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 (金東仁ㆍ1900~1951ㆍ51세)"은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ㆍ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 김동인 (金東仁ㆍ히가시 후미히토ㆍ1900~1951ㆍ향년 51세)
소설가ㆍ시인ㆍ언론인(조선일보 학예부장)ㆍ문학평론가ㆍ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1919년, "2ㆍ8 독립선언"과 "3ㆍ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ㆍ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 조선문필가 협회"를 결성하였다.
• 출 생 : 평남 평양 • 사 망 :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 • 종 교 : 개신교
• 호 : 춘사 (春士)ㆍ금동 (琴童) • 필 명 : 금동인(琴童仁)ㆍ만덕(萬德)ㆍ김시어딤ㆍ동 문인(東 文仁)
• 학 력 : 일본 도쿄 메이지 중학교 →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 일본 메이지가쿠인 대학교
• 가 족 : 부- 김대윤 (金大閏ㆍ평양 대부호ㆍ개신교 장로) / 이복 형- 김동원 (독립운동가ㆍ안창호의 측근) 이복형 "김동원"은 일제강점기 말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고, 변절하여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정부수립 이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정치인이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 저 서 : 배따라기ㆍ감자ㆍ광화사ㆍ붉은 산ㆍ광염소나타(狂炎)ㆍ백마강ㆍ발가락이 닮았다ㆍ운현궁의 봄(흥선대원군을 대장부로 묘사한 역사소설)
• 동인문학상 : 1955년,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으며,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다.
평론ㆍ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 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연애ㆍ여성 해방운동을 반대ㆍ비판하기도 하였다. 1919.0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인 "창조 (創造)"를 자비로 간행했다. 창간호에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했다.
해방이후, 1947.0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0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1948.03~1949.0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수많은 친일활동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등의 논조를 썼다. 주요내용은 "일제말기의 친일행위는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ㆍ조선어와 조선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내적 저항행위"라고 미화했다.
말년에 사업에 실패하고,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수면제에 의존해 살아갔다. 가장 값싸고 강력한 "포수크로랄"을 주로 먹었다 1949.07월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반신불수가 되면서 불면증ㆍ우울증이 찾아왔고, 서울 쪽방에서 병마ㆍ고독과 싸우며, 수면제ㆍ술이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1950년, 6ㆍ25전쟁 때, 몸이 불편하여 피난을 포기하고, 홀로 서울에 남아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951.01월, "서울 하왕십리 자택"에서 사망, 동네 이웃사람들이 시신을 묻어주었다. 한국 전쟁 직후,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에 그의 비참한 죽음이 알려졌다. 이후, "박종화ㆍ염상섭ㆍ장준하" 등에 의해 그의 작품성에 대한 조명 및 추모 동이 시작되었다.
2. 일본 유학
"평양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김대윤"과 어머니 옥씨(玉氏)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했고, "숭실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어 1915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에 편입했다. 1917년 "부친상"으로 일시 귀국하여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9월 "가와바타화숙(川端畵塾)"에 입학했다.
"도쿄" 유학 중, "이광수ㆍ안재홍ㆍ신익희" 등을 만나 친구로 지냈다. 1919.02월,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 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서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3. 문학ㆍ사회 활동ㆍ독립운동 참여
1918.12월부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이광수ㆍ신익희ㆍ최팔용" 등과 함께 "2ㆍ8 독립 선언"을 준비하는 활동을 하였다. 1919.02월,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1919.03.05일 귀국했고, 26일 동생 "김동평"이 사용할 "3ㆍ1 만세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체포ㆍ 구속되었다가, 06.26일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이상주의에 깊이 공감하였으나,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 등 한국인 대표단이 내쳐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신여성의 자유연애에 부정적인 태도를 표출했던 그는 신여성 "김명순"을 모델로 삼은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을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라는 관념을 가진 음탕한 여자, 정조관념에는 불감증인 "더러운 여자"로 묘사한다. 소설가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 혹은 "과부 처녀"라고 조롱하였다.
1932년, 발표된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1932)"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설전을 벌였고,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무려 15년 동안이나 관계를 끊고 살았다. 일각에서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1923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그는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도 1932년에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 1933.04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기자 겸 학예부장으로 약 40여 일간 재직했다.
4. 친일 행적 논란
일제 강점기 말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변절하였다. 1939.02월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04.15~05.13일까지 "북지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활동하여,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을 다녀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 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1.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 간담회"에 출석하여 발언하였고, 12월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시국적 작품을 낭독했다.
1943.04월, "조선총독부" 지시하에 "조선문인 협회ㆍ조선하이쿠 협회ㆍ조선센류 협회ㆍ국민시가 연맹"등 4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문인 보국회"로 출범하자, 06.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ㆍ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1944.01.20일에 조선인 학병이 첫 입영을 하게 되자, 01.19~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 민중의 황민화 - 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의 제목으로 학병권유를 연재하면서 선동했다.
1945.08.15일 광복 당시, 그는 오전 10시 "아베 다쓰이치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을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오에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할 것을 알고 있던 "아베"는 청탁을 거절했다.
5. 광복 이후ㆍ이광수 변호
해방 직후, "이광수"에 대한 단죄 분위기가 나타나자, 앞장서서 "이광수"를 변호하는 몇 안 되는 문인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1945.08.17일, "임화ㆍ김남천"이 주도하는 "중앙문화건설협의회" 발족회에서 "이광수 제명"을 반대하며 퇴장하였다.
9월, "한민당"이 창당되어 그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1월, "미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다. 1945.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지하였고, 1946.0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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