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금 (朴春琴ㆍ1891~1973ㆍ82세)"은 직업적 친일 정치 깡패로,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ㆍ사주 김성수"를 각각 납치ㆍ구타하였다. " 이기동 (李起東ㆍ1885~1952ㆍ67세)"과 한패거리였다.
1. 박춘금 (朴春琴ㆍ도야마 미쓰루ㆍ1891~1973ㆍ향년 82세)
직업적 친일 정치 깡패 (흑룡회 계열의 폭력배 거두)ㆍ정치가 (일본 중의원)ㆍ1932년, "제18회 총선"에 출마하여 "도쿄 제5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을 역임했던 조선인은 "박춘금" 단 한 명뿐이다)ㆍ"이기동(李起東ㆍ1885~1952ㆍ향년 67세)"과 한 패거리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일제의 주구노릇을 했을 뿐이다.
• 출 생 : 경남 밀양시 삼문동 • 사 망 : 도쿄 게이오 대학 병원 • 학 력 : 무학(서당에서 천자문 수학)
• 사 인 : 병사 • 묘 지 : 경남 밀양시 교동 천주교 밀양성당 아래 산 중턱
• 1905 : 경북 대구의 병영에서 급사 → 1908 : 도일ㆍ도쿄/고베 등지에서 고용살이ㆍ자전거 직공ㆍ탄광갱부ㆍ토목 노무자 → 1917 : 나고야 조선인(폭력배) 회장 취임, 흑룡회 계열의 폭력배 → 1932 :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 당선 → 1945 : "대의당" 결성ㆍ당수 취임
정부 수립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결성되었고, 1949.07월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목하여, "맥아더 사령부"에서 체포ㆍ강제 국내송환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와해ㆍ해산되어, 그는 일본에서 평생 동안 기거하게 된다. 이후 박춘금은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았다. 1955.06월, "조국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상임고문을 맡았다. 1962년 "도쿄"에 있는 "아세아 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했다. 1973.03.31일, "도쿄 게이오 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망한 뒤, 아버지 묘소 바로 밑에 무덤을 만들어 몰래 묻었다. 1992년, "일한문화협회"에서 박춘금의 무덤 옆에 "송덕비"를 세우면서, 묘가 세상에 알려졌다. 친일부역자이자 정치깡패인 "박춘금"의 송덕비ㆍ묘를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2002년 송덕비ㆍ묘는 파묘되어 철거되었다.
2. 직업적 친일파 깡패
일본 : 박춘금 (朴春琴ㆍ1891~1973ㆍ82세) / 이기동 (李起東ㆍ1885~1952ㆍ67세) / 조선 : 조병상 (曺秉相ㆍ1891~1978ㆍ87세ㆍ민생단 사건) / 만주 : 박석윤 (朴錫胤ㆍ1898~1950ㆍ52세ㆍ최남선 매부)
국권상실 후, 조선인들은 "만주ㆍ일본" 등지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토지수탈ㆍ과중한 세금 등으로 인해 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일병탄" 직후,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불과 수천 명에 불과했으나, 1945년에는 그 수가 220여만 명에 달했다. 재일조선인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각종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처음에는 "조선인 보호라"는 명분을 내건 것이 보통이었다. 1920년 "도쿄지역"에서 "이기동ㆍ박춘금"이 결성한 노동자 상호부조 단체인 "상구회(相救會)"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같은 단체들은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일제의 관변단체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유력자나 총독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으며, 재일 조선인 감시ㆍ탄압은 물론 직간접적으로 일제의 내선융화 정책에 부응하였다. "상애회ㆍ동아신흥연맹ㆍ조선인협회ㆍ내선협화회ㆍ중앙협화회" 등이 그런 단체들이다. 주요간부들은 단체 활동을 통해 "일본" 내에서 입지를 다진 후, "제국신민"으로서 일본 지방의회에 진출하는 등 세력기반을 확충해 나가기도 했다. 선거에 출마해,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의 주택ㆍ도항(渡航) 문제ㆍ민족차별" 등 현안을 들고 나왔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일제의 주구노릇을 했을 뿐이다.
3. 일본으로 이주
서당에서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천자문을 읽었을 뿐 "무학"이다. 청년시절 술집에서 일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1908.08월경(17세), 무일푼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ㆍ고베" 등지에서 "고용살이ㆍ자전거 직공ㆍ탄광갱부ㆍ토목노무자" 등 육체노동으로 전전하다가, 1917.05월(26세 때) 나고야조선인 회장에 취임했다.
1920년, "도쿄"에서 "이기동"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애(相愛)ㆍ공존공영 정신"에 입각한 일선융화를 표방하면서, 노동단체 "상구회(相救會)"를 조직ㆍ회장에 취임한 뒤, 이를 1921년 사회사업단체 "상애회(相愛會)"로 개편하였는데, 이 단체는 사실상 폭력조직이었다.
재일조선인 노무자의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일본 경보(警保)당국ㆍ총독부 등이 사주ㆍ후원하여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애회"는 조선인 노무자의 교화ㆍ구제를 위하여, 직업소개ㆍ인사 상담ㆍ공동숙박소 건설 등을 사업으로 표방했으나, 일본인 기업주 편에서 노무자를 학대ㆍ압박한 폭력ㆍ착취단체였다.
4. 깡패 활동
1922.05월, "이기동"이 설립한 "일선기업 주식회사"의 상무 취채역에 선임되었다. 1923.09.01일, 관동(간토)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학살사건"이 가라앉을 무렵, 그는 조선인 노무자(상애회 회원) 300명으로 된 노동봉사대를 결성하고, 경시총감 "아카치"와의 연락 하에 시체처리ㆍ 조선인 노무자 색출ㆍ수용 등의 작업에 종사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제당국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 당국의 환심을 사게 되었고, 전 일본적 조직 확대의 기반을 잡아, 1928년에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확충하고, 전직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를 재단이사장으로 영입하였다. 회장에 "이기동",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했다.
5. 서울에 "노동상애회" 조직
그는 조직을 조선에까지 확대하여, 1924.04월 지부격인 "노동상애회"를 서울에 조직하였다. "동아일보"가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 각파유지연맹ㆍ폭력조직 등을 비난하자, "사장 송진우ㆍ사주 김성수"를 각각 납치ㆍ구타하였으며, 1924.07월의 "하의도(荷衣島) 소작쟁의"에서도 상애회원으로 하여금 "농민층 청년회"를 습격하게 하는 등 청부폭력에 동원되었다.
1926.08.01일, "일본 나가사키"시에서 열린 "아세아민족대회 (전 아세아민족협회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팽창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열린 행사)"에서 "이기동ㆍ홍준표ㆍ이동우" 등과 함께 조선인 대표로 참가했다. 1928.02월, 지주인 "도쿠다"의 요청으로 "하의농민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게 했다. 일본과 국내를 오가면서, 노동쟁의ㆍ소각쟁의ㆍ반일운동 등 집회가 있을 때마다 깡패들을 동원하면서 탄압하는데 크게 앞장섰다. 1929년, "상애회관"을 지을 당시 회원수는 2만 명에 달했고, 일본 내 주요도시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6. 제국의회 진출ㆍ정치깡패 활동
노동자ㆍ농민들의 소각 쟁의ㆍ노동 쟁의 등 반일사상을 크게 탄압하고, 일선융화를 적극 지지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높은 환심을 샀다. 1932년, "제18회 총선"에 출마하여 "도쿄 제5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4년간 "제국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36년 총선거에는 낙선했다. 제20회 총선(1940년)ㆍ총선(1942년)에서 다시 당선되어,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본 중의원에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줄 의사가 없느냐ㆍ조선에 일본군 사단을 증설할 의사가 없는가" 등을 질문하는 등, 중의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7. 일제말기, 친일대열의 선봉장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일제말기 친일대열의 선봉장을 자처했다. 조선으로 드나들면서 "춘만광산(春滿鑛山)"등 이권 사업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중일전쟁 이후 "동양 평화를 위하여" 등의 연제로 "황민화 시국강연"을 하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필승 체제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대화동맹(大和同盟ㆍ야마토 동맹)"을 조직, 이사에 취임하였으며, "시간극복대강연회 (時艱克服大講演會)" 등을 주최하여 필승사상을 고취하였다. "총독부"에 국방헌금 3만원을 기부하였다.
1945.02월에는 "미영격멸ㆍ내선단결ㆍ생전필승"을 구호로 내걸고, "대의당"을 조직했다. "대의당" 조직에는 군ㆍ관료ㆍ친일세력들 다수 참석했으며, 일제의 괴뢰정권이었던 중국난징 괴뢰정부ㆍ 만주국의 대표 등도 연사로 참석했다. 그가 당수로 있던 "대의당"은 광복 50일 전인 1945.06.24일에 결성된 단체로, 항일ㆍ반전(反戰)사상의 격파를 목적한 폭력단체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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