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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친일파ㆍ안중근ㆍ이토히로부미ㆍ총독부

군인 : 김백일 (1917)ㆍ간도특설대ㆍ흥남철수작전ㆍ제1군단장

by 당대 제일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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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 (金白一ㆍ1917~1951ㆍ 34세)"은 1937년부터 "만주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간도 특설대"에서 활동하였는데,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백일"은 "송석하" 다음으로 이 "특설 부대" 창설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이었다.

 

1. 김백일 (金白一가네자와 도시미나미(金澤俊南)1917~1951.03.28향년 34)

군인간도 특설대 창설요원/ 활동만주국(상위(대위))육군 소장"625전쟁""육군 제1군단장"으로 참전"흥남" 철수작전 수행ㆍ만주군 상위(대위)로 재직 중, 815 해방을 맞아, "조선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초대 "제병협동본부(육군교육사령부육군보병학교의 전신)"의 본부장이었다.

"인천상륙 작전" , 전세가 반전되었을 때, "김백일의 제3사단""38도선"을 제일먼저 돌파하여, "압록강 유역""혜산진"까지 북상했다. "625전쟁" 중인 1951.03.28,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인근의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출 생 :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옌지(선대 고향- 함경북도 명천군)      사 망 :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인근

  사 인 : 비행기 추락사고    •  묘 소 : 사망 2달 후 유해 발견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장군 묘역에 안장

  : 명연 (溟淵)아명- 김찬규 (金爛奎)

  학 력 :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수료만주 봉천군관학교(5)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 조선 경비 보병학교통위부 보병학교

 경 력 : 1937~ 1945 - 만주국 육군 (상위(대위))태평양 전쟁 / 1946~ 1951 - 대한민국 육군 (육군 소장)한국 전쟁

 수 상 : 서보장(일본 정부)- "만주군 상위""태평양 전쟁"에 종군  / 사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 "무공훈장 태극장" 수여

김백일1

< 관련 지명학교 명동상>

길 지명 : 백일로 (전남 장성군상무대(尙武臺) 정문 입구의 길) /  백일로 (광주 서구 화정동)이 길 안에 "광주학생 독립 운동기념관"까지 있다.

학교 명 : 백일초등학교 (광주 서구 화정동)성진초등학교(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도 단체 "성진회")  또한 일대에 "백일산(뒤에 있는 동산)백일 어린이공원백일 아파트백일 주유소"

동 상 : 육군보병학교 (전남 장성군1966.06.10)  /  거제 포로수용소 (경남 거제2011.05.31)

김백일2

2.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

"625 전쟁" 당시, 반격전에서 38선을 맨 먼저 돌파한 "육군 제1군단장"으로, "흥남 철수 작전"에서 10만 명의 "피난민"을 해상수송을 통해, 구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흥남 철수 작전""중공군""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국군 제1군단""흥남항구" 통해, 해상 철수한 작전이다 (일시 : 1950.12.15.(출항 기준)~ 12.24 (10일간))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UN국군"1950.12"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흥남" 주변에 몰려든 10만 명의 북한주민들도 "UN"의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하였다

"흥남 철수작전"은 대규모적인 "공 합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그 같은 작전의 성공으로 "UN국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해,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12.23(해군 기준으로는 24)까지 이후 "UN국군 제1군단""흥남철수"를 완료하였다"알몬드 장군(미 제10군단장)"은 처음에는 600만 톤이나 되는 무기장비를 수송해야 했기에 "피난민 수송이 어렵다"고 하였으나, "김백일 장군(국군 제1군단장)현봉학(통역인)"의 설득으로 마지막에 남는 공간에 피난민 수송을 허락하였다.

3. 간도 특설대 활동

본래 집안이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이나, 부모 대에 "간도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일제 강점기, "펑톈"에 있던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하고, 1937년부터 "만주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만주군 상위""태평양 전쟁"에 종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서보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간도 특설대"에서 활동하였는데,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백일""송석하" 다음으로 이 "특설 부대" 창설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이었다"간도 특설대""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만주 북서부"에 잔존해 있던 "대한독립군단"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띈 "독립군 토벌부대"였는데, 이 때문에 그는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요 인물이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4. "군 보급품" 처분으로, "연대장"에서 해임

1945,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고향인 "명천"으로 귀국했다가, 월남하여 "미군정" 영역으로 들어왔다이때 이름을 "김백일(金白一)"로 개명하였으며, 1946년에 "군사영어 학교"를 졸업한 뒤, "중위"로 임관하였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제3연대"를 창설하여, "연대장"에 올랐다1946.10, "전북 이리"에서 "군 보급품"을 처분하여, "화려한 결혼식"을 한 것 때문에, "연대장"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5. 1948년 여순사건 때, 현지 "계엄사령관"

1948, "여순 14연대 반란사"이 일어났을 때, "전남 광주"에 소재한 "국군 제5여단"을 이끌고, "전남 여수"에 진입하여, "현지 계엄사령관"으로서 진압작전을 지휘하였다1948.12.15, "국방부""5여단장 김백일" 8명의 "중령""대령"으로 특진 발령하였다1949"옹진반도 전투"에서는 "옹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공을 세웠다"제병협동본부"(육군 보병학교의 전신) 교장3사단장(1950.01~ 4)을 거쳐, 1950.04.22."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임명되었다.

6. 1950"한국 전쟁", "1군단장"

"육군본부"에 부임한 직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군단장"을 맡았고, "소장"으로 진급했다"인천상륙 작전" , 전세가 반전되었을 때, "김백일의 제3사단""38도선"을 제일먼저 돌파하여, "압록강 유역""혜산진"까지 북상했다"중국 인민지원군" 참전 후, "흥남 시"에서 해상으로 철수할 때, "알몬드 장군(미 제10군단장)"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피난민 수송을 성공시켰다.

"625전쟁" 중인 1951.03.28,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인근의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사망 2달 후에 발견된 유해는 "국립 서울 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되었다2008,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7. 사 후

1966.06.10, "전남 장성군"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전남 장성군""상무대(尙武臺육군 군사교육훈련시설)" 정문 입구의 길은 그의 이름을 따서 "백일로"라고 명명되기도 했다.

2011.05.31,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회장 황덕호)""함북 625전적기념사업회""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흥남철수작전 유공자 추모제"를 열고, 이날 "흥남철수작전 기념탑" 옆에서 "김백일 장군"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지난해 "강원도 속초"에서 세우려다가,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경남 거제"에 세워진 것이다 2011.06.15., "거제 시민단체연대협의회""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서 "친일파 김백일의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친일파" 논란을 빚고 있는 "김백일 장군 동상"을 향해 계란을 던졌다.

시민연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고, "거제 시""김백일 기념사업회"에 동상 철거를 공식 요청하였다 "철저히 검증된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한 은인은 "김백일 장군"이 아니라, "현봉학 박사"이며, 미군정 군사기록에도 "현봉학 박사"와 알몬드 사령관과의 인간관계를 통해, 난민의 승선이 허용된 기록이 있다." (현봉학(통역인미 제10군단 소속민간인 고문관))

2014.11.24,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백일초등학교""김백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육군보병학교 사격장"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016.01.01, "친일파 김백일"의 이름을 딴, "백일초등학교""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도 단체 "성진회"의 이름을 따서, "성진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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