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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친일파ㆍ안중근ㆍ이토히로부미ㆍ총독부

친일파 연구 : 임종국 (1929)ㆍ친일파 척결ㆍ부일 협력자 고발자

by 당대 제일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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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국 (林鍾國ㆍ1929~1989ㆍ60세)"은 친일파 연구의 전문가로, 그가 행적을 발굴하여, 친일파로 지목한 인물 가운데는 아버지 "임문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친일파 연구"가 시작된 지점도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밝히는 것이었다.

 

1. 임종국 (林鍾國1929~1989향년 60)

부일 협력자 고발자ㆍ친일파 연구의 전문가민족정기 회복하려 했던 재야 운동가역사학자문학평론가그가 행적을 발굴하여, 친일파로 지목한 인물 가운데는 아버지 "임문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친일파 연구"가 시작된 지점도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밝히는 것이었다.

  출 생 : 경남 창녕군 신당리       사 망 : 서울 순천향 병원        학 력 : 1952, 고려대 정치학과 입학2년 후 중퇴1968년 재입학졸업         : 이선숙이연순        자 녀 : 31녀         부 모 : 임문호 (천도교 지도자)

 대표작 : 1966 : 친일문학론(親日文學論)실록 친일파        작 품 : 1955 : 이상론-1 (고대문화(1))1956 : 이상 전집ㆍ1957 : 한국 시인전집 (신구문화사 근무)ㆍ1959 : "()" 발표(문학예술지)ㆍ 1960 : "자화상"2(사상계)

임종국

"경남 창녕군 창녕읍"의 부유한 가정에서 43녀 중, 2째 아들로 태어났다1933, 가족 모두 "서울"로 옮겼으며, "경성공립농업학교"에 진학하였다"경성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었고, 이후 "교사음악가경찰" 등 여러 진로를 놓고 방황하였다1952,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였다가, 경제적 사정 때문에, 2년 후 중퇴하였다(1968, "고려대 정치학과"에 재입학해서, 196921회로 졸업했다.)

이때부터 도서관에서 "작가 이상"에 대한 자료를 모아, 1955"고대문화(1)""이상론 1"발표하고, 1956년에 "이상 전집"을 출간하면서, "재야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고, 1957"신구문화사"에 입사, 그해 5"한국 시인전집"을 발간했다1959, "문학예술지"에 시 "()"를 발표하고, 1960"사상계"에 시 "자화상"2편이 추천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계속해서 문인들에 대한 자료를 모으던 중, "대한민국 문단의 유명 문인들""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때부터 오랜 기간 자료를 모아, "친일파 연구"의 효시가 된 "친일문학론(親日文學論)"1966년에 펴냈는데, 이 책은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지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근대사 이해를 위한 필독서가 되었다"친일문학론"을 시작으로, 다른 분야의 "친일파"에까지 연구를 확장하였고, "실록 친일파" 등 여러 저서를 계속 펴내면서, "친일파 연구의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80.11. 건강회복과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요산재(樂山齋천안 근교 삼룡동)"라는 집을 짓고 "밤나무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88"천안 시내 구성동"으로 이사했으며, "친일파 인물"에 대한 자료를 집대성할 계획으로 "친일파총사"를 집필하던 중, 1989"서울 순천향 병원"에서 "폐기종"으로 사망, "천안공원 묘원 무학지구"에 안장되었다.

2. 평 가

우리 역사에서 은폐되어 왔던 바로 그 "친일파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들"을 고발하고, 역사에 척결청산 대상으로 복원한 사람이 있다"친일파"들이 두려워했던 사람, 친일파 척결과 그 잔재 청산을 통해, 민족정기를 다시 회복하려 했던 사람, 그가 아니었다면 이 분야에 대한 자료연구란 거의 사라져버릴 뻔했다그는 이 분야에 관한 한 거의 유일한 개척자요, 선구자였다직함을 얹는다면, "시인문학평론가재야 사학자"가 고작이다.

"시인"이었다고는 하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큼 명작을 남긴 시인도 아니었고, "문학평론" 역시 일반인들 흔히 알만한 대작을 남긴 것도 없다. 나머지 남은 직함 하나가 "재야 사학자"이다"재야학자"라면 자칫 "급진파"로 몰려 매도당하기 일쑤이고, 얼마나 못났으면 그 흔한 "대학 강사 하나 못 땄겠느냐"고 비웃기 십상인 것이 요즘 세태이다

렇지만 1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를 한 번 기억했던 사람들, "친일파그 후손들그를 흠모했던 사람들"은 그를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그만큼 그가 이 분야에서 남긴 족적은 깊고도 넓다그가 "친일 연구"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재야"에 있었기 때문이다강의나 벼슬자리에 연연했다면, 그 역시 이 일을 오래하지 못했으리라애당초 "대학 교수" 같은 명예도 거절했고, "관계 재단연구 기관"의 지원도 거절했다도움을 받게 되면, 그쪽 인물의 행각을 다룰 때, 자연 붓끝이 떨리기 쉽다는 생각에서였다사후에 새삼 존경받는 이유는 어쩌면 그의 업적과 함께 이같이 훌륭하고 고결한 성품 때문인지도 모른다.

"친일 연구"를 통해, 그동안 연구대상에서 소외당해왔던 한 영역을 발굴해 낸 공로자이다1980년대 들어,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근대사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으나, 그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분야를 금기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이들이 "근대사 연구"를 기피한 이유는 우선 대상 인물들이 상당수 살아있고, 자손들이 양지에서 둥지를 틀고 있으며, 게다가 그들이 권력의 상층부에 도사리고 있어서 쉽게 손대지 못했다는 게 통설이다더구나 역사학자들 중에서도 일부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던 "원로 사학자들"이 친일연구를 직간접으로 방해하기까지 했다. "근대사 연구"가 이러할진대, 그 중 가장 핵심인 "친일연구"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타계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그의 빈소를 찾아온 사람은 "안두희(김구 암살범)" 징한 "권중희"였고, 권씨는 "친일한 놈들은 산삼녹용에 팔구십을 사는데, 이리도 선뜻 가시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사실 그는 생전에 "산삼녹용"은 물론 자료 수집을 위해, "일본"에 갈 교통비도 없었을 정도로 가난했다그는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포기한 채, 누구도 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 평생을 바친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다그는 친일연구의 핵심을 단순히 자료조사를 통한 "친일파"들의 인신공격에 두지 않고, 과거 역사를 규명해, 새로운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두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지배 계급"은 자기 이익에만 충실하여, "일제 강점"을 불러왔고, "독재"를 불러왔다는 게, 그가 보는 "친일 문제"의 핵심이다"일제 강점"이 이루어지도록, 외세를 끌어들인 계층,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한 계층, 일제에 우리 민족을 예속화시킨 계급은 바로 조선조 말, "가렴주구"하던 계급이었고, 해방 이후 그들이 그대로 "친일친미독재반민족 통일세력"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가혹할 가, 거둘 렴, 꾸짖을 주, 구할 구)

가렴주구(苛斂誅求) :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들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

이 같은 역사의 오류는 그때그때 매듭을 지었어야 했는데, 아직 한 번도 역사의 정화를 거치지 않은 게 오늘 현실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라도 이들을 정화하지 않으면, "2의 이완용"이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그들은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결국 그의 친일연구는 한낱 과거 역사연구이기 이전에, 역사와 민족정기의 파수꾼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밝힌 "친일연구의 계기"이다.

"일본 놈들은 일개 병사마저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들이 "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라는 타령을 하는 판이니,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인가. 회담이 타결되기도 전에 그런 저자세 타령부터 나온다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다 물밀듯이 일본은 침투해 올 것이오,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 2이 송병준이 얼마든지 생겨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 송병준이 그대로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의 "친일문학론"은 초판 3,000권을 소화하는데, 꼬박 10년 걸렸다당시 "친일문학론"이 잘 팔리지 않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어떤 이들은 책을 펴보지 않고 제목만 보고, "아니 친일문학론이라니, 문학으로 한일 친선을 하자는 책이냐"하는 식으로, "친일"이란 용어 자체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고, 주요 독자층인 대학생들이 거의 해방 후 세대들이어서 "친일"이란 용어 자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그만큼 친일파들이 민족세력을 거세하고 착실히 발판을 굳힌 상태여서 "반공", "애국"이라는 도식은 대중화하였지만, "친일"이란 낯설고 생소한 말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거기에다 일본에 대한 연구 자체도 부족했으니 이는 반일 민족감정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한다당시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 일본학과가 없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친일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5"한일회담"이 재개되면서부터이다.

"오히라 메모"가 뒷거래되면서, 양국 간의 "국교 정상화"가 무르익고 있었다당시 정치계에서는 ""간에 찬반논쟁이, 그리고 학원가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63사태"로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우리 역사에 부끄러운 면을 많이 보여준 종교계도,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참여를 선언하기 시작한 기도 하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일본"은 한국 땅을 다시 찾아왔다.

"일본"은 가해자치고 너무도 당당했고, 상대적으로 피해자였던 우리를 대표하는 "정부"는 너무도 저자세였다. 심지어 "일본"은 대일청구권을 "보상차원"이 아닌, "시혜차원"으로 내놓았고, 그 액수도 실로 보상금이 아닌 "축하금" 정도에 지나지 않는 금액이었다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을 때, "임종국"은 과거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는 걸 보고도 별 의식 없이 보아 넘겼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하는 꼴을 보고서는 더 이상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친일문학론"이 서서히 팔리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965,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은 한국에 본격 상륙하여, 1970년대 초부터는 이미 일본을 경계하자는 여론까지 나오기 시작했다특히 양국 간의 정경유착으로 국민들의 비난이 일기 시작했고, 왜색풍조와 일본인들의 "기생관광" 등이 우리 사회에 물의를 빚으면서, 이러한 여론은 국내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사회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다1970년대 중반, "독도 영유권 분쟁"으로, 일본 관리들 망언이 터져 나오면서, 한때 일본에 대한 경계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경제성장을 외치고, 다른 한편으로 인권유린을 자행하던 "박정희 정권유신시절" "민주화투쟁" 자체만으로도 버거웠기에, 일본에 대한 연구경계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친일문학론"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 들어서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늘어난 양심수들이 애용하면, "전환시대의 논리(영희 저)"에 비할 정도로 인기를 더해 갔다.

1966"친일문학론"을 내고나서 판매실적이 부진으로, 한동안 위축기를 보낸 그가 본격 "친일연구" 어서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부터이다.

당초 이 책에 이어, "23"으로 준비했던 것들을 다시 시작해 보니,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예술 등 우리사회 전 분야에 걸쳐 있는 "친일파친일문제"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게다가 출세작 "친일문학론" 이후로 밀려들기 시작한 원고 청탁이 그를 잠시도 "친일 연구"에서 떼어놓지 않았다"원고 청탁" 중에는 "친일 분야" 뿐 아니라, "징용징병정신대" 등을 비롯해 일제 침략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것들이었다. 서서히 그는 "이 분야의 대가(大家)"로 주목받기 시작해, 그 명성에 걸 맞는 연구를 끊임없이 발표하기 시작했다.

연구방식은 철저히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 고찰"이었다.

그는 "자료수집"에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으며, 원고료나 인세의 상당부분을 "자료구입비"에 쏟았다자료를 찾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대학도서관특수도서관" 등 자료가 있을 만한 곳이면, 그가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며칠씩 도서관 옆에서 하숙하며 자료를 복사하기도 했다결코 유쾌하지 않은, 남의 켕기는 구석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부정확한 자료는 자칫 해당인물이나 그 가족의 명예를 훼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정확한 자료가 아니면 참고대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생전에 그는 누구보다도 "친일파"들의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공개했지만, 그의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단 한 번도 친일파들로부터 협박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친일파"들의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우선 "자칫 임종국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코 다친다."생각과, 또 사실 따지고 보면 하나도 허위사실이나 틀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집필활동이 왕성했던 1980년대 이후, "친일 연구"에 나름대로 가닥을 잡은 뒤부터, 그는 "친일파 아무개" 하면 그의 친일행적은 물론, 그 집안의 친일내력까지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가 저술한 책이나 메모보다, 많은 양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친일파들의 인명카드 15,000"도 이름주요 경력 몇 가지가 적힌 정도에 불과하다그러나 그가 쓴 글들을 보면, "친일파" 개인에 대한 내력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고, 정확하다역사 연구는 추정이나 가정이 아닌 정확한 자료조사 위에서만 참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1980년대 들어, 그의 연구는 드디어 하나씩 결실을 보게 되었다1970년대 이후 근 10년간에 걸친 자료수집과 주변 독서를 배경으로 속속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1980년에 그는 건강도 회복하고, 조용히 집필에만 전념하기 위해, 천안 교외로 이사하여 외딴집을 짓고, 스스로 "요산재(樂山齋)"라 부르고, 그곳에서 "일제 침략사친일파들의 배족사(背族史)"를 규명해 나갔다.

1983, 드디어 첫 결실로 "일제의 사상침략자원침략대륙침략" 등의 실상을 담은 "일제침략과 친일파" 시작으로, 1984년엔 "일제총독부 고관들"의 침략 이면사를 다룬 "밤의 일제 침략사", 1985년에는 "강화도 조약" 이후 70년간의 독립사상과 일제탄압을 다룬 "일제하의 사상탄압"을 펴냈다대략으로 알려져 온, "일제침략"의 실태와 친일파들의 친일행각이 백일하에 드러내, "근대사 연구"에 한 획을 긋는 영역을 개척해 놓았다.

1987, 다시 "친일논설선집"을 펴냈다.

1986, 2권의 "친일문학 작품선집"을 펴낸 바 있는 "실천학판사"가 출판한 이 책은, "일제하 정계재계학계문화계종교계여성계" 등 사회 각 분야의 저명인사 72명이, 당시 "신문잡지" 등에 발표한 108편의 "친일문장 모음집"이다"머리말"에서 그는 "친일행위가 개인 추문으로 끝날 일이 아님"을 명백히 지적하고, "민족의 제단 에서 허물 있는 자는 허물을 벗어, 도약의 제수로 바칠 것이며, 허물없는 자는 그것을 음복하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썼다1987, "친일 논설선집"을 내고 나서, 그는 친일문제의 전체를 총체로 규명하기 위해 "친일파 총서(10)"를 펴내기로 계획했다1988, "일본군의 조선 침략사"를 내놓고 나서,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집필 동반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임종을 8개월 앞두고, "김승태이명화"를 동반자로 하여, 1994년 완간 계획으로 집필을 분담했다10권 중, "임종국"4(총론사상침략과 친일파정치침략과 친일파해방 이후 친일파), "이명화" 3(경제침략과 친일파문화침략과 친일파만주/중국침략), "김승태"4(양종교서양종교/교육침략과 친일파)를 맡기로 했다하지만 "임종국"은 겨우 환갑을 넘기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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