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張志淵ㆍ1864~1921ㆍ57세)"는 1914~1918년 사이, "매일신보(총독부 어용신문사)" 주필로 활동하여, 730여 편의 친일 한시ㆍ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 오른 이들 가운데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이다.
1. 장지연 (張志淵ㆍ1864~1921ㆍ향년 57세)
애국 계몽운동가ㆍ언론인ㆍ황성신문사 사장ㆍ경남일보 주필ㆍ1905년, "황성신문" 주필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ㆍ이 날에 목 놓아 우노라"를 기고해 유명하다. 이 글에서 "고종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ㆍ을사오적"을 규탄했다.
• 출 생 : 경북 상주 • 묘 소 : 경남 창원시 현동 • 사 인 : 병사 (술병)
• 본 명 : 장지윤 (張志尹) • 호 : 위암 (韋庵) • 별 칭 : 화명 (和明)ㆍ순소 (舜韶)ㆍ숭양산인 (崇陽山人)
• 수 상 : 1962- 건국훈장 국민장 (친일 논란으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이 취소→ 2012년 무효 판결)
• 작 품 : 증보대한강역고ㆍ유교연원ㆍ위암문고ㆍ대한최근사ㆍ동국역사ㆍ대동문수ㆍ대한신지지ㆍ대한기년ㆍ일사유사ㆍ농정전서ㆍ만국사물기원역사ㆍ소채재배전서ㆍ화원지ㆍ숭산기ㆍ남귀기행ㆍ대동시선
• 경 력 : 1885 : 3~ 4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 → 1894 : 식년시 진사 3등급 → 1898 : 황성신문 창간 (남궁억)ㆍ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활동 → 1899 : 시사총보ㆍ황성신문 주필 → 1902 : 황성신문 사장 → 1905.11.20 :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 (1906.01월 석방) → 1908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ㆍ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
구한말에 애국ㆍ계몽 운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으나, "경술국치" 이후 1914년부터 "매일신보(조선총독부 기관지)"에 기고한 논설 730여 편이 문제가 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1921년 초, 결국 "술병"이 들었는데, "일본 외무성"의 문서에 의하면, 1921.05월경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경천"의 초청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마을인 "주우찌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후 "술병"으로 인한 병세가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까지 치료에 몰두했지만, 결국 사망했다.
2. 구국 계몽 운동ㆍ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06월 "향시(鄕試) 응제과(應製科)"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으며, 이후에도 과거에 4차례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1894.02월 "식년 진사시"에 3등 683위로 입격했으나, 이 무렵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1895.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을미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0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1897.0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1898.04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개칭하여 발행에 참여했고, 9월에 "황성신문"으로 개편할 때에도 참여했으며, 1898.10월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05.11.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바로 다음 날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11.21일 투옥되었고, 이어 "황성신문"도 정간되었는데, 1906.01월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구국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수많은 교육 활동에 앞장섰으며, 1907년에는 "애국 부인전"이라는 책을 냈는데, 바로 최초의 "잔 다르크"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신채호"처럼 역사적 인물로 애국 영웅 정신을 고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친일단체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대한자강회ㆍ대한협회"의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면서, 1년가량 머물렀고, 이후 귀국해 "경남 진주"에서 1910년 "경술국치"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되기도 했던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2. 1914~1918년, 친일행각
그러나 1914년부터의 행적 탓에 논란이 상당하다. 1914년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라는 "조선총독부" 인사의 권유로, "매일신보(조선총독부 어용 신문사)"의 주필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친일 한시와 사설 730여 편을 기고했던 것 때문이다.
친일 전력이 밝혀진 후, 관련 연구 학자 대다수와 여론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친일 행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언론 활동을 두고, 그는 "①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② 원고 내용은 "일사유사", 종교 풍속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③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조건에 입각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논설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성을 띤 연설이 많다.
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됨은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1918.12.01일자 "매일신보"에의 논설 기고를 마지막으로, 1919.04월 "경남 양산군"을 유람했으며 1919년 "3ㆍ1운동"이 발생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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