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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친일파ㆍ안중근ㆍ이토히로부미ㆍ총독부

음악 : 안익태 (1906)ㆍ애국가 작곡ㆍ만주국 환상곡ㆍ안익조

by 당대 제일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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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태 (安益泰ㆍ에키타이 안(스페인)ㆍ1906~1965ㆍ59세) "는 1936년, "한국환상곡ㆍ애국가"를 작곡해서 동포들에게 알려, 널리 전파되었다. "바인가르트너(오스트리아)"에게서 "베토벤"을 배웠고,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어 지휘자로 명성을 떨쳤으나, "독일ㆍ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 안익태 (安益泰에키타이 안(Eak-tai Ahn스페인어)1906~1965향년 59)

국가(國歌)인 애국가 작곡ㆍ한국 출신의 스페인 지휘자작곡가연주가(첼로트럼펫바이올린)친일인명사전 등재

1948.08,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가 작곡한 "애국가"가 정식국가로 채택되었다현재,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주요 활동은 어디까지나 "지휘"였고,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초반에 걸쳐,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맡아, 활동하였다1955.02.19,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을 받아 귀국했다.

•  출 생 : 평남 평양부      •  사 망 : 스페인 바르셀로나 병원    •  사 인 : 병사 (간경화)     •  종 교 : 장로교

•   : 1946- 여롤리타 탈라베라 (Lolita Talavera스페인 여성)

•  학 력 :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  1921 (15) : 일본 유학도쿄 세이소쿠 중학교 (음악특기자) → 1926 (20) :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 (첼로 전공)  →  1930 (24)  : 미국 유학신시내티 음악학교커티스 음악학교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 (첼로지휘)

•  작 품 : 애국가(1936)한국환상곡(합창, 관현악, 1936~1937)강천성악(교향시, 관현악곡, 1936)ㆍ만주국 축전곡 (합창, 관현악, 1940년대)한송이 흰백합화(성악, 기악, 1962?)ㆍ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에텐라쿠(1938): 이 곡은 "일왕 즉위식" , 축하곡으로 연주되던 곡의 선율을 차용한 것

안익태

2. 친일 행각 : 일본 축전곡 (슈트라우스 곡) 연주만주 환상곡/ 만주 축전곡 작곡

1938, "아일랜드"에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때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하여는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안익태 스스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930년대 후반에 만났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베를린" 머물렀던 1942년에 만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건, 빨라도 1941년 이후이고, 그나마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1941~1943년까지, 주 베를린 만주대사관 공무원인 "에하라 고이치 (江原綱一)"의 집에서 살았다1941, "독일"에서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손녀를 구출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슈트라우스"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고,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로부터 초청지휘를 받으면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독일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이 무렵, "독일나치 제국"에 협력했던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 축전곡"을 연주하는 한편, 1942,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만주 환상곡만주 축전곡"을 작곡하는 등 "일본독일 제국주의"를 알리는 음악 활동에 두루 참여했다.

그가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의 가사에는 추축국인 "일본독일이탈리아"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사의 일부는 "에하라 고이치"가 썼다고 한다"에하라 고이치"는 물밑에서 독일 내의 일본 첩보활동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독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3.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

2006, "유럽"에 유학하여, "음악학"을 공부하던 "송병욱"씨는 "1942년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1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 환상곡"을 지휘한 동영상을 소개하며, "안익태의 친일 의혹"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2000년 경, 비슷한 의혹이 제기된 적은 있었는데, 당시 단순히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 영상"으로 알려진 게, 사실은 "만주국 기념 음악회"였음을 밝혀낸 것이다.

더 나아가, "만주국 환상곡"의 음악이 "한국 환상곡"과 상당 부분(특히 625 이후 추가분) 일치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려졌다는데, 해방 전 그의 "유럽 활동"은 그 세부적인 내용이 잘 밝혀져 있지 않았는데, 파헤쳐 보니, 대부분 "친일 행적이었다."는 것이다.

"유럽 활동" 내내, 일본식 이름인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하였으며, 흔히 "유럽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하면서,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다."고 막연히 알려진 것도, 대부분 "에텐라쿠교쿠토(극동)""프로파간다성" 작품들을 연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1941년에는 "명치절(메이지 덴노 생일) 축하 음악회"에서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연주한 것까지 밝혀졌다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와의 관계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당초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유럽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통설과는 달리, 실제 그를 도운 것은 주로 "일본- 독일협회의 지원"이었고, "슈트라우스"와 인연을 맺은 것도 오히려 이 단체의 주선을 통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슈트라우스"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단순히 한두 번 만났을 때, 자기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들은 게, 크게 부풀려졌을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2015, "안익태 후원자"로 알려진 주 베를린 만주대사관 공무원인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 글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다1952, "에하라 고이치""일본 음악잡지"에 기고한 "안익태 군의 편모"라는 글에는 "안익태" 이런저런 친일 행적과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등이 언급되어 있다 "안익태""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안익태" 본인이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간판을 이용하여, 유럽 각지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4. "애국가"의 표절 논란? : "한국 환상곡"의 일부가 "애국가"이다.

1960년대 "애국가" 표절 논란이 처음 불거졌다.(표절 노래는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불가리아 노래)) 1964,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피터 니콜로프(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하지만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안익태의 유럽 방문 전"이었고, "유럽지역"의 노래를 일일이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표절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게 유력하다.

2000년대,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애국가"는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친일파의 곡을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쓸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뿐만 아니라, "애국가 저작권" 문제도 제기되었다일단 "저작권 문제"는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부인 "롤리타 안"이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일단락되었다.

4. 한국 환상곡 (Korea Fantasy) : 안익태의 대표작

1936,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카네기 홀"에서 주관하는 "작곡 콩쿠르"에서 "한국 환상곡(Korea Fantasy)"이 입선되었으나, "뉴욕 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의 거부로 낙선되었다1936, "유럽"으로 건너가, "베를린"에서 "애국가"를 작곡하여, "미국일본중국" 등지에 있는 교포들에게 발송했다.

"미국유럽"을 오가던 1936~ 1937년 사이에 작곡되었고, 1937"헝가리"에서 "코다이"의 음악지도를 받으면서, "한국 환상곡"을 수정했다1938"더블린(아일랜드 수도)"에서 "국립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애국가"의 선율은 1935"미국"에서 구상하였고,(애국가 작곡 시기는 표절 논란과도 관련이 있어 중요), "625전쟁" 이후 마지막 부분이 추가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한국 환상곡" 전곡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5. 행적 연구

1940년대 "유럽 활동"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김경래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기록된 자료로 전해져 왔으나, 최근에 진행된 연구들에서 이들 자료의 잘못된 정보와 왜곡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2000, 음악연속간행물 "객석"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이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에 대한 기록이 종전의 1940년이 아닌 1943년이며, 1차례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같은 해, 발굴되었다는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2006년에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송병욱"에 의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11.19,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독일스위스" 등지의 문서 보관소 등에서 찾아낸 자료들로 "안익태의 1938~ 19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2008,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안익태의 명단 포함에 대해, "안익태 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이 명단의 "군 부문"에는 2째 형인 "안익조"도 포함되어 있다.

6 안익조 (安益祚1903~1950.11.07향년 47)

일제 강점기 음악인의사군인곡가 안익태의 2째 형 (3살 차이바로 위 형)ㆍ1950.06.25, 한국 전쟁시, "7연대 헌병사령부"에서 중령으로 복무하고 있었으며, 개전 초기, "조선인민군""서울 점령시에, "안익조"는 자신의 집을 "인민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무기도 내주었다이 일로 인해, 09.28일에 국군이 돌아오자, "부역죄"로 체포되어, 부인과 함께 처형되었다2008,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동생 "안익태""문화예술" 부문에 들어 있다.

출 생 :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사 망 : 서울     사 인 : 처형 (부역죄)

학 력 : 일본 유학도쿄 제국대학 의과 졸업 (폐결핵 전문의)

경 력 : 일본제국 만주군 소교- "만주군 군의관"으로 "단둥"에 있는 "안동지구 경비사령부" 근무ㆍ국군 육군 중령- 7연대 헌병사령부

"평양의 객주업"을 하는 집안에서 7형제 중 2째로 태어났다"음악체육"에 모두 재능을 갖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야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만돌린 연주"가 수준급이었으며, 가극 공연에 관여하고, "태평 레코드"에서 문예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테너인 자신의 음반을 출반하기도 했다"폐결핵 전문의"로 의원을 열어 경영하기도 했다.

"만주군 군의관"으로 "단둥"에 있는 "안동지구 경비사령부"에서 "소교" 계급에 올랐다"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 지역"에서 "국군"에 투신하여 "헌병 장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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