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金宗元ㆍ1922~1964ㆍ42세)"은 1951.02.09.~11일까지,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발생한 "거창양민 학살사건"에 있어서 "작전지역 안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계엄사령관"이었다.
1. 김종원 (金宗元ㆍ일본명 (金山宗元)ㆍ1922~1964ㆍ향년 42세)
일제 강점기 친일파ㆍ일본군 군인ㆍ국군장교(1922~1964, 군인ㆍ경찰)ㆍ경찰(내무부 치안국장)ㆍ1956.09.28일 발생한 "장면 총리 저격사건"의 배후 (임흥순ㆍ이익흥과 함께 거사)
• 출 생 : 경북 대구 경산 • 사 인 : 병사 (당뇨병) • 학 력 : 대구농림학교 → 조선 경비사관 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1기
• 1946.01 : 국방경비대 제1연대 A중대 사병 → 1946.06 : 조선경비사관학교(1기)ㆍ소위 임관 → 1948.10 : 5연대 1대대 대대장(마산 주둔) ㆍ"여순사건" 당시 반란군 진압 → 1950 :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ㆍ경남지구 계엄사령관ㆍ부산지구방위사령관 → 1951.02 : "거창양민 학살사건"시, 사건 은폐 → 1951.09 : 군법회의 회부(3년 선고→ 대통령 특사로 석방→ 군 불명예 파면→ 경찰로 이직) → 1952.07 : 전북경찰국장ㆍ서남지구전투사령관ㆍ경남경찰국장ㆍ경북경찰국장 → 1956 : "5ㆍ15 대통령 선거" 뒤,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경찰 총수인 "내무부 치안국장" 임명 → 1956.09 : "치안국장" 재직 시, "장면 총리 저격사건"(1956.09.28일 발생)의 배후 → 1960.05 : "4ㆍ19혁명" 뒤, "장면 총리 저격사건" 배후로 판명→ 경찰 파면→ 서대문형무소 복역
1946.01.15일, "국방경비대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이었으며, 1948.10.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을 토벌하고자 부산에 주둔하던 "5연대 1대대 대대장"으로서 참여했다.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근무할 당시, "독립군"과 그들을 지지하던 "조선인"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그는 "여수"에서도 "시내에서 잡아오는 가담자로 지목된 시민들을 다른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도"로 목을 치고, 지치면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이라는 평가가 있다.)
1949.05월, "신성모"의 추천으로 "계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11사단"이 1951.02.09.~11일까지,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거창양민 학살사건"이 발생한다. "작전지역 안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ㆍ공비(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ㆍ적의 보급품이 될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11사단장은 "최덕신"이었고, 이런 명령을 내린 사람은 "계엄사령관 김종원"이었다.
학살사건 직후, 사건 조사와 관련된 국회의 방문 조사 때, 국군을 빨치산으로 가장하여 습격해 조사활동을 중단시켰고, 이 사건으로 1951.0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재판 결과 3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충무공 이순신"에 비유하며, 특별사면 해주었다.
2. "일본군 하사관" 출신ㆍ1948.10월,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 반란 당시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지원병"으로 근무했다. 1946.01.15일, "국방경비대"가 창설됐을 때, "제1연대" 사병으로 입대해,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1기로 입교하여, 1946.06.15일 "소위"로 임관했다. 1948.10.19일, "여순사건" 발생 당시, "제5연대"와 1949년 국군 "제3사단 22연대"를 이끌었다. "한국전쟁" 직후,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됐고, "경남지구 계엄사령관ㆍ부산지구방위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46.01.15일, "국방경비대 제1연대 A중대" 소대장이었다. 1948.10.27일, "마산"에 주둔하던 "5연대 1대대 대대장"으로서,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 "당시 반란을 진압하였다.
3. 1951.02월 거창양민 학살사건시 은폐
1951.02.09.~11일까지, "국군 제11사단(최덕신 준장)ㆍ9연대(오익경 대령)ㆍ30대대(한동석 소령)" 병력이 "경남 거창군 신원면"일대에서 비무장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했다. 03.29일, "국회"에서 "신중목 국회의원(거창 출신)"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었고, 03.30일 "국회ㆍ내무부ㆍ법무부ㆍ국방부"의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04.07일, "합동 진상조사단"이 방문 조사를 위해, "신원면"으로 가던 도중, "김종원 대령(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이 "최영두 소령(9연대 정보참모)"에게, 부하들을 "공비(빨치산)"으로 위장 매복시켜, "합동조사단"에 공포를 쏘아, 현장 접근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실행하여, 조사활동을 중단시켰다.
결국 "김종원"은 이 사건으로 1951.0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재판 결과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군"에 복직과 동시에 "불명예 파면"되었고, "경찰"로 이직했다.
4. 5ㆍ15부정선거ㆍ"장면 총리 저격사건"에 개입
1952.07월, "전북경찰국장"을 시작으로, "서남지구전투사령관ㆍ경남경찰국장ㆍ경북경찰국장" 등을 거쳤다. 1956년, "5ㆍ15대통령 선거" 뒤,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경찰 총수인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됐다.
1960.05월, "치안국장" 재직 시, "장면 총리 저격사건(1956.09.28일 발생)"의 배후로 밝혀져, "4ㆍ19혁명" 뒤에 파면된 뒤, "임흥순ㆍ이익흥" 등과 함께 구속됐다. 재판에서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도중, 1961.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 석방된 뒤, 1964.01.30일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 최덕신 (崔德新ㆍ1914~1989ㆍ향년 75세)
군인(육군 중장)ㆍ천도교 교령ㆍ"지리산 토벌군"으로 "거창양민 학살사건"의 현장 최고 책임자(6ㆍ25전쟁 때, 8사단ㆍ11사단 사단장으로 참전)ㆍ남한 출신 월북자로서는 최고위급 정치인 (외무부장관(9대)ㆍ1961~1963)ㆍ"동백림 간첩단사건 (동베를린 사건)"으로 월북하여, "북한"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김일성"은 10대 소년 시절, 부친인 "최동오(독립운동가)"가 만주에 설립한 "화성의숙"을 다녔고, 사망시 "김일성"이 직접 조문했다고 한다. ( 출 생 : 평북 피현군 용흥리 / 묘 소 : 애국열사릉 (북한판 현충원))
독립운동가 "최동오(崔東旿)"의 아들로 태어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장을 맡았다. "국민혁명군"에서는 주로 미군과 국민혁명군 간의 군사외교ㆍ협력 업무를 맡았고 이러한 경력은 후일 "휴전협정"에서 한국 대표를 맡거나, "혁명정부"에서 "외무부장관"을 맡게된 계기가 되었다. 해방 이후,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6ㆍ25 전쟁 때, 8사단ㆍ11사단 사단장으로 참전하였으며, 막바지에는 "휴전회담 대표"를 역임하였다. "제1군단장"을 지낸 뒤 1956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 "초대 남베트남 대사ㆍ태국 대사" 등 외교관을 역임하다가,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1961년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63.08월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 1967.07월 "동백림 간첩단사건 (동베를린 사건)"의 수습이 실패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되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박정희"는 그를 해임해 버렸다. 1967년부터 6년간 "천도교 교령"을 지냈고, 1976.02월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고, 공개적으로 6ㆍ25 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 활동을 벌이다가, 1986년 아예 북한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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