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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친일파ㆍ안중근ㆍ이토히로부미ㆍ총독부

사업 : 박흥식 (1903)ㆍ조선 최고의 갑부ㆍ화신백화점 사장

by 당대 제일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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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朴興植ㆍ1903~1994ㆍ91세)"은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며, "화신백화점" 사장으로, 조선 최고의 갑부였다. 1948.10월,  1948.10월,"반민특위"가 조직되었을 때, 1번째로 체포된 인물이었다.

 

1. 박흥식 (朴興植1903~1994향년 91)

조선 최고의 갑부ㆍ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기업인ㆍ화신백화점 사장화신산업 회장흥한화학 사장광신학원 이사장흥한재단 이사장ㆍ 광복 이후, 사업에서 손을 떼었지만 1950~1980년까지 30년 동안 기업인으로 활동

•  출 생 : 평남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    •  사 망 : 서울대학교 병원

•  : 산남 (山南)     •  사 인 : 합병증 (파킨슨병ㆍ알츠하이머병)    •  학 력 : 평남 용강보통학교

•  : 한인하 (재혼경희대 교수피아니스트)     • 경 력 : 경제기획원 국가경제자문위원 (1972~1975)

박흥식

10대 중반 나이에 인근의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시작한 뒤, "인쇄업지물업" 등으로 사업이 계속 번창해 나가기 시작하였다1926, "경성부"로 올라와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한 뒤, 1931"화신백화점(종로)"을 개설했다

"화신백화점의" 성공과 함께, 1934"화신연쇄점"을 설립해, 다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조선 최고의 갑부"로 불리게 되었다.  1940.07, "주식회사 경인기업"의 대주주가 되었고, 동시에 "경인기업 상무이사"로 취임했다일찍부터 "조선총독부"와 밀착하여 사업을 확장했으나, 본격적인 친일행적은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지원 과정에서 드러난다이 무렵 친일 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를 맡았고,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에도 가담했다.

전쟁 말기, 친일인사들의 총본산이었던 "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의 이사를 지내고 고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 기간, "매일신보(조선총독부 기관자)"에 기고 활동과 각종 간담회 참여로 전쟁을 지원했다1944, 종로의 인사들이 학도병을 독려하기 위해 조직한 "종로익찬위원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4, 전투기 생산기업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45년 종전 직전에는 전투기 생산을 위한 자신이 운영 중이던 "광신학교""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바꾸어 전투기 생산 인력을 양성할 정도로 군수산업 분야에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군수 업체로서, "조선총독부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다공장의 인력은 강제 징용된 노동자로 채워졌다.

1945.11, "조선비행기 공업주식회사"의 상호를 "조선기계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매각하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청"이 일반 시민에게 배급할 "화신"의 포목잡화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400만 원의 폭리를 취득하고, "비행기회사 청산정리자금"으로 "일본 육군성"에서 받은 5,000만 원 가운데 2,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1946.02월 기소되었다.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에 벌금 200만 원을 구형받았으나, 1946.05월 무죄가 언도되었다12"주식회사 화신백화점흥한피복주식회사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이사)"에 취임했다. 1947.10월에는 "재단법인 흥한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에 취임했다

1949.01.08, "반민특위 제1호 검거자"로 구속되었으나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공민권 2년 정지형"이라는 낮은 구형에도 무죄 판결을 받아 방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그가 제일 먼저 체포된 이유는 "미국 도피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과 함께, 재계의 오랜 실력자로 정계에 끈을 많이 갖고 있던 그가 "장직상(미군정 수도경찰청 청장 장택상의 형)"과 만나거나 현직 경찰 "최란수"에게 수사금을 지원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 재판"에서 풀려난 다음 해인 1950년부터 다시 사업가로 돌아가 줄곧 사업 활동을 해왔다"516 쿠테타" 직후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61.07월에 석방되었다"판교"에 대규모 유통센터를 설립하고자 했지만, 고령의 나이이와 1988년부터 앓던 "파킨슨 병"이 겹쳐서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91"알츠하이머 병"까지 합병증으로 겹치면서 이후 1994년 연초에는 합병증이 매우 악화되어 병원을 자주 오갔으며, 그 해 05.10일 사망하였다.

2. 일화 : 영친왕 (英親王)

영친왕 (英親王1897~197073): 마지막 황태자고종 7째 아들의민태자  이방자 (李方子1901~198988): 일본 제국 황족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메이지 천황 조카)와 왕비 이쓰코의 장녀로서 도쿄에서 출생 (이진이구)

"영친왕방자 여사"가 당시 "미국 뉴욕"에서 거주하던 아들 "이구" 내외를 방문하고 "도쿄"로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비행기 표를 구입하지 못해 곤란을 겪고 있었다당시 "영친왕 내외"와 친분이 있던 "김을한"이 이 사정을 알고, 당시 "오재경(구황실 사무총국장)" 에게 사정을 언급하게 된다. "오재경""구황실 사무총국 예산"으로 비행기 표를 사려고 했으나 절차가 곤란하여 다시 "박흥식"에게 언급을 했는데, 그는 흔쾌히 비행기 표를 사서 "영친왕 내외"가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김을한""박흥식"에게 "영친왕"을 도와준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시 서울에는 미스코시하라타죠오지야미나카이 등 일본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은 여럿 있었으나, 한국인의 것으로는 오직 화신 하나밖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자금이 풍부한 일본인들과 경쟁을 하자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영친왕 내외가 동경으로부터 본국에 다니러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기회에 두 분 전하를 화신으로 오시게 할 수 있다면 크나큰 영광이 될 뿐더러, 일본인들의 백화점에 대해서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왕직에 여러 번 탄원했습니다 하지만 이왕직에서는 왕 전하를 백화점으로 가시게 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 계획은 부득이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1933.08.06일 갑자기 영친왕 내외가 일부러 화신백화점을 참관해주셔서 크게 면목을 떨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그때의 영친왕 생각으로는 조선인이 처음으로 경영하는 백화점을 당신 내외가 잠깐 가봄으로써 조금이라도 도와주자는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3. 화신백화점 (和信百貨店)

1931"박흥식""조선 경성부 혼마치(종로구)" 설립한 "지상 5층의 백화점"으로,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제5대 백화점 중 하나로, 유일한 조선인 운영 백화점이었다.

일 시 : 1931~ 1987      창립자 : 박흥식    소재지 : 일본제국 조선 경성부 혼마치 (서울 종로구 종로타워)

화신백화점

4년 뒤인 1935, "화신백화점 서관"에서 화재가 나서 건물이 전소된 후, "박길룡"의 설계로 1937.11월에 지하 1지상 6층의 현대식 백화점 건물로 재건되었다. 재건된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내부에 "엘리베이터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고 옥상에 "전광뉴스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1945, "광복" 이후에도 영업을 지속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리한 사업 확장경영 악화이후 개점한 "신세계백화점롯데백화점미도파백화점" 등에 밀려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87.02월 문을 닫았고 건물은 4개월 후에월 철거되었다후에 "삼성 이건희"가 토지를 매수하여, 1999"종로타워(밀레니엄타워)"를 완공하였다그러나 2016.03"이지스 자산운용"에 정식으로 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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