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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물 - 영화ㆍ유명인ㆍ정치인ㆍ대통령

영국 : 가이 포크스 (1570~1606)ㆍ저항의 아이콘

by 당대 제일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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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포크스 (Guy Fawkesㆍ1570~1606ㆍ35세)"는 "가톨릭 탄압"에 저항하며, 영국 "화약 (火藥) 음모사건"의 영국인 실행담당자로, "녀석"을 뜻하는 영어 단어 "Guy"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름인 가이(Guy)는 처음에는 조롱하는 의미로서 "기이한 옷차림의 남자"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일반적인 남자","친구ㆍ동료"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요즘에는 "남성ㆍ여성"을 불문하고 "사람들" 또는 "당신들"의 의미까지 추가되었다.

 

1. 가이 포크스 (Guy Fawkesㆍ1570~1606ㆍ향년 35세)

권력자의 의도와는 달리 그는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고, 당신과 나 어느 누구라도 또 다른 "가이 포크스"가 될 수 있음을 단어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 "화약 음모사건 (Gunpowder Plot)"을 계획한 로마 가톨릭 혁명 단체의 구성원이었다. 영국의 신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구교도가 되었다. "화약 음모사건"은 구교에 적대적인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가톨릭을 탄압하자, 1605.11.05일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 궁) 지하에 화약을 설치하여 암살하려다 밀고자의 고변으로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영국 국교도에서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

1570년, 요크의 스톤게이트(Stonegate)에서 중산층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포크스(Edward Fawkes)는 "요크의 추기경" 밑에서 일한 변호사였고, 할머니는 "요크의 시장"을 지내기도 한 유력한 상인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영국 국교도"였으며, 어머니인 "에디스 블레이크(Edith Blake)"도 결혼하면서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여 그가 태어날 당시 부모 모두는 "영국 국교도"였다. 그렇지만 외가 쪽 친척들은 모두 독실한 "가톨릭"신자들로 사촌 중에는 이름난 "예수회"목사도 있었다.

1579년, 가이가 8살 때 아버지가 죽고, 3년 뒤 어머니가 "가톨릭"신자인 "디오니스 베인브리지(Dionis Baynbrigge)"와 결혼하면서, 친가와 외가 모두 "가톨릭"인 가정환경이 조성되었다. 이후 입학한 "요크의 성 베드로 학교(St. Peter's School)" 역시 지역에서 독실한 가톨릭 교사들이 많기로 이름난 학교였다. 당시 친한 학생들 중에 "존 라이트(John Wrigt)"와 그의 형제인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t)"가 있는데, 둘 모두 후에 "화약음모사건"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린 가이는 급속도로 "신교"에서 멀어져, "가톨릭"으로 동화되어 갔다. 그는 훗날 체포된 뒤, 심문 과정에서 16세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밝혔다.

학교를 졸업하고 21살이 되자, 가이는 아버지가 물려준 저택을 팔았고, 이후 프랑스 등지에서 스페인군과 함께 네덜란드 신교도들과 싸우기 위해 유럽으로 갔다. 당시 그는 "귀도(Guido)"라는 이름을 썼는데, 이는 가이의 이탈리아식 이름이었다. 그의 군 생활은 순조로웠으며 곧 하급 장교가 되었고, 1603년이 되면 대위로 추천 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해 스페인으로 건너가, "잉글랜드"의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스페인 왕실로부터 거절당했다.

 가이 포크스 데이 (Guy Fawkes Day): 매년 11.05일

1605년 영국의 "화약음모사건"이 무산된 것을 기념하는 날ㆍ민주와 보수로 양분되는 특유의 정서를 가진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 전승되는 행사이다. 매년 11.05일이 되면 영국 전역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열린다. 1605.11.05일, 의회 의사당을 폭파시켜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1세"와 대신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려고 했던 "가톨릭 교도"들의 "화약음모사건"이 무마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당시 왕실에서는 왕의 무사함을 기뻐하고자 불꽃놀이를 벌이도록 했으나, 훗날 많은 사람들은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대신 불꽃을 터뜨리는 의미로도 불꽃놀이를 벌였다.

행사는 축제 분위기에서 치러지는데, 국민들은 보통 일주일 전부터 준비한다. 아이들이 낡은 천과 가면으로 만든 "가이 포크스"의 인형을 들고 길거리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인형 앞에 동전을 던져 준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아이들은 11월 5일 불꽃을 사서, "가이 포크스" 인형을 태운다. 이날 영국에서는 행동대장 "가이 포크스의 상(像)"을 괴상한 모습으로 만들어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불태우는 풍습이 있는데, "가이 포크스 나이트"라고도 한다.

2. 수 세기가 지나,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

소설가 "윌리엄 헤리슨 에인스워쓰(William Harrison Ainsworth)"는 1841년 소설 "가이 폭스, 또는 화약음모(Guy Fawkes; or, The Gunpowder Treason)"를 통해 그를 긍정적이고 동정적으로 묘사했다. 1905년 무렵 출판된 아이들 용 소설책인 "옛 런던의 음모자인 "가이 포크스"의 어린 시절(The Boyhood Days of Guy Fawkes; or, The Conspirators of Old London)"에서는 가이가 액션 영웅으로 등장한다. 1982년부터 출간된 "알란 무어(Alan Moore)"가 글을 쓰고, 주로 "데이비드 로이드(David Lloyd)"가 그린 만화책 시리즈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에서는 자신을 브이(V)라고 칭하는 "무정부주의자" 주인공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전체주의" 정부에 맞서는 모습이 그려진다.

무엇보다 "가이 포크스"를 전 세계적인 인물로 탈바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은 동명만화를 각색하여 영상으로 옮긴 2006년 "제임스 맥티그 (James McTeigue)" 감독의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이다. 제3차 세계대전 후인 2040년 가상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 "브이(V)"는 사회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정권에 대항하여 혁명을 꿈꾸는 낭만적이면서도 강인한 인물로 묘사된다. 얼마 후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해커"그룹인 "어노니머스(Anonymous)"의 회원들이 2008년 "사이언톨로지 교"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쓰고 나오면서 새로운 이미지의 "가이 포크스"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어노니머스"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자신들의 로고이자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011년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월가 시위(Occupy Wall Street)"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착용하면서 "저항의 아이콘"으로서의 "가이 포크스"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다. 이후 월가 시위에 호응하여 다른 국가들에서 열린 시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착용했다. 특히 런던에서 열린 시위에서 "위키리크스(Wikileaks)"로 유명한 "줄리안 어샌지(Julian Assange)"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3. 사건의 진행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

"가이 포크스(Guy Fawkes)"가 화약을 터뜨려 없애려고 했던 "제임스 1세"는 원래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1세"와 "단리 경(Lord Darnley) 헨리 스튜어트" 사이에서 태어났고, "메리 1세"가 "제임스 스튜어트 백작"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 실각되자, 1567년 돌이 갓 지난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사촌지간으로 모두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Margaret Tudor)"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식 없이 죽자, 곧바로 그녀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 해 7월 "스튜어트 왕가"에서는 처음으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공동 왕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제임스 1세"로 불렸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지배할 당시, 독실한 "장로파 교회신자"였지만, "잉글랜드"의 왕을 겸임하면서 "영국 국교회"로 개종했다. 수십 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종교는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써, 단지 종교적인 기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에도 자주 활용되는 매우 정치적인 기능을 해왔으며, 이는 "제임스 1세"의 재임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에서 종교와 정치가 본격적으로 결합된 시발점은 "헨리 8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8세"는 "스페인"과의 정치적 관계 때문에, 형의 미망인인 스페인 출신의 "아라곤의 캐서린 (Catherine of Aragon)"과 결혼했다. 그런데 얼마 후,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던 "앤 블린(Anne Boleyn)"을 사랑하게 되자.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교황에게 자신과 캐서린 왕비의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다.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무효를 교황이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영국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교황이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이혼을 불허하자, 1534년 "국왕을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규정하는 "수장령(首長令)"을 반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한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앤 불린 (Anne Boleynㆍ1501(1507)~ 1536ㆍ향년 35세(29세)) : "천일의 앤"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영국 헨리 8세의 2번째 왕비,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ㆍ"천일의 앤"이라는 소설의 주인공ㆍ비밀결혼 후 왕자를 낳지 못하자, 헨리에 의해 간통의 오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헨리 8세"가 죽자, 그의 3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10살의 나이로 즉위했으나,병약하여 16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그를 이은 "레이디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는 정치 싸움의 희생양으로 재위에 오른 지, 겨우 9일 만에 폐위되어 남편과 함께 처형되었다. 다음으로 왕좌에 오른 이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장녀인 "메리 1세"였다. 어머니와 같이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종교적 믿음에 사적인 복수심이 더해져 많은 "신교도" 즉, "영국 국교도"와 "청교도"를 포함한 "칼뱅주의자" 등을 학살하여 "피의 메리(Bloody Mary)"로까지 불렸다.

그녀의 사후 왕좌에 오른 이가 "엘리자베스 1세"로서 "헨리 8세ㆍ앤 블린"의 장녀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1세"와 같은 학살극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영국 국교회"의 확립에 힘쓰면서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대항자인 "가톨릭"과 "청교도"를 탄압했다.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1세(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식 없이 죽자, 곧바로 그녀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좌에 오르자마자 이러한 극심한 종교, 정치적 갈등의 한 가운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된 다음 해인 1604년 종교계 대표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가톨릭"과 "청교도"를 억압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제임스 1세와 정부 고관 전체를 폭탄과 함께 날려버릴 계획에 동참하다.

1604년, 여전히 유럽에 머물면서 "신교도"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가이에게 잉글랜드에서 한 남자가 찾아온다. 가이의 가톨릭에 대한 헌신과 눈에 띄는 전쟁 기술, 특히 화약을 다루는 솜씨가 특출한 점이 그를 "토마스 윈투어 (Thomas Wintour)"라는 인물과 이어지게 한 것이다. "토마스"는 훗날의 "화약음모사건"의 주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가이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였고, 곧 그를 "로버트 케이츠비 (Robert Catesby)"에게 소개해 주었다. 당시 "케이츠비"는 잉글랜드에서의 가톨릭 세력의 부활을 위해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 왕위를 "제임스 1세"의 딸에게 넘겨주고자 하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구체적인 "케이츠비"의 계획은 대범하게도 "의회 개원식"에 맞춰 의사당을 폭파시켜, "제임스 1세"와 왕비 및 큰 아들, 대신들, 그리고 의원들 모두를 일거에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토마스 퍼시(Thomas Persy)"가 의사당과 인접한 가정집을 임대하고, 그 곳에서 의사당 바로 아래까지 터널을 파서 그곳에 화약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리고 화약의 보관 장소로는 "램버스" 지역에서 임대한 집을 사용하기로 했다. 1604.12월부터 시추작업이 시작되었고, 1605.05월과 7월, 화약통은 어둠을 틈타 "램버스"로부터 맨 처음 20개, 그 다음 16개의 총 1,800 파운드(800 kg)에 이르는 36개가 옮겨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나, 갑자기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의회 개원일"이 원래인 10.03일 보다 한 달여 늦은 11.05일로 연기되었다.

가이는 케이츠비의 계획에 단지 동참했을 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이의 역할이 가장 중요해졌다. 그는 "퍼시"의 하인 "존 존슨(John Johnson)"으로 가장하면서, 화약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의사당 인근 임대한 집의 열쇠도 가이가 관리했고, 그곳에서 터널을 팔 때도 다른 공모자들이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로 가장 큰 성과를 내었으며, 화약을 "램버스"지역에서 "의사당"지하로 옮기는 것도 가이의 관리 하에 이루어졌다. 계획의 가장 핵심인 거사 당일,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것도 가이의 몫이었다.

 발각ㆍ고문ㆍ죽음

18개월 동안 주도면밀하게 진행된 계획은 10.26일 저녁, "가톨릭"신자이면서 상원의원인 "몬트이글 경(Lord Monteagle)"이 받은 익명의 편지 한 통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가톨릭 신자인 의원까지 살해한다"는 것을 염려한 공모자의 한 사람이 그에게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낸 것이다. "몬트이글"은 정체불명의 편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 어떻게 처리할 지 주저하고 있었다. 한편, "케이츠비"는 우연한 기회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계획을 포기할까 고민했으나, 10. 30일 의사당 지하에 숨겨둔 화약통을 누가 만진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가이의 보고를 듣고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의회 개원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불안했는지 "몬트이글"은 갑자기 마음을 정하여 그 편지를 왕에게 보여주었다. 왕은 치안판사인 "토마스 니베트(Thomas Knyvet)"에게 의사당 주변을 샅샅이 뒤질 것을 지시했고, 그는 11.04일 자정 무렵 "의사당 지하"에서 가이를 발견한다. 가이가 성냥과 시계를 소지하고 밤새 기다리고 있다가 낌새가 이상하여 막 그곳에서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고, "의회 개원식"이 시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가이"는 곧바로 심문을 받았지만 자신을 "존 존슨"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또한, 왕과 신하들을 "스코틀랜드 거지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시도가 실패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그의 한결같은 태도는 왕의 경탄까지 자아냈지만, 그 다음 날이 되자 왕은 "존 존슨"을 고문하여 그의 공모자들을 밝혀낼 것을 지시한다. 이윽고 시작되어 수 일 동안 이어진 처절한 고문들은 그의 등까지 휘게 만들 정도였다. 가이는 처음 며칠은 완강히 버텼으나, 결국 사건의 전모와 공모자들을 자백하고야 말았다. 당시 자술서에 남겨진 그의 서명은 고문으로 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이를 비롯한 "화약음모사건"의 공모자들은 모두 체포 도중 사살당하거나 아니면 1606.01.27일부터 시작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가이에 대한 재판은 01.31일에 열렸는데, 재판정에서 그는 기소된 죄목의 일부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공모자들은 대역죄 선고를 받았고, 이윽고 사지가 찢기는 극형에 처해졌다. 그 처형 방식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에, 가이는 이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교수대에서 뛰어내렸고,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그와 동료들의 시체는 반역을 꾀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4부분으로 나뉘어 왕국의 곳곳에 흩어졌다.

 죽음 이후, 더욱 유명해지다

1606.01월 "영국 의회"는 왕의 무사함을 축하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11.05일을 감사절로 정했는데, 영국인들은 이 날을 감사절이 아닌 "가이 포크스 데이"라고 부르며, 하나의 축제일로 생각한다. 이날 밤 아이들은 "가이 포크스"를 상징하는 인형을 들고 다니다가 불에 태운다. 그리고 어른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무리 지어 행진한다. 혹자는 "가이 포크스"를 조롱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혹자는 또 다른 "가이 포크스"가 되기 위해 가면을 쓴다. 또한, 영국 전역의 밤하늘은 화려한 불꽃놀이로 수놓아 진다. 혹자는 왕이 죽음을 모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불꽃놀이를 벌이고, 혹자는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대신 불꽃놀이를 벌인다. 그렇게 11월.05일은 "신교도"와 "구교도" 모두가 즐기는 축제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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