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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친일파ㆍ안중근ㆍ이토히로부미ㆍ총독부

밀정 : 박석윤 (1898)ㆍ민생단 조직ㆍ만주국 관료

by 당대 제일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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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윤 (朴錫胤ㆍ1898~1950ㆍ52세)"은 "조병상 (曺秉相ㆍ1891~ 1950?)박두영"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했던 "민생단"(일본 제국의 간첩 조직ㆍ독립 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밀정 조직)"을 조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1. 박석윤 (朴錫胤1898~1950향년 52)

일제 강점기 언론인공작원만주국 관료민생단 조직ㆍ광복 직후,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여운형"에게 인수하도록 하였을 때, "여운형"의 대리인으로 "선총독부" 교섭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박두영조병상"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했던 "민생단"(일본 제국의 간첩 조직독립 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밀정 조직)"을 조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주에서 "민생단" 사건을 직접 겪은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통해 그의 이력을 상세히 었으며, 그의 최후와 관련하여 "광복이후 신분을 감추고 숨어살다가 적발되어, 민족반역자로서 엄한 심판을 받았다"고 밝혔다.

•  출 생 : 전남 담양 출신     •  사 망 : 평양     •  사 인 : 사형    학 력 : 도쿄 제국대학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  : 최설경 (최남선의 여동생)

•  수 상 : 1940 :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 4위 경운장(景雲章)

•  경 력 : 1920 년대 : "시대일보" 정치부장ㆍ"매일신보" 부사장 1930 년대 : 만주국의 폴란드 바르샤바주재 총영사  1932 : 간도에서 "민생단" 창단  1941 :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참사관 겸 외무국 참사관  1942 :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외교부 참사관"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 위원  1940 :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총무

2. 도쿄 제국대학ㆍ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

조선총독부와 밀착하여, 독립 운동가들에게 전향 공작을 벌이는 일로 일제에 부역하기 시작했다31운동 직후, "김준연" 전향을 꾀했다가 실패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도쿄 제국대학"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유학했다귀국 후 "시대일보 정치부장매일신보 부사장을 지내며, 언론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했다.

3. 민생단 조직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자연스럽게 항일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형국이 되자,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하며, 독립 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밀정조직 "민생단" 창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1932.02.05, "동민회의 조병상"을 비롯하여, "김동한" 등 친일인물들을 끌어들이고, 천도교 인사들까지 규합하여, 간도에서 "민생단"을 창단했다. 단장은 군인 출신의 "박두영"이 맡았다이 조직은 결국 중국 공산당의 오판을 불러와, "민생단" 사건으로 조선인 독립 운동가 수백여 명이 살상당하는 사태를 가져왔다.

민생단의 후신인 "간도협조회"에도 참가하여 밀정조직을 관리했으며, 관제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 가담하여, 선무 공작을 지도했다"만주국"이 수립되자, "만주국 외교부"의 공무원으로 임명되어, 해외에서 외교적인 독립 운동을 벌이는 "이승만" 등의 동정을 일제에 보고하는 등의 밀정 활동을 계속했다

이렇게 쌓은 공을 인정받아 "만주국의 폴란드 바르샤바주재 총영사직"까지 맡게 되었다1939, "히틀러 총통"이 이끌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자, 그는 "만주국"으로 귀국했다"간도협조회"에서 무장 항쟁을 벌이는 독립 운동가들을 상대로 한 귀순 공작에 종사했다1940, "만주국" 정부로부터 "4위 경운장(景雲章)"을 받았으며, 1941"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참사관 겸 외무국 참사관, 1942"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외교부 참사관 등을 역임했다1940,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총무를 역임하는 동안, 일제의 항일 무장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적극 가담했고, 1942"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 위원을 지냈다.

4. 광복이후,  사망

광복 직후,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여운형"에게 인수하도록 하였을 때, "여운형의 대리인"으로 "조선총독부" 교섭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1946.03, "평남 평양"에 도착한 뒤, 지병인 고혈압과 동맥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양덕온천"으로 요양을 갔다고 전해진다. 1946.07, "평남 양덕군"에서 "친일분자"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3일 동안 "양덕보안소"에 구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47.02.24, "평양 인민교화소"에 구류된 뒤, 검찰소의 심문을 받았고, 04.19일 최고재판소에 기소되었다1948.01.22, "평남 재판소"에서 "친일반역자"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1948.03.06, 1심 판결에 불복하여, 최고재판소에 상소했지만, 기각되었다1948.06.09, 사형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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