편, 초기 "뉴딜 정책"에 해당하는 법률초안들이 의회에 상정되었고, 이에 따라 "연방 긴급 구제국(FERA)"과 "미국 민간자원 보존단(CCC)"이 설치되었다. "FERA"는 주 단위의 직접적인 구제 사업에 연방의 자금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고, "CCC"는 대통령 자신의 야심에 찬 계획으로서, 한때 50만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을 "재식림(再植林)" 및 "홍수 조절사업"에 투입했는데, "뉴딜"이 계속되는 동안 꾸준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뉴딜"의 경제부흥 조치는 농가의 수입을 보장하고, 기업 활동을 촉진시키려는 2가지 목적 아래 이루어졌다.

1933년, "농업조정국(AAA)"은 농산품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농민들에게 할당되는 국민소득 비율을 증대시키기 위한 임시 응급조치로서, 생산이 줄어들고 있는 "7가지 기본 농산물"에 "가공세(加工稅)"를 부과하여, 이로부터 얻어진 수입을 "정부 보조금"의 형태로 지급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농업부흥 조치"는 광범위한 "농촌 계획"으로 이어졌는데, 척박한 지역의 농민들을 보다 비옥한 농경지대로 이주시키고, 대도시의 "실업 인구"를 농촌으로 유도한다는 내용이었다.

1935년, 그는 "이민 정착국"을 설치하여, 가난한 소농들을 후원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농가수익은 점차 늘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에 들어서야 1929년 당시의 충분하지 못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1933년의 "전국 산업 부흥법(NIRA)"은 기업인들의 정국안정 요구와 노동자들의 주간 노동일수 단축 주장에 부응하여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대략 2가지 계획이 설정되었는데, 그 1번째는 33억 달러에 이르는 "정부 지출금"을 "공공사업관리국(PWA)"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신중한 계획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PWA"는 "뉴딜 말기"에 가서야 효과를 내기 시작한다.

2번째 계획은 "산업별 공정 경쟁규약"을 관리할 "전국 부흥국(NRA")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규약은 포괄성을 띠고 있었으나,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들의 협상과정에서, 구체적인 기준들이 정립되었고, "최저임금ㆍ최대노동시간ㆍ공정거래 원칙" 등으로 나타났다. "근로기준의 설정"은 생산을 안정시키고, 가격을 끌어올리며, 노동자와 소비자를 함께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소비자들은 불충분한 보호를 받는데 그쳤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임금ㆍ노동시간ㆍ단체교섭권" 등이 보장되었다. 1933년 여름, 이러한 기준에 따라, 제조업자들이 고가의 상품들을 내놓았을 때, 경제부흥계획은 갑작스런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만, 가을이 되자 가격상승속도가 구매력을 능가함으로써, 모처럼의 호황세도 쇠퇴해졌다."전국 산업 부흥법(NIRA)" "연방 임금시간 법령단체교섭권의 보장주간(州間)교역에 있어서의 유년 노동의 금지" 등의 주요 개혁들을 추진했다.

1933년 가을, 그는 "관리 통화제도"를 실시했다.

"달러화"의 "금 함유량"은 삭감되었고, "은 가격"이 3배가량 뛰어올랐다. "가계소득"은 약간밖에 늘지 못했으나, "달러화"가 평가 절하됨으로써, 미국은 대외무역 측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관리통화제도"는 경제회복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미국 "경제정책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1934년 가을까지의 "뉴딜 정책"이 한정된 효과 이상을 도출해내지 못하자, 주로 기업인들을 포함하는 "보수주의 세력"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통령의 계획이 "위헌성(違憲性)"을 갖고 있으며, 산업에 불확실성을 던져줌으로써, 경제회복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었고, "달러화"의 "평가절하"로 말미암아, "연방채권" 소유자들은 적정한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직 곤경에 처해 있던 "빈민층"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뉴딜"이 충분한 만큼 진행되지는 못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빈민층"은 1934년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원들에게 지지를 보냈지만, 점차 "좌익선동가"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93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그는 "좌파 제3당 후보"의 등장을 경계해야 했으며, 1935.01월 "연두교서"에서 강력한 개혁의지를 천명했고, 이제 제2기에 접어든 "뉴딜"은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대로, 일련의 본격적인 개혁조치들을 입안하게 되었다. "좌익 반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들은 "보수주의자"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우파 보수주의자"들의 비난은 193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농민ㆍ노동자ㆍ빈민들"로 하여금 그를 확고히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중도 온건파"인 "공화당"의 "앨프레드 모스만 랜던"은 이러한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뉴딜 정책"을 방해하기 위하여, "보수주의자"들이 의지할 곳은 이제 "연방 대법원" 뿐이었다.

1936년, "연방 대법원"은 "쉑터 판결"에 의거하여, "농업조정국(AAA)"의 "가공세"를 무효화시켰고, "사회보장법"과 "와그너 법"에 연루된 사건들이 계류 중에 있었다. "뉴딜 조치"들이 "헌법"에 잘 부합되며, "대법원 판사"들의 심리는 구태의연한 오류라고 믿고 있던 그는 "판사 6명의 교체"를 포함하는 "사법부 개편계획"을 제안했다. 격렬한 논쟁이 일었고, 일부 대통령의 측근들은 반대의사를 표시하며 등을 돌렸으나, 1937년 봄에 이르러 계류 중에 있던 2개의 법은 "대법원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행정부"는 거의 무제한적인 "경제 통제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는 정치적인 타격을 크게 입었다. 1937년 여름, "강철ㆍ자동차" 등 중공업 부문 노동조합들이 "와그너 법"의 비호 아래 파업을 일삼고, 폭력사태를 빚어내자, 대통령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그는 "공정기준법(1938)"에서 "임금ㆍ노동시간"을 보장하는 등 무마책을 폈다.

조합원의 수는 1941년까지 950만 명에 육박했고, 대부분의 "중산층 시민"들이 "공화당"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1938년부터는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뉴딜"을 비판하고 나섰다. "예비선거"에서 이들을 패배시키는 데 실패한 그는 "숙청을 주도하려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2번째 임기를 통하여, 이루어진 개혁조치들은 기존의 법안들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들인데, "농토보존ㆍ주택공급ㆍ슬럼 철거ㆍ공공시설물 건축"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회보장ㆍ농업부흥계획ㆍ테네시 계곡 개발공사ㆍ증권거래위원회" 등으로 대표되는 "뉴딜"의 혁신적 조치들은 "연방정부 기능"의 일부로 정착되어갔다.

1939년이 되자, "외교문제"가 "경제문제"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집권 초기부터, "대공황"과 연관된 "외교"에 깊이 개입해왔던 그는 1933년 초여름, "런던 세계경제회의"에서 "국제통화 안정안"을 반대했으나, 이듬해에는 "달러화"를 안정시키고, "프랑스ㆍ영국"이 독재국가들의 횡포로부터, 자국의 화폐를 지킬 수 있도록 협조했다. 또한 "무역신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소련 정부"를 승인하기도 했다. 1번째 취임연설에서 천명된 "선린 정책"은 1935년부터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와의 "무역협정" 형태로 전개되었고, "유럽"에서 전쟁이 임박해옴에 따라, "상호방위조약" 내지 "집단안전보장 체제"로 발전되었다. 초기 "뉴딜" 기간 중에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그는 "전쟁 개입"을 회피하여, "중립법(1935.08)"을 채택했으나, "일본군"이 "중국 북부"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국가들은 침략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다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5. 1939.09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1939.0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의회"를 소집했고, 교전국들에게 "무기판매"를 허용하는 "중립법 개정"에 착수했다. "히틀러"의 공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1940년 초여름 "프랑스"가 함락되자, 미국은 전쟁준비를 시작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을 단축시키기 위하여, "영국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서반구에 있는 "8군데의 군사기지"를 획득하는 조건으로, "영국 해군"에 "구축함 50척"을 제공했다. 국익 차원에서 "영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전쟁개입"을 우려하는 "고립주의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다.

1940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웬들 L.윌키"는 "루스벨트의 외교노선"에 동의하고, 전쟁개입금지를 역설했으나, "고립주의자"들은 그보다 "웬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전보다 표차가 줄기는 했지만, "루스벨트"는 "헌정사상 최초로 3선 대통령"이 되었다. 1941.03월,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대여법"이 마련된 뒤, 유럽으로 향하는 "수송선단"들이 "독일 잠수함"의 무제한 공격을 받는 사례가 늘자, "잠수함"에 대항할 해군의 호위체계가 강화되었다. 1941.08월,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와 만나, "민족자결주의ㆍ경제적 기회균등ㆍ공포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ㆍ공해(公海)의 항행권 보장ㆍ군비축소" 등에 의견 일치를 이루어, "대서양 헌장"을 공표했다.

6. 1941.12.07일, 하와이 진주만 공격

"일본"은 "독일ㆍ이탈리아"와 함께, 이른바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군수품 보급"을 거부한 채, 1941년 내내 협상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41.11월 말경, "일본 함대"와 "수송선단"은 "태평양"으로 발진했고, 교전이 임박했다. "필리핀"을 공격 목표로 추측하고 있던 군사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1941.12.07.일, 일본 해군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튿날 대통령의 요구로 개최된 "의회"는" 4시간 만에 참전을 결의"했고, 12.11일에는 "독일ㆍ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전시상황에서 그는 "보수주의자"들과 화해할 수밖에 없었고, 몇몇 "뉴딜 기관"이 폐쇄되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뉴딜 정책"이 전쟁기간 동안에만 유보될 뿐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진주만 기습" 이후의 관건은 신속히 "대량 생산 체제"로 돌입하는 것이었으나, 이미 1939년부터 다양한 "전시경제"가 시도되었던 결과, 1944년 무렵의 "전시 생산고"는 "추축국" 전체생산의 2배에 달했다.

그는 전쟁기간 동안, "전략ㆍ연합국과의 협상ㆍ전후 평화계획 수립"에 몰두했다. 전쟁 초기에 대두된 쟁점은 주로 "프랑스 상륙작전"에 관해서였다. "영국"은 "작전 개시일"을 계속 늦추었고, 1944.06월에 가서야, "노르망디 침공"이 이루어졌다.  1943.01월, 그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처칠"과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 원칙을 선언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짓는 "1918년 휴전협상" 당시, 협상국들이 겪어야 했던 의견 차이와 "독일의 오해" 등을 우려한 대안으로서, 일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항복의 원칙이 전쟁을 지연시켰다"는 명백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소련 문제"는 "루스벨트"를 곤경에 빠뜨렸다. "소련"은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대여 받으면서도, 좀처럼 작전계획을 제시하지 않았고, "연합군"과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전후의 국제정세가 "소련"과의 관계 여하에 직결되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요시프 스탈린"의 신임을 얻고자 했는데, "테헤란"에서 "스탈린"을 처음 만났을 때는, 장래의 평화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테헤란 회담) 1945.02월,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3거두 (三巨頭)"가 회동할 즈음, 유럽의 전쟁양상은 종결단계에 와 있었으나, 미국은 일본군의 마지막 저항을 제압하는데, 18개월 남짓한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측했다.

※ 얄타 회담 (Yalta Conference): 1945.02월, "루스벨트ㆍ처칠ㆍ스탈린"이 "나치 독일"의 패배와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크림 반도 얄타"에서 만나 회담을 했으며, 1946년 "얄타 협정"이 공표되었다.

전쟁을 단축할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던 "원자폭탄"은 파괴력 면에서 현저히 과소평가되고 있었으므로 그는 "소련군"이 "대일 작전"에 참여해주기를 바랬으며, 그 대가로 "극동"에서 소련의 우위를 인정할 것을 "처칠"과 합의했다. "동유럽 지역"에 관해서는 개전 초기의 결정들이 재확인되었고, "민주정부 수립계획"이 정립되었다. 그러나 "소련" 측의 해석은 완전히 달랐다.

1945.03월 중순, "소련"이 "미국의 정책"을 규탄하고 나섰을 때, 그는 날카로운 외교전문을 발송했다. 그는 효율적인 국제기구, 즉 국제연합(UN)이 전후 평화유지에 기여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는 "헌장"의 채택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1944.01월 이후, 건강이 악화일로에 있었다. 1944년,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후보는 "뉴욕 주지사"인 "토머스 E.듀이"였다.

※ 후임 : 미국 제33대 대통령 : 해리 S.트루먼 (Harry S.Trumanㆍ1884~1972ㆍ88세)

미 제34대 부통령(1945)ㆍ33대 대통령(1945.04~1953.01)ㆍ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 원수ㆍ"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불과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천황 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루스벨트"의 정적들은 그의 용태를 문제 삼을 태세였지만, 이미 3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지낸 "루스벨트"를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앉은 채로 "의회연설"을 마쳤고, 1945.04.12일 휴양 차 머물던 "웜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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